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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bthong 2012. 7. 10. 10:41

친구


 사람이 平生을 살면서 “친구”란 말처럼 많이 쓰고 親近한 말도 잘 없을 것이다. 초. 중. 고등학교 친구, 동네친구, 꼬치친구, 불알친구, 죽고 못 사는 친구, 군대친구, 대학친구, 술친구, 개 같은 친구, 교도소 친구, 못 쓸 친구, 실제로 개(犬)도 친구가 있는 등... 나열을 하자면 끝이 없고 그 多樣性도 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넓게 보면 친구가 없는 이는 없다. 아무리 惡人도 싸이코도 바보도 무식꾼도 왕따도 서로 통하고 내밀한 자기들끼리는 통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넓은 의미의 친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관계가 “絶對的”인 것이 아니고 개인적이며 “相對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아는 우리조직의 한분은 나의 ‘관찰대상’이다. 그는 성격이 특이해서 친한 친구가 거의 없다. <거의>란 99.7%정도의 순도를 나타낸다. 성격이 아니 個性(Personality)이 유별나게 강하고 음성이 독특하게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옆에 가기를 꺼리는 편이고 망설인다. 그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자기자랑, 자기 친형제 욕하기, 남 아픈 곳을 후벼 파기, 남의 말 가로채기, 하루 종일 불평불만 늘어놓기, 한 불평반복하기, 남 무안 주기, 남의장점 까 내리기 등등이니 몇 번 상대를 해 본 사람들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고 멀어져간다.


 나는 그 사람의 行態가 어떻게 변하는 가를 유심히 관찰 중인데 나이가 들고 세상살이가 본인의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인지 요즘은 좋은 쪽으로 많이 변했다. 성격이 그러니 자동적으로 친구가 많이 없고 그 분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늘 흉을 보고 욕을 한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러한 독특한 사람에게도 친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만나면 죽고 못 살고 자기들끼리는 늘 웃으며 잘 지낸다. 서로 선물이나 농사지은 것을 주기도 한다. 이것은 친구란 人間關係는 일대 일이고 個人的이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친구란 말이 오래 전부터 넓게 使用되어 왔다는 것은 故事成語, 四字成語 에서도 알 수 있다. 管鮑之交, 高山流水, 刎頸之交, 刎頸之友 水魚之交, 水魚, 水魚之親, 水魚之交, 魚水親, 魚水之親, 金蘭之交, 金蘭契, 金蘭交, 金蘭之誼, 淡水之交, 淡交, 芝蘭之交, 斷金之交, 斷金之契, 斷金之交, 膠漆之交(교칠지교), 膠漆之心(교칠지심), 莫逆之友, 知己之友, 知己, 心友, 知音, 知音人, 市道之交 등등 이렇게 많은 故事成語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친구는 우리 生活에서 중요했고 큰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人間이 인간되게 하는 根本要素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사귐에 있다. 만일 사람들의 生活에서 친구와의 접촉. 交際. 人格的인 사귐과 交流를 완전히 除去해 버린다면 그 결과는 비참 할 것이다. 인간들의 생활이란 돌과 모래, 돌과 돌, 바위와 돌이 부디 치는 것과 같아서 아무 交感도 없는 황량한 사막과 같을 것이다. 또 다시 만날 조건이 없으므로 無意味한 공전만을 계속 할 것이다. 거기에는 學問, 思想, 文化는 물론 道德, 宗敎, 藝術, 기타 인간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맺어질 리가 없다. 모든 것은 無機的인 사실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友情이란 무엇인가? 본능적 접촉과 사귐인가?, 아니면 精神的 目的과 기능에서 주어진 것인가? 친구간의 우정은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 본능적인 면에서 精神的인 쪽으로 이동해가는 사귐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정은 언제나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그리고 우정이 친구 간에 오래 지속되고 유지하려면 단순한 정만으로는 不可能하다. 어떤 정신적인 理念, 생활의 공통된 뜻이 있을 때에만 친구로서 關係가 지속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허물이 없고 가까이 있는 친구들은 중. 고등학교 때의 벗들이다. 왜냐하면 친히 사귀어온 정이통해 있기 때문이고 감수성이 가장 왕성 할 때에 사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社會에 나가서 가장오래 尊敬과 뜻을 함께하는 이는 大學 때 벗이 된다. 뜻과 理念이 같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친구 간에 友情이란 인위적인 目的 없이 시작되며 계획 없이 자연적으로 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학교, 한 직장, 같은 마을에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우연한 조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사귐을 계속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공통성, 같은 생활태도를 발견하게 되면 얽히고 설혀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튼튼한 우정을 만들고 친구가 된다.


 진정한 친구가 없이 出世한 사람이 없으며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사는 人間이 社會나 어떤 組織에서 아낌과 尊敬을 받을 수 없다. 또 우리는 많은 사람의 尊敬보다도 한두 사람의 참된 友情이 얼마나 귀한가를 느끼게 되리라고 본다. 친구가 없는 사람, 친구에게 배신당하거나 좋은 친구를 얻는데 실패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처량한 사람이다. 그러한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더욱 비참한 사람이다.


 친구간의 우정을 위하여 제일 중요한 일은 信義와 義理를 지키는 것이다. 朋友有信은 오륜으로 人間의 기본적인 도리이다. 신의를 팽개치고 진정한 친구, 우정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친구를 속이고 배반하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고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켜서 무덤을 파는 것이다. 혼자서도 잘 살고 너 없어도 문제없다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禽獸같은 생각일 뿐이라고 본다. 디오게네스 같은 철학자라면 또 모르지만...


 친구의 또 하나의 조건은 겸손과 協調하는 마음이다. 세상에 누구도 驕慢하고 자기만을 아는 친구를 원하겠는가? 지위, 세력, 명예, 부귀, 무슨 조건 등의 가림이 없고 소박하고 단순한 정이통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를 찿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自己本位의 驕慢한 사람은 자연히 친구에서 멀어질 것이다. 겸손과 협조하려는 뜻만 가지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친구 간에 좋은 우정을 지니게 될 수 있다.


 또한 이해와 예절이 중요시된다. 사람은 모두가 하는 일이 다르고 個性이 다르고 얼굴 모양도 다르다. 그러므로 친구의 개성이나 長點을 이해하여 준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친구의 人生觀이나 個性을 자기의 것과 일치시키려 한다든지 强要하는 것 등은 친구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이해하여 가는 동안에 서로가 惡을 버리고 善을 택하게 되며 상대방의 長點을 키워주면서 자신도 內面的으로 성장하게 된다. 우리는 친구 간에는 친하니 禮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부간, 부모 형제간에도 예절이 있듯이 친구 간에도 禮節과 尊敬하는 마음은 필요하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에 우정이 오래 지속 될 수 있고 성숙된 친구이다. 우리는 예절을 결해서 우정이 파탄 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친구란 人格의 結合이지 소유나 부수적인 屬性의 결합이 아니다.


 하나 더 첨가 한다면 참다운 친구. 우정은 서로의 “관심”이다. 이때에 關心이란 말은 ‘무관심’과 ‘단절’의 반대어이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관심이 없어지고 장기간의 단절은 우정이 식어지고 차츰 멀어지고 변한다. 안 보면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속담은 지금도 진리이다.


 친구 중에 어떤 친구는 어린 시절, 學窓時節에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都市生活, 職場, 環境의 차이, 자주 만나지 못함, 세월의 경과 등이 겹치고 모진 세상살이가 그 위를 강타면서 변하고 변해서 어떤 機會에 만나보면 완전히 옛날과는 다른 왕자병. 공주병 患者가 되어 있는 경우를 접하게 되거나, 아니면 이상한 곳에 深醉해서 되지도 않는 辨說을 내 뱉을 때에는 황당하고 어이없다. 아니면 쇠나 좀 벌고 직책이나 좀 올라갔다고 목에는 기브스하고, 뒷짐 짚고 배를 쑥 내밀면서 “내가 말씀이야..., 내가 말씀이야...”를 계속 외면 이 또한 골치 아프고 서글픈 경우다. 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처사는 돈을 아주 심하게 많이 벌거나 職位가 좀 크게 오른 경우인데 이럴 때는 電話番號, 住所 등을 아주 싹 바꾸고 앞면 몰수 오리발 내미는 경우인데 이런 부류들은 아마 속으로 <야! 너도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식으로 세상을 사는 부류이라고 보고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두는 게 上策이다. 상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더 웃기는 일은 잘나가던 옛날에는 그렇게 당당하던 인사들이 벼슬이 떨어지거나 失業者가 된 후에 만나면 “나야, 나”를 외치며 나긋나긋하게 나오는 것인데, 거기다가 健康까지 가고나면 얼굴이 누르끼리 하게 떠서 모양세가 정말 가관인데 이것은 最惡의 경우다. 또 소식 끊고 너희들과는 별 볼일 없다는 형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는 야 나도 너와는 “해(日) 볼 일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되니 걱정 할 것 추호도 없다.


 여자도 이성이 상대가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命題는 좀 난해하나 될 수 있다고 보다. 특히 文友, 독서친구, 등산친구 등에서 여성을 친구로 사귀면 섬세하고 感性的이라서 서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은행에 근무하는 사람은 돈이 ‘종이’로 보여야하고 한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자직원은 그냥 “직장동료”로만 보아야한다. 거기서 만약 ‘돈’으로 보이거나 ‘여자’로 보이면 사고치고 망신살(煞) 드는 것 아니겠는가? 여자도 친구로 하려면 끝까지 친구라야지 변하면 망조가 올 것이다. 그래서 개망신당하고 웃음거리 된 사례를 많이 보았지 않는가? <論語> 학이 편에도 人生三樂 중에 친구 얘기가 나오지만 孔子같은 聖人이 친구를 論하는 것을 보아도 친구는 중요한 것이다. 특히 나이 들어서 좋은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인가? 우리 모두 좋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投資하자. 獨不將軍처럼 혼자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말자. 나중에 땅속에 들어가면 혼자 있을 기회는 충분하고 지겹도록 차고 넘칠 테니까. 오늘도 친구들께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그들에게 건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