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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 동백아가씨 -

bthong 2007. 10. 14. 20:36
                                                             이미자 (李美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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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화려하지 않은 외모지만 노래만큼은 최고였다.

 

타고난 미성에 꾸밈없는 그녀의 애절한 창법은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로 추앙 받는 이미자에게는 엘레지의 여왕, 살아있는 트로트의 역사, 국민가수라는 찬사가 늘 따라다닌다.

대표 곡은 역시 ‘동백아가씨’. 최초로 100만장 음반판매시대를 연 영광스런 노래이건만 한동안 왜색(일본풍)가요로 금지의 낙인이 찍혀 깊은 좌절을 안겨준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40여 년 동안 500여장의 음반과 2,000 곡이 넘는 노래를 발표해 한국 최다음반, 최다 취입곡 가수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이미자는 우리 가요사상 최고의 여가수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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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는 서울 한남동에서 1941년 7월 22일 을지로 화원시장에서 일했던 부친 이점성씨와 모친 유상례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불화로 4살 때 생모와 이별하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60년대 당시 신문, 잡지에는 ‘6살 때부터 이미자는 서커스단에서 끼니를 굶어가며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99년 자신의 자전 에세이 ‘인생 나의 40년’에서 그녀는 그 기록이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했다. 한남초등학교를 다니다 10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녀의 집안은 1.4후퇴 때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겨울을 났다. 이곳에서 생전 처음 콩쿠르에 나가 특별상을 받았을 뿐이다. 이후 부산 피난 시절 그녀는 국제시장 앞 동아극장에서 인기가수 백난아의 공연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품었다. 국제시장의 노래 잘하는 아이 이미자는 주위의 소개로 미군부대 위문공연 무대에 올라 몇 개월 간 영어가사로 번안한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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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후 서울 계동으로 올라온 뒤 부친이 재혼을 해 다섯 명의 이복동생이 생겼다. 이미 6학년 나이가 된 그녀는 종로 YMCA자리에 선교단체가 천막을 치고 운영하던 학교와 청계천의 일성고등공민학교 중학교 과정을 거쳐 마포 문성여중고를 다녔다.  여고 시절 국전에 정물화를 출품하고 규율부 단장을 맡아 시가행진을 벌이는 등 활달한 학생이었다.

 

당시 송민도, 나애심의 노래와 슬픈 영화들을 특히 좋아했던 그녀는 “학교 생활은 재미 있었지만 졸업해 가수가 되는 것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각종 노래 대회에 몰래 참가해 상품으로 큰 그릇, 대야, 양푼들을 받아왔다.

2학년 말에 나간 KBS 라디오 노래자랑대회. 남산에 있던 KBS에 교복을 입고 갔다가 학생출전 불가라는 이유로 퇴짜를 맡자 다음날 새엄마 옷으로 갈아입고 출전을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때도 1등을 했다. 여고 졸업을 앞둔 58년 KBS보다 5년 먼저 개국한 최초의 민영TV 방송 HLKZ의 ‘예능 로터리’에도 출전해 최고상을 받았다. 입상을 계기로 화신백화점 카바레의 전속가수로 픽업됐고 이때 섹소폰 연주자 김경호로부터 악보를 보는 음악이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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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가수 남일해가 찾아와 KBS악단장인 작곡가 나화랑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화랑은 그녀에게 라디오 쇼프로 ‘노래의 꽃다발’출연을 주선하고 59년 데뷔 곡인 ‘열아홉 순정’을 SP음반과 LP음반을 내 정식가수의 길을 걷도록 했다.하지만 출연료가 싼 오프닝 가수로 서울보다는 지방 무대를 더 많이 돌아다녔다. 그때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선배들 양말을 빨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한번은 지방공연을 갔을 때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을 친 적도 있었다. 춥고 외로웠던 이 시기에 그녀는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정진흡씨를 만나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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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카라 극장 건너편 국제다방이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모나미다방은 무명가수들의 집합소. 이미자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몇몇 레코드회사를 기웃거리는 싸구려 가수였다. 그녀의 애절한 노래를 귀담아 두었던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이미자는 전속계약을 맺고 ‘동백아가씨’를 취입할 기회를 가졌다. 인기가수 최숙자 대신 그녀와 전속계약을 맺은 이유는 값싼 개런티 때문. 미도파레코드에서 독립해 모나미다방 뒤에 문을 연 지구레코드는 보따리 장수 수준의 신생 회사였다.

 

64년 여름, 선풍기 한 대가 전부인 지구 레코드 녹음실. 임신 8개월 만삭의 무거운 몸으로 이미자는 찜통 더위와 싸워가며 녹음을 마쳤다.  당시는 최희준, 한명숙, 현미등 미8군 가수들의 전성시대. 7월에 ‘동백아가씨’ OST음반을 발매한 지구레코드는 인기 배우 최무룡의 ‘단둘이 가봤으면’을 타이틀곡으로 정했다.

 

하지만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가 온 나라를 울음바다로 몰아넣으며 흥행에 성공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타이틀 곡 은 뒷전이고 뒷면에 수록된 이미자의 노래 ‘동백아가씨’만 연신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음반을 사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전국의 음반업자들이 음반을 구하기 위해 아우성을 치자 언론들은 ‘가요계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라고 흥분했다. 그렇게 무려 100만장의 음반이 팔려나간 ‘동백아가씨’는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무명가수 이미자는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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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주들은 2,000원이던 극장 출연료의 20배가 넘는 5만원에라도 이미자를 모셔가기 위해 사활을 건 출혈 경쟁을 벌였다. 연주비 조차 없어 박시춘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했던 신생레코드사 지구도 메이저급 회사로 동반 상승했다. '동백 아가씨'에는 취입 때부터 갖가지 사연이 만발했다. 미도파레코드에서 독립한 지구의 임정수 사장은 생소한 지구보다는 중견회사인 미도파레코드 이름으로 음반을 슬쩍 발매했다. 그런데 음반이 공전의 히트를 터뜨리자 미도파 측에서 회사 이름 도용 문제를 거론하며 소송을 걸어와 곤혹을 치렀다. 미도파와 지구 두 회사의 같은 '동백아가씨'음반이 존재하는 것은 이 같이 복잡한 사연 때문. 1964년 겨울, 대학생들이 주고객 층인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과 서린 동경 음악실. 트롯을 천시했던 이곳의 젊은 멋쟁이들조차 '동백아가씨'를 합창으로 따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후 이미자는 '울어라 열풍아'등 후속 발표 곡마다 인기 퍼레이드를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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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가수로 떠오르자 성남극장, 우미관, 노벨극장, 금호극장등 하루에 극장 네 곳을 매일 한바퀴 도는 바쁜 몸이 되었다. 64년 9월 첫 딸 재은을 낳은 이미자는 1년 사이에 아담한 집과 전화, TV, 자동차를 한꺼번에 마련할 만큼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사는 즐거움과 일하는 보람을 느꼈던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65년 말 '동백아가씨'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고 66년 '섬마을 선생님'도 뒤를 이어 판매 금지 당했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혼까지 하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 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금지 처분을 받은 '동백아가씨'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 대중 음악에 대한 군사 정권의 이중 잣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금지곡 가수이면서 정상의 가수였던 그녀는 월남 파병 부대 위문 공연단에 1순위로 뽑혀 다섯 차례나 파월 장병들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이때의 공로로 73년 방한한 티우 대통령으로부터 베트남 최고훈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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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이미자의 소문을 들은 일본 빅터레코드사는 음반 취입을 제의를 해왔다. 현해탄을 건너가 '동백아가씨'와 현지에서 받은 곡을 일본 노래로 취입했다. '동백아가씨'는 '사랑의 빨강 등불'로 일본 정서에 맞도록 제목과 가사 내용이 변경되고 이미자는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소개되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이후 반일 감정이 악화된 시절. 이 사건은 반일 감정에 거센 기름을 붓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미자를 즉시 송환시켜라', '왜색 노래가 이제야 제 나라 찾아 갔다'는 극단적 반응이 불거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통을 받았다. 대중 음악은 한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정서와 밀접하게 연관돼 사회를 반영함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이미자는 대중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시대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촉망받는 작곡가 박춘석이 자청해 전속사를 옮겨 오면서 더욱 가속이 붙은 이미자는 66년도엔 '흑산도 아가씨'등으로 가요계를 석권하고 67년에는 최고의 히트곡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는 절정기를 구가했다.  68년에는 재일교포 위문차 두 번째로 일본 공연 길에 올라 후지 TV에 출연했다. 상복도 유난히 많았다. 64년부터 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 중 3번은 가수왕에 등극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가 받지 못한 가요계의 상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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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은 끔찍했던 한 해. 빅 히트곡 '기러기 아빠'가 또다시 방송금지 되었을 뿐 아니라 6월에는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앞길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연말에 취입곡이 1,000곡을 넘어선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혼 이후 크고 작은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그녀는 KBS PD 김창수씨와 재혼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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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8월 '동백아가씨', '유달산아 말해다오' 등 5곡이 한꺼번에 금지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생기를 되찾은 이미자는 89년 10월 순수 예술계의 반발을 딛고 최초로 세종문화회관무대에서 30주년 기념공연을 여는 쾌거를 이뤄냈다.

91년엔 SBS 라디읏【?'이미자의 가요 앨범'을 맡아 DJ로 변신을 하기도 했다.

95년엔 제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문화훈장을 받고 97년에는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히트곡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까지 세워졌다. 99년엔 노래인생 40년을 총 정리하는 기념 앨범과 자전 에세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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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평양 특별공연'을 남북 동시 생중계로 방영해 민족 모두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노래들은 역경의 삶에서 나오는 애절함과 꾸미지 않는 순수함으로 남북을 불문하고 한민족의 가슴을 울려왔다. 흔히 이미자는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감정 표현이 직설적인 성격, 사생활 공개를 꺼려 인터뷰하기 힘든 가수로 유명하다. 하지만 가요계의 대모로 44여 년 동안 국민 가수로 칭송 받는 이유는 '당일 날 곡을 받아 가사를 외우고 취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라는 작곡가 고봉산의 극찬처럼 실력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 가요의 산 증인 이미자는 '전통 가요'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으로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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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음악/毛頭梨憩.  사진/okd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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