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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

bthong 2009. 7. 15. 00:31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



일본 학자 오다 스스무가 쓴 `동양의 광기'에 `벽전소사(癖顚小史)'라는 책의 소개가 있다. 본명을 감춘 문도인(聞道人)이란 이가 엮은 것으로서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의 광기(顚)어린 집착을 보인 49명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것은 나쁘게 보면 병일 수도 있지만,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로 비칠 만큼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나은 결과를 나타낼 수가 없다. 대충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래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선조들 중에도 이런 광기를 가진 분들이 여럿 있었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자들이 그랬고, 거북선 제작에 몰두하였던 나대용이 그랬다. 근대로 와서는 조선후기 실학을 꽃피우게 했던 허균, 박지원, 정약용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대의 메이저리거들이 아니라 주변 또는 경계에 머물렀던 안티 혹은 마이너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보보호로 시선을 돌려보면 해커(hacker)가 있다. 이 용어는 1950년대 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동아리 모임에서 유래했다. 철도의 신호기와 동력 시스템을 연구하던 학생들이 밤마다 몰래 학교 소유의 IBM 컴퓨터를 사용했다. 당시 MIT에서는 `해크(hack)'라는 말을 `작업과정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 이외에는 어떠한 건설적인 목표도 갖지 않는 프로젝트나 그에 따른 결과물'을 지칭하는 은어로서 사용하였는데, 동아리 학생들이 여기에 사람을 뜻하는 `-er'을 붙여 해커라고 쓰게 되었다. 해커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하였으며, 현재의 컴퓨터 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애플컴퓨터를 창업한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도 초기에는 해커였다.

국내 현황을 살펴보면 정부에서도 건전한 해커양성을 위해 대학 정보보호 동아리 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대학 정보보호 인력의 올바른 정보보호 마인드를 배양하고, 우수한 정보보호 인력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다. 지원내용을 살펴보면 최신 정보보호 기술교육실시, DEFCON과 같은 해외 해킹관련 콘퍼런스 참가지원, 침해사고 정보공유 활성화 및 연구활동 지원, 정보보호 전문자격(SIS) 취득지원, 동아리 전용 웹사이트 운영, S/W 보안취약점 찾기 대회개최 등 다양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원책들이 체계적인 지원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투입되는 예산규모를 보더라도 실질적인 우수인력을 키워내기엔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이다.

 

20세기가 기술력과 경제력의 경쟁시대였다면, 21세기는 정보력의 경쟁시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보를 생성하는 것만큼 정보보호도 중요하다. 정보보호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본, EU 등 선진국이 앞다투어 정보보호 관련 투자를 늘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미국을 중심으로 민간기업의 정보보호수준을 기업가치의 척도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지 오래다. 머지않아 우리 기업들도 정보보호의 수준이 주가에 반영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여기서의 관건은 우수한 정보보호 시스템과 관리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우리의 기술수준은 선진국과 비교해 2년 정도 뒤쳐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 우수한 정보보호 기술을 개발하고 시스템을 관리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보보호 선진화는 요원할 뿐이다. 따라서 우수한 인력확보가 절실한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최근 총무성 발표에 따르면 매년 3000명씩 IT관련 우수인력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늦게나마 정보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보보호 관련 지원정책을 늘려가고는 있지만, 정작 정보보호 인력양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소홀한 감이 있다. 그동안 의정활동을 통하여 이 부분에 대해 수차례 지적한 바 있지만 정책당국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실천의지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우리에게는 무엇에 미치도록 빠져드는 DNA가 내재되어 있다. 특이한 국민성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특성이지만,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무섭도록 놀라운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전방위적인 관심과 지원을 통해 우리의 우수한 재원들이 미치도록 정보보호에 몰두하도록 해주자. 불광불급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서상기 국회의원

 

 미쳐야 미친다
정 민 지음
푸른역사/2004년 4월/330쪽/11,900원

▣ 저 자 정 민
1960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2004년 현재 모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한시 미학을 쉽게 풀어 소개한 『한시미학산책』과 청소년을 위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비롯하여 『비슷한 것은 가짜다』『한서이불과 논어병풍』『와당의 표정』『돌 위에 새긴 생각』『초월의 상상』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를 탐색한 이 책을 통해 남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는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 혹은 이리 재고 저리 재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성실과 노력으로 일관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지은이는 18세기 지식인들이 마니아적 성향에 열광했다는 데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쳐 이룬 업적과 그 삶의 태도를 기록한다. 굶어죽고 만 천재 천문학자 김영, 과거시험 대필업자라는 조롱 속에 세상을 냉소하였던 노긍, 『백이전』을 1억 1만 3천 번(지금의 숫자로는 11만 번) 읽은 독서광 김득신, 어찌 보면 엽기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깊이 빠졌던 이들의 이야기가 더없이 재미있을 뿐 아니라 그 올곧은 태도가 한없이 아름답다.

▣ 차 례
1. 벽癖에 들린 사람들
미쳐야 미친다 - 벽(癖)에 들린 사람들
굶어 죽은 천재를 아시오? - 독보적인 천문학자 김영
독서광 이야기 - 김득신의 독수기(讀數記)와 고음벽(苦吟癖)
지리산의 물고기 -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 - 박제가와 서문장
그가 죽자 조선은 한 사람을 잃었다 - 노긍의 슬픈 상상

2. 맛난 만남
이런 집을 그려주게 - 허균과 화가 이정
산자고새의 노래 - 허균과 기생 계량의 우정
어떤 사제간 - 권필과 송희갑의 강화도 생활
삶을 바꾼 만남 - 정약용과 강진 시절 제자 황상
실내악이 있는 풍경 - 홍대용과 그의 벗들
돈 좀 꿔주게 - 박지원의 짧은 편지
노을치마에 써준 글 - 가족을 그린 정약용의 편지

3. 일상 속의 깨달음
연기 속의 깨달음 - 이옥과 박지원의 소품산문
그림자놀이 - 이덕무와 정약용의 산문
천하의 지극한 문장 - 홍길주의 이상한 기행문
신선의 꿈과 깨달음의 길 -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허균의 생각
세검정 구경하는 법 - 정약용의 유기(遺記) 세 편

 

 미쳐야 미친다
정 민 지음
푸른역사/2004년 4월/330쪽/11,900원

미쳐야 미친다 - 벽(癖)에 들린 사람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조선의 18세기는 바로 이런 광기로 가득 찬 시대였다. 이전까지 지식인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믿음 아래,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무자기(毋自欺) 공부, 마음이 달아나는 것을 막는 구방심(求放心) 공부에 힘을 쏟았다. 이런 것이야 시대를 떠나 누구나 닦아야 할 공부니까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탐구는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사물에 몰두하면 뜻을 잃게 된다고 하여 오히려 금기시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강조하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사물이 아니라 앎이, 바깥이 아니라 내면이 최종 목적지였다. 이런 흐름이 18세기에 오면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진다. 세상은 바뀌었다. 지식의 패러다임도 본질적인 변화가 왔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내면 풍경 속에 자주 등장하는, 무언가에 온전히 미친 마니아들의 존재는 이 시기 변모한 지적 토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학자 오다 스스무가 쓴 『동양의 광기』를 읽다가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벽전소사(癖顚小史)』! 명말청초 본명을 감춘 문도인(聞道人)이란 이가 엮고, 원굉도(袁宏道)가 평을 쓴 책 이름이었다. 무언가에 미친 벽(癖)이 마침내 광기(顚)와 결합하여 정신병리학적으로 볼 때 이상 성격이나 왜곡된 욕망, 강박 증상 따위를 빚어내는, 속된 말로 이른바 '또라이'들의 열전을 모은 책 이름이었다.
나는 이 벽이야말로 18세기 지식인을 읽는 코드라고 확신하고 있던 차였다. 조선의 18세기 지식인들은 이처럼 벽에 들린 사람들, 즉 마니아적 성향에 자못 열광했다. 너도나도 무언가에 미쳐보려는 것이 시대의 한 추세였다. 이전 시기에는 결코 만나볼 수 없던 현상이다.

 

1. 벽(癖)에 들린 사람들
굶어 죽은 천재를 아시오? - 독보적인 천문학자 김영
김영(金泳, 1749∼1817), 내가 그와 처음 만난 것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이 유일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문집에 대해 해제를 쓰면서였다. 벌써 10년 저쪽의 일이다. 자술(自述)에 따르면 홍길주는 7∼8세 때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 때 이미 연립방정식의 해법 및 제곱근과 세제곱근의 풀이,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을 완전히 해득했을 만큼 수학과 기하학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의 『호각연례(弧角演例)』는 황도와 백조 상 해와 달의 운행을 예측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평면기하학을 넘어선 구면삼각법(球面三角法)의 난해한 이론을 소화하여 천문학에 활용한 것이다. 스물아홉(1814)에 착수하여 23년 뒤인 쉰둘(1837)에야 완성을 본,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간과치 못할 특이한 저술을 완성한 후, 홍길주는 자신의 수학 선생인 김영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으나, 불행히도 그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못내 애석해했다.
홍길주가 쓴 『김영전(金泳傳)』에 따르면, 김영은 인천 사람으로 신분이 미천했으며, 용모가 꾀죄죄하고 말도 어눌하여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역상산수(曆象算數)의 학(學)에 있어서 신수(神授)라 할 만큼 독보의 조예가 있었다. 그는 스승 없이 『기하원본(幾何原本)』1 책을 독학해서 익힌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에 흥미를 느껴 향후 15∼16년 간 역상(曆象)에 더욱 침잠 몰두하여 마침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김영의 재능을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각신(閣臣) 서호수(徐浩修, 1736∼1799)였다. 산학으로 당대에 가장 이름이 높았던 서호수는 관상감(觀象監 : 오늘날 기상대와 천문대의 기능을 아우르고 있던 서운관)의 제거(提擧)로 있을 때, 김영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몇 마디 말을 나누어본 후, 대번에 당대 으뜸으로 자부하던 자신의 실력이 그에게는 결코 미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김영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김영은 관상감에 기용될 수 있었다.

서호수의 아들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이 쓴 김영의 전기와 홍길주의 기록까지 더하면 김영은 비쩍 마른 꾀죄죄한 용모에 후리후리한 키, 성깔 있고 고집 있게 생겼으되, 말은 어눌하여 우물대기만 하는 괴팍한 성격의 사내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그에게는 기질(氣疾)이 있다고도 했다. 그가 젊은 시절 산술에 통달하고도 본원(本源)의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겨 여러 해 고심진력하느라, 마침내 유울지질(幽鬱之疾)을 앓아 여러 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보아 상당히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던 것 같다.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주변 사람과 별 교통이 없는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공부하였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스승조차 없는 답답함이 더하여 마침내 히스테리 발작 증세로까지 나타났던 모양이다.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789년의 천역(遷役), 즉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할 당시였다. 그 전해에도 일식(日食)의 도수가 북경과 큰 차이를 보이자 김영이 들어가 원인을 규명한 일이 있었다.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정남쪽에 보이는 별인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지난지라 별자리의 위치가 1도 가까이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이 실제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김영은 이를 정확히 해결하여 천역의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하였는데, 공로를 인정받아 특례로 역관(歷官)에 발탁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한 살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문직이었던 관상감에는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특례로 발탁된 전례가 없었으나 정조가 특명으로 그에게 벼슬을 내리면서 "김영과 같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상례에 따를 수 없다."고 하자, 관상감의 관리들은 모두 그를 시기하여 '이는 우리 관규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격렬히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그를 역관으로 임명했을 뿐 아니라 아예 관상감의 관원들을 그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관상관 관원들은 매번 추보(推步 : 천체의 운행을 관측함)의 일이 있을 때마다 김영에게 묻지 않고서는 위로 보고조차 할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종6품 등의 벼슬을 거쳤는데, 다른 일을 하면서도 역관의 일은 늘 겸임하였다. 나라에 성력(星曆)과 관련된 큰 논의, 즉 일식이 있거나 혜성이 나타나면 그는 관상감에 불려들어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의 능력은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하였다. 그의 계산은 역상 서적상의 오자까지도 다 잡아낼 만큼 정확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후원자였던 서호수마저 세상을 뜨자, 주변머리 없던 김영은 달리 청탁할 데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그만 벼슬에서 쫓겨나고 만다. 하지만 1807년 혜성이 나타나더니 1811년 다시 큰 혜성이 나타나자, 나라에서 관상감에 명하여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 했는데,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들였다. 또 1813년 겨울 역법 상의 문제로 중국 흠천감(欽天監)에 가 자문을 청할 때에도 관상감에서는 김영 외에는 달리 적임자가 없었다. 그때 그는 연경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으로 『만년력』 몇 권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후로 역법 상의 해묵은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었다. 그러자 관상감들의 질투는 극에 달했고, 이제 무서울 것 없는 그들은 거리낌 없이 김영을 못살게 굴었다. 서유본은 이때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관상감에 들어간 뒤 일이 있을 때는 인정받아 중히 여김을 받았고, 일이 끝나면 그 능력을 질투하여 왁자하게 떼거리로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혹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다 욕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용렬한 소인배들의 행태가 눈에 선하다. 성깔 있던 김영은 더러운 꼴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벼슬을 걷어치우고 나와버렸다.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집도 절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서당 선생 노릇으로 근근이 연명하던 김영. 아무도 늙고 병든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벼슬을 때려치운 뒤, 그는 수학 공부에서 『주역』에 대한 공부로 관심을 확장시켰다. 마흔이 훨씬 넘어서야 영의정 김익의 강권으로 장가를 갔지만, 먹고 살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다 부서진 집에서 『주역』 연구에 몰두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주역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 그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오직 학문만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세상을 뜨기 직전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김영은 학문을 저술로 남기라는 서유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양법(量法)과 시학(視學)을 실용화하고, 물을 퍼올리는 수차(水車) 제도에 있어 불편한 용미거(龍尾車) 대신 편리한 용골거(龍骨車)의 기아(機牙) 도설을 완성해 수리와 농공에 보탬이 되게 하며, 자명종과 시계의 도설을 정리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이 세 가지 작업을 필생의 사업으로 알고 민생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자 밤낮 힘쏟고 있다고 말이다. 다만 그는 시간이 넉넉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결국 그는 이를 탈고하지 못하고 굶주림으로 세상을 떴다. 죽기 전 그는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록해둔 난고(亂藁)가 상자에 가득하다. 반드시 훗날 책을 이루어내려 했으나 이제는 글렀구나. 내 죽은 뒤 삼가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가서 삼호(三湖)의 서유본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의 부고를 들은 서유본이 그 집에 사람을 보냈을 때 원고가 가득 담겨 있던 책 상자는 관상감 생도가 이미 훔쳐가 버린 뒤였다. 이미 그의 연구를 도둑질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살았을 때 면전에서 욕하고, 주먹을 휘두르던 자들이었다. 김영의 어린 자식들은 그가 죽자 유리걸식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언젠가 대만 정치외교학과 본관 앞에서 참혹한 형상의 개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다. 목 둘레가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숨쉬는 것조차 힘든 듯 숨을 쉴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어릴 때 주인을 잃은 개로 집을 나온 후 몸집은 커가는데 목줄은 그대로 있어 서서히 숨통이 조여오자 제 깐엔 그것을 풀어보려고 몸부림쳤던 모양이다. 이제 목줄은 살 속 깊이 박혔고 목 둘레는 온통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어 차마 손을 댈 수조차 없을 만큼 참혹한 몰골이었다. 녀석은 점점 더 죄어오는 고삐의 질곡을 괴로워하다 그렇게 세상을 마쳤으리라.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홍길주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보이지 않는 그늘 아래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갔을 그 개를 생각했다.

2. 맛난 만남
삶을 바꾼 만남 - 정약용과 강진 시절 제자 황상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한번의 만남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인 황상(黃裳, 1788∼1863?)이다. 시골의 학구(學究)에 불과했던 그의 문집 『치원유도(梔園遺稿)』를 뒤적일 때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뭉클해진다.

황상은 열다섯 살 나던 1802년 10월 정약용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천주학쟁이로 몰려 강진으로 귀양 와 있었다.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겁이 나 문을 꽁꽁 닫아걸고 받아주려 하지 않아, 그는 하는 수 없이 동네 주막집 방 한 칸을 빌려 기식하고 있었다. 황상은 서울에서 온 훌륭한 선생님이 아전의 아이들 몇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주막집을 찾았다. 그렇게 며칠을 내쳐 찾아가 쭈뼛쭈뼛 엉거주춤 글을 배웠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지만 선생님! 저는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모자랍니다. 저도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잔뜩 주눅 든 소년에게 선생은 기를 북돋워준다. "그럼 할 수 있고말고. 항상 문제는 제가 민첩하다고 생각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단다. 한 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아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금세 잊고 말지. …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니?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 게다. 꼭 막혔다가 뻥 뚫리면 거칠 것이 없겠지.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니?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요,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란 글자를 결코 잊지 말도록 해라."

황상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평생에 두고 잊지 않았다. 스승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후에 다산의 형님 정약전(丁若銓)이 다산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황상은 나이가 이제 스물이 못되었는데, 월출산 아래서 이 같은 문장이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네. 어진 사람의 이로움이 어찌 이다지 넓단 말인가?"

다산은 강진에서 19년에 걸친 긴 귀양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1818년 8월 그믐날, 다산은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워 다신계(茶信契)를 결성했다. 그 후로도 제자들은 해마다 힘을 합쳐 차를 따서 서울에 계신 스승에게 부쳐드리곤 했다. 하지만 스승을 잃은 다산초당은 점차 황폐해져갔던 듯하다. 황상은 스승의 체취가 못 견디게 그리우면 문득 다산초당을 찾아 한참을 머물다 가곤 했다.

그러던 그가 다산이 강진을 떠난 18년 후 1836년 2월,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스승이 계시던 두릉 땅으로 다산을 찾아뵈었다. 스승 내외의 회혼례를 축하드리고, 살아 계실 때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뵙자는 생각이었다. 이때 다산은 병세가 위중해 잔치를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열다섯 소년이었던 제자는 쉰을 눈앞에 둔 중늙은이가 되어 죽음을 앞에 둔 스승께 절을 올렸다. 며칠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아뢰었을 때 다산은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그의 마디 굵은 손을 붙들고 작별을 아쉬워했다. 그냥 보내기 안타깝다며 접부채와 운서(韻書), 피리와 먹을 선물로 주었다. 스승과 제자가 헤어지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그저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그렇게 헤어진 뒤 며칠이 안 되어 다산은 세상을 떴다. 황상은 도중에 스승의 부고를 듣고, 그 길로 되돌아와 스승의 영전에 곡을 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45년 3월 15일 황상은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두릉을 찾았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은 10년 만에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황상을 보고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내려왔다. 황상은 이제 예순을 눈앞에 둔 늙은이였다. 꼬박 18일을 걸어와 스승의 묘 앞에 섰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부르튼 발을 보고 학연은 아버지 제자의 손을 붙들고 감격해 울었다. 그의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립고 제자의 두터운 뜻이 고마워, 늙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부채 위에 시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정씨와 황씨 두 집안 간에 계를 맺어, 이제로부터 자손 대대로 오늘의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할 것을 다짐했다. 그 옛날 더벅머리 소년에게 던져준, 오로지 부지런하면 된다던 스승의 따스한 가르침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돈 좀 꿔주게 - 박지원의 짧은 편지
옛사람들의 편지글을 볼 때마다, 과연 물질 문명의 발전이 삶의 질까지 향상시킬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지울 수 없다. 물질의 삶은 궁핍했으되, 정신의 삶은 보석처럼 빛났던 선인들의 자취를 그들이 남긴 짧은 편지를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척독(尺牘)은 지금으로 치면 엽서쯤에 해당하는 짤막한 편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박지원의 문집에는 수십 통의 척독이 긴 편지글인 서(書)와 구분하여 따로 실려 있다. 18세기에는 이 척독소품이 성행했다. 짧은 글 속에 두 사람만이 아는 암호를 감춰 마음을 주고받는 널찍한 통로를 만들었던 셈이다.

척독은 결코 시간이 없어 짧게 쓴 것이 아니다. 긴 편지를 쓰는 것 이상으로 애를 써서 작품성을 의식하고 제작된 글이다. 척독을 읽고 나면 정경이 떠오르고, 그림이 그려진다. 절제된 비유와 간결한 표현, 말할 듯 하지 않고 머금는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 척독은 산문보다 오히려 시에 가깝다.

진채(陳蔡) 땅에서 곤액이 심하니, 도를 행하노라 그런 것은 아닐세. 망령되이 누추한 길목에서 무슨 일로 즐거워하냐고 묻던 일에 견주어본다네.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 지 오래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이네.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줌이 어떠하신가?

「기초정(寄楚亭)」, 즉 박제가에게 보낸 박지원의 짧은 편지다. 언뜻 보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예전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진채 땅에서 7일 동안 밥을 지어 먹지 못하고 고생한 일이 있다. 그러니 진채 땅의 곤액이란 자기가 벌써 여러 날을 굶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안회(顔回)처럼 가난한 삶을 즐기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벼슬하지 않아 무릎 굽힐 일이 없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보니,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고 돈 좀 꿔달란 소리다. 궁한 소리를 꺼낸 김에 염치도 없이 빈 술병까지 딸려 보냈다. 이왕이면 술까지 가득 담아 보내달란 뜻이다. 그런데 막상 돈 꿔달라는 편지에 돈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원문으로는 고작 48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이다. 위 편지를 받고 박제가가 보낸 답장은 이렇다.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 됨을 부끄러워합니다. 공방(孔方) 2백을 편지 전하는 하인 편에 보냅니다. 호리병 속의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양주(楊州)의 학은 없는 법이지요.

그 역시 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공방이라고 했다. 공방은 구멍(孔)이 네모나다(方)는 뜻이다. 동전 속에 네모난 구멍이 있기에 이렇게 말했다. 직접 먹을 것을 싸들고 가서 뵈어야 하는데 그저 동전 2백 냥을 인편에 부쳐 미안하다고 했다. 호리병 속의 일이 없다 한 것은 술을 못 부친다는 말이다.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여러 날 빈속에 술을 마셔 좋은 것이 없겠기에 한 말이다. 양주학은 고사인데, 이것 저것 좋은 것을 한꺼번에 다 누린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양주학이 없다고 한 것은 밥과 술을 다는 못 보내니 그리 알라는 이야기다.

꿔달라는 사람이나 꿔주는 사람이나 피차 구김살이 없다. 평소 깊은 정을 나누지 않고 주고받을 수 있는 편지가 아니다. 평소의 깊은 정과 신뢰가 깔려 있다.

"문전에는 빚쟁이가 기러기 떼처럼 섰는데, 집안에는 취한 사람 고기 꿰미처럼 자고 있네." 이는 당나라 때의 대호걸이요 사내라 하겠습니다. 이제 저는 추운 집에서 홀로 지내니 담담하기 입정에 든 중과 같군요. 다만 문 앞에 기러기처럼 서 있는 자들은 두 눈빛이 가증스럽습니다. 매번 말을 비굴하게 할 때마다 도리어 등설의 대부를 떠올리곤 합니다.

「여성백(與成伯)」이다. 성백은 연암의 셋째 자형인 서중수(徐重修, 1734∼1812)다. 중국 유진체(劉津逮)의 시를 슬쩍 끌어다가 빚독촉에 몹시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금방 갚겠노라고, 한 번만 형편을 봐달라고 굽신거릴 때마다 등설의 대부를 떠올리곤 했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역시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무슨 뜻인가? 자신은 문밖의 빚쟁이들이 늘어서 있어도 아랑곳않고 술 취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던 곽량아처럼 호걸스럽지 못해, 대문 밖 빚쟁이들의 등쌀에 초연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미안하다고 연신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조그만 등설 땅의 대부를 생각한다는 말은 남의 밑에 들어가기보다는 부족하나마 스스로 자부하며 처음 뜻을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요컨대 몹시 궁하니 돈 좀 빌려달라는 편지다. 하지만 어디 하나 직접 돈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고도의 비유를 끌어와 궁상스런 뜻은 행간에 숨겼다.

 

박지원의 척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과 괴로움은 바로 박지원 특유의 톡 쏘는 풍자와 촌철살인의 해학에 있다. 박지원의 문집 속에는 50여 통의 이런 짤막한 편지가 실려 있다. 한 통 한 통 들춰볼 때마다 그네들의 삶의 속살이 훤히 들여다뵌다.

3. 일상 속의 깨달음
그림자놀이 - 이덕무와 정약용의 산문
가을날 오건(烏巾)을 쓰고 흰 겹옷을 입고 녹침필(綠沈筆)을 흔들면서 해어도(海魚圖)를 평하고 있었다. 문종이를 바른 창이 환해지더니, 흰 국화의 기우숙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묽은 먹을 묻혀 즐겁게 베껴 그리는데, 한 쌍의 큰 나비가 향기를 쫓아와서는 꽃 가운데 앉는다. 더듬이가 마치 구리줄같이 또렷하여 헤일 수가 있었으므로, 꽃 그림에 보태어 그렸다. 또 참새 한 마리가 가지를 잡고 매달리니 더욱 기이하였다. 참새로 놀라 달아날까봐 급히 베끼고는 쟁그렁 붓을 던지며 말하였다. "일을 잘 마쳤다. 나비를 얻었는데 참새를 또 얻었구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에 나오는 글이다. 밝고도 경쾌하다. 구름이 걷혔는지 햇살 한 자락이 문종이 위로 쏟아진다. 국화꽃이 창호지 위에 또렷한 그림자를 남긴다. 얼른 묽은 먹으로 창호지 위에 비친 국화꽃을 그렸다. 나비 한 쌍이 꽃잎 위에 앉는다. 마음이 급해진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지 마라, 속으로 열두 번도 더 되뇌이면서 붓질이 다급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이번엔 참새란 녀석이 나도 그려달라고 가지에 덜렁 매달린다.

한순간에 그린 크로키! 숨가쁘게 붓을 놓으니, 그 사이에 나비도 날아가고, 참새도 날아가버렸다. 잠시 후엔 국화꽃 그림자도 옮겨가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창호지 위에는 엷은 먹 자국만 또렷이 남았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 가도록 문종이 위에 머문 국화의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정약용도 그림자와 관련된 멋진 글을 남겼다. 많은 사람이 정약용을 『목민심서』를 지은 근엄한 사상가로만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그의 산문처럼 따뜻하고 정스럽고 인간적인 글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는 예술을 알고 아취(雅趣)를 즐길 줄 알았던 사람이다. 국화꽃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며 벗들간에 즐겁게 노니는 광경을 묘사한 『국영시서(菊影詩序)』를 보자.

하루는 남고(南皐) 윤이서(尹彛敍)에게 들렀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 자네가 우리 집에 자면서 나와 함께 국화를 보는 것이 어떻겠나?" 윤이서는, "국화가 비록 아름답다고는 하나 어찌 밤중에 볼 수가 있겠는가?"하고 하며 아프다고 사양하였다. 내가, "어쨌든 가보기나 하세."하며 억지로 청하여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었다. 짐짓 동자를 시켜 등잔을 잡고 꽃 한 송이에 바싹 갖다 대게 하고는 윤이서를 당겨서 이를 보게 하며 말했다. "기이하지 않은가?" 윤이서가 한참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자네의 말이 더 이상하군. 나는 아무리 봐도 기이한 줄 모르겠는걸." 내가 말했다. "자네 말이 옳아."

조금 있다가 동자를 시켜 법대로 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옷걸이와 책상 등 여러 가지 방안에 있던 산만한 물건들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하여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등잔도 꼭 알맞은 위치에 놓아두고서 불을 밝혔다.

그러자 기이한 무늬와 희한한 형상이 갑자기 벽에 차오는 것이었다.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엇갈려 있고 가지와 줄기가 또렷하여 가지런한 것이 마치 수묵화를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그 다음 조금 떨어진 것은 너울대고 어른대는 그림자가 춤추듯 하늘거리는 것이 마치 동산에 달이 떠올라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일렁이는 듯하였다. 먼 것은 흐릿하고 모호해서 마치 구름 노을이 엷게 깔린 것만 같고, 사라질 듯 여울지는 것은 파도가 넘쳐흐르는 듯해서, 황홀하고도 비슷한 것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윤이서가 즐거워 크게 소리 지르며 뛸 듯이 기뻐하다가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며 말했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천하의 뛰어난 광경일세그려." 한참을 그러다 흥분이 가라앉자 술을 내오게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서로 시를 지으면서 즐겼다. 이때 주신(舟臣) 이유수(李儒修), 무구(无咎) 윤지눌(尹持訥) 등도 또한 같이 모였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 처음부터 바로 제대로 된 그림자를 보여주었더라면 감동은 이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술부터 내와서 자리가 소란스러웠어도 안 될 말이다. 처음에 짐짓 허튼 수를 한 번 두어 상대의 김을 뺀 뒤,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게 해놓고는 느닷없이 정면 공격으로 일격에 무찔러버린다.

가을밤, 국화 화분 하나 앉혀놓고 깜깜한 방안에서 등잔에 불을 붙일 때, 그리하여 일순간 쏟아져나온 빛의 무리들이 만화경 같은 세상을 벽 위에 펼쳐 보일 때 건조하고 답답하던 삶은 문득 생기를 얻는다. 사는 일이 답답하기야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무에 있겠는가? 다만 그때 그네들이 지녔던 여유를 우리가 지니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폴 그셀이 엮은 『로댕어록』을 읽다가, 또 하나 인상 깊은 그림자놀이 장면을 접하였다. 로댕이 벌인 그림자놀이이다.

"당신은 여태까지 램프 불빛으로 고대의 조각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전혀 없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내가 틀림없이 당신에게 매우 유익한 실험을 한 가지 보여드릴테니."

로댕은 아틀리에 한 구석의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대리석 토르소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것은 '메티니의 비너스'의 작은 모조품이었는데 매우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로댕이 램프를 조각의 옆쪽에 바싹 가까이 가져가면서 복부를 일렁이는 불꽃으로 비추었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몹시 놀랐다. 이렇게 비춰진 불빛은 내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작은 요철(凹凸)을 대리석 위에 보여주었던 것이다.

"잘 보시오!" 그는 아주 조용히 그 비너스 상을 세워놓은 회전반을 돌렸다. 그것이 돌고 있는 동안 나는 복부의 전체적인 형태 속에 있는 수많은 미세한 기복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였다. 언뜻 볼 때는 단순하게만 보이던 것들이 사실은 비할 데 없이 복잡하였다.

"이렇게까지 세부를 관찰하게 될 줄은 뜻밖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시오. 자! 허벅지와 복부를 잇는 골짜기 부분의 이 무수한 기복을. 자, 보시오. 골반의 육감적인 요부를 모조리 맛보시오. 그리고 다음에는, 이쪽….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요부(凹部)를.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넘치는 열정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황홀하다는 듯 그 대리석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육체요!" 이렇게 말한 그는 활기 있게 덧붙였다. "키스와 애무 아래서 만들어졌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요." 갑자기 조각의 허리에 손바닥을 대고는 말했다. "이 동체에 닿으면 체온이 느껴질 정도예요."

고수(高手)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그들의 눈은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핵심을 찌른다. 국화 그림자를 연출하며 벗들과 가을밤을 보내던 정약용의 그림자놀이와, 비너스 상 둘레로 램프를 돌리면서 햇볕 아래서는 볼 수 없었던 조각상 위의 수많은 요철을 음미하던 로댕의 그림자놀이는 참 무던히 닮아 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는 양(洋)의 동서도 없고 때의 고금(古今)도 없다.

그저 주는 눈길에 사물은 결코 제 비밀을 열어보이지 않는다.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이는 나는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다. 워낙 환한 조명 속에 살다 보니 이제 우리는 좀체로 제 그림자조차 보기가 어렵다. 도시의 밝은 불빛 속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삶이 빚어내는 그늘이다. 그림자가 없는 삶에는 그늘이 없다. 녹슬 줄 모르는 스테인리스처럼, 언제나 웃고 있는 마케팅처럼, 0과 1 사이를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디지털처럼 그늘이 없다. 덧없는 시간 속에 덧없는 인생들이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덧없이 스러져간다. 도처에 바빠 죽겠다는 아우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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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것을 넘어 미쳐라


이태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장)

http://blog.daum.net/jjjeok-1 

 

직장생활을 하는 20,30대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말이 있다. “나도 일을 즐기며 미치도록 하고 싶지만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외침은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이 적성에 맞아야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일은 일일 뿐이다. 적성에 맞아도 즐길 수 있고 적성에 맞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게 일이다.


 또 20,30대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지 못하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역시 고정관념일 뿐이다. 성공은 일을 얼마나 즐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즐거워서 미칠 지경이면 성공은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인텔의 그로브 회장은 “편집광만이 살아남는 시대다”라고 했다.


 지금 하는 일에 미쳐 있는가? 베토벤은 음악에 미쳤고, 피카소는 그림에 미쳤다. 에디슨은 발명에 미쳤고, 아이아코카는 자동차에 미쳤다. 타이거 우즈는 골프에 미쳤고, 빌게이츠는 컴퓨터에 미쳤다.


 조선후기 지식인들도 광기로 가득했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의 비망록을 남긴 이덕무, 비둘기를 키워 연구서를 썼던 유득공, 서양 악기에 매혹된 홍대용, 그림에 미친 김홍도, 책에 미친 김득신, 벼루에 미쳤던 정철조, 시․서․화에 뛰어나고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 천문학과 역학 저술을 남긴 천재적 천문학자 김영, 목민심서를 남긴 정약용이 그들이다.


 또 열하일기와 허생전․양반전을 남긴 박지원, 문인이자 학자로 문체반정의 한 사례였던 김려와 이옥 등은 불온한 문체로 불온한 사상을 전파시켰다 하여 모두 과거합격이 취소되었다. 이들은 모두 한 분야에 미칠 정도의 광기로 천착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프로야구에서 3할대의 타율이면 팀의 간판선수이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반면 2할 대의 선수는 많은 연봉을 받기 힘들며, 2군으로 내려가든지 소속팀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3할대와 2할대의 타율은 큰 차이인가. 아니다. 안타 몇 개 차이가 3할과 2할로 갈라놓는 것이다. 몇 개의 안타 그것은 과감하게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회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은 축구에 미쳐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노력을 했다. 축구재능도 뛰어났다. 그러나 체격조건이 좋지 않아서 K-리그에서 조차 외면당했다. 그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히딩크를 만난 이후부터다. 히딩크는 박지성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자기경영에 철저했던 박지성 본인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성공이다.


 보통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성공은 과감하게 도전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따라서‘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무섭게 도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일에 미쳐야 한다. 인텔 미국 본사 입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only the paranoids survive.(미친 사람들만 살아남는다)"


 누구나 꿈을 갖고 살아간다. 그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것과 그 꿈을 꿈으로만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의 차이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가 아니다. 도전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의 차이다. 크건 작건 모든 새로운 시도에는 실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를 실천에 옮길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지금 간절히 원하는 꿈이 있다면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확 바뀐다.


    논어에‘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낙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즉,‘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즐기는 사람은 미친 사람을 당해 낼 수 없다.

그렇다. 미치지(狂) 않으면 못 미친다(及).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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