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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께 올리는 箚子(차자)

bthong 2007. 6. 9. 10:04
  • 통치자는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不德의 소치’라 할 뿐…
    대통령이 선거법 탓하시면 누가 헌법을 귀중히 여길까요
  • 송호근 서울대 교수
    입력 : 2007.06.09 00:09 / 수정 : 2007.06.09 00:10
    • ▲송호근 서울대 교수
    • 대통령님, 국립대학교의 일개 서생(書生)이 감히 이런 글을 올렸다고 너무 괘씸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보수 언론의 날개에 올라타 현정치를 농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제 중앙선관위가 어렵게 내린 결정에 국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한국정치가 또 다시 아수라장이 될 뻔한 그 위기를 경고 조치로 겨우 봉합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시는 그 기쁜 자리에서, 그 경고장을 보란 듯이 찢어버렸습니다. 더 강도 높게, 더 냉소적으로 국가기구의 판결을 짓밟고, 야당 유력후보를 폄하하고, ‘절대 속지 마세요’라는 당부의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래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나요? 법이 무너지면 국가도 없고 대통령도 없습니다. 국민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52개월에 걸친 통치를 그래도 정신 차리고 보아왔던 서생의 충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선관위의 경고장 찢어버린 셈 

      쓸쓸하시지요? 외로우시지요? 통치자의 고독과 분노를 충분히 전해 받고도 남습니다. 통치자는 원래 외롭습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모두 외로웠습니다. 신료들의 화려한 논리와 궁중의 온갖 법규에 가로막혀 뜻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으니까요. 민주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겁니다. 헌법질서와 법규의 보호를 받는 각종 거부권이 통치력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있으니까요. 그것을 법적 테두리 내에서 돌파하는 것, 그것이 통치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만하면 많이 했습니다.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은 애초에 기대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지요? 2002년 말, 새로 탄생할 대한민국을 향해 외치던 환호소리를, 광화문에 모였던 희망의 인파를. 그런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어쩌면 때 이른 환송식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게 민심(民心)인 걸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탓하지 마세요. 통치자는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덕(不德)의 소치라고만 할 뿐, 적의(敵意)를 내비치지 않습니다. 대통령님이 결성한 백년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장수들이 지금 뿔뿔이 흩어진 것은 따지고 보면 애정결핍증 때문일 겁니다. 마음 비우고, 한번 돌아보세요. 열린우리당이 장자(長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가를. 대통령님이 어제 화를 내셨듯, 그들이 ‘정치를 제대로 못배웠거나’ ‘바깥 친구들과 내통한’ 탓이 아닙니다. 애비없는 자식의 심정으로 흩어졌을 뿐입니다. 쓸쓸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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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위기 올 수도 

      어제 원광대학에서 하신 민주주의에 대한 설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민주주의는 내부의 적과 싸우면서 발전합니다. 그런데, 적이 너무 많아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빠집니다.

      적을 회유하고 설득하는 힘, 그것이 대통령의 통치술입니다. 국민들이 진보정치의 진정성을 홀대했다고 섭섭해 하지 마시고, 그저 부덕의 소치라고 했다면 더욱 설득적이었을 겁니다. 현직 대통령이 온갖 비난의 당사자가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정권재창출의 첫째 조건인 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를 호령해 왔던 부시 대통령도 곧 스스로 산화(散華)할 준비를 갖추겠지요. 차기 후보들에 관한 품평을 정당한 정치행위라고 믿었던 현직 대통령이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공무원법과 선거법이 상충된다고 ‘세계에서 유례없는 위선적 제도’라고 하신다면 누가 국가와 헌법을 귀중하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것도, 중앙선관위가 자제를 요청하는 공식결정을 내린 다음 날, 다시 그 특정 후보를 냉소하고, 공약(公約)을 비방하고, 현행 법규를 비아냥대신다면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가 그곳에서 돌발할지도 모릅니다. 경고를 거스르는 그 고집스런 반복 행위에 혹시 3년 전 혹독하게 겪었던 정치적 재앙의 기획이 은폐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게 다 대통령님이 느끼시는 쓸쓸함의 소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못 다한 일을 다음 정권에 제대로 넘겨주는 것, 혹시 자신의 의지와 맞지 않더라도 새로운 리더십의 탄생을 위해 민심을 읽고 위로하는 것, 국민들이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법과 제도를 관리하는 것, 그리고 영광스런 기억을 품은 노병처럼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야말로 어렵게 성장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훨씬 품격 있게 만드는 길임을, 그제와 어제, 마치 곡예를 하듯 위기의 문을 들락거리는 한국 정치의 현상황을 주목하면서 일개 서생이 감히 말씀드립니다.

       

      키워드…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간략한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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