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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일곱명의 여인들 Art lab / Everything's lab

bthong 2016. 3. 2. 09:35






피카소의 일곱명의 여인들  



"피카소에게 여자들이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며,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_올리비에 비드마이어 피카소

 

"영원히 욕망하고, 세비야의 위대한 사기꾼 돈 후안처럼 정복한 것에는 영원히 싫증을 냈음에도 

피카소는 언제나 한 여자에게만 복종했으며, 오직 그의 작품을 통해서만

그녀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했다."

_브라사이

 

 피카소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짐 없이 그가 사랑했던 7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는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시대

 관계의 시기

 

 결혼

 자녀

 그림 속 모습

 

 청색시대

 

 

 

 

 

 

 장밋빛시대

 1904-1912

 페르낭드

 올리비에

 

 

 

 

 큐비즘

 1912-1915

 에바 구엘

 

 

 

 

 신고전주의

 1917-1927

 올가

 코크로바

    O

 파울로

 

 

 초현실주의

 1927-1937

 마리 테레즈

 

 마야

 '꿈꾸는 여인'

 1977년 자살

 게르니카

 1936-1943

 도라 마르

 

 

 '우는 여인'

 

 

 1943-1953

 프랑스와즈

 질로

 

 클로드

 /팔로마

 '꽃 여인'

 

 도자기 예술

/고전 재해석

 

 자클린 로크

    O

 

 

 1986년 자살

 

 

 

 1. 페르낭드 올리비에 (Fernande Olivier)

 

 

Study for "Tete de femme"(1909)

 

                                    Boy and Pipe 1905 (2004년 그림 최고가 1억 4백만 달러 기록 )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그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동갑내기 20세였으며,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친구였던 화가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충격을 받아 푸른 계통의 어두운 그림(청색시대)만 그리던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그림 스타일을 바꾼다. 

화려한 입체파풍의 작업을 많이 했고, 밝은 복숭아 색으로 어릿광대와 곡예사(장미 시대)를 주로 그렸다. 

첫사랑  페르낭드 올리비에와는 8년간의 동거 끝에 헤어진다. 
 올리비에는 회고록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 Picasso et ses amis>에서 피카소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그를 모른다면 피카소는 그리 특별나게 유혹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수상쩍게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집중이 되긴 했다. 

여러분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에게서 감지하는 이러한 열정,

내면의 불꽃은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석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어 하자,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어졌다."


 

 1904년 어느 날 쏟아지는 비를 피해 피카소가 고양이를 안고 뛰어든 낡은 건물의 복도에서 마주친 여자. 그녀가 바로 23살의 이혼녀 페르낭드였습니다. 피카소는 단숨에 그녀에게 빠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동거를 시작했고 사랑에 빠진 피카소는 우울한 청색 시대(1901-1904)와 작별하고

장밋빛 시대(1904-1906)을 맞이하게 됩니다.



 

 

 2. 에바 구엘 (Eva Gouel)

 

 

나는 에바를 사랑해 J'aime Eva

     Femme assise dans un fauteuil (Eva)  1913 

 피카소의 친구인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 이 시기는 ‘분석적 큐비즘’을 넘어 ‘종합적 큐비즘’이 무르익는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나는 에바를 사랑해(1912)> 등이 있다. 몸이 선천적으로 약한 에바는 피카소와의 3년간의 생활에서 그녀는 결국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두번째 연인은 1912년 만난 에바입니다. 그들은 남 프랑스로 내려가 은밀한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가냘프고 청순한 미모를 지닌 에바 곁에서 피카소는 그림마다 '나는 에바를 사랑한다'는 문구를 서명으로 남깁니다. 그림 속 에바는 맥박과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붓 터치가 강렬합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자유 분방함과 넘치는 열정을 감당하기에 에바는 너무 허약했습니다.

에바가 아프자 피카소는 다른 여자들을 탐닉했고 결국 1916년 겨울, 결핵으로 앓던 에바는 세상을 떠납니다.

에바와 사랑하던 때가 피카소에게는 분석적 큐비즘(입체주의)를 넘어서 종합적으로 큐비즘으로 나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3. 올가 코클로바 (Olga Kokhlova)

 

  

Olga au chapeau a plume(1920)

Olga Kokhlova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 1917년 러시아 발레단 공연 무대장식을 맡은 피카소는

우아하고 고전미 넘치는 코클로바에게 끌렸다. 

1년 연애 끝에 이듬해 결혼했고, 그때부터 ‘고전주의’ 그림을 그렸다. 

상류 사회 '사실주의' 화풍으로 바뀌어 시기에 피카소는 그의 동료들로부터 큐비즘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첫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파울로


 

Paul dessinant(1923)

파울로 

 

 그는 파울로를 그린 많은 회화와 소묘를 통해 아들의 성장을 추적하며 생생한 관심을 표했으나, 

형적인 가정생활을 보여주는 가족 그림은 무시했다. 

파울로는 당나귀를 타고, 아를레키노, 피에로 또는 투우사 등으로 분장하여 그림에 등장했다.

 

피카소는 나이 40이 되어서야 첫 아들을 얻었습니다.

피카소의 여인 중 가장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질투도 심했다는 피카소의 세번째 여인은 러시아 여인 올가입니다.


 

 

퍼레이드란 공연에서 무대 미술과 의상을 맡은 피카소는 퍼레이드의 희곡을 쓴 장 콕도의 소개로 마리스키의 발레리나였던 올가를 만납니다. 당시 올가는 남편이 있었지만 피카소의 구애를 받아들였고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피카소는 올가와 결혼 후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을 했는데, 이 기간동안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이 담긴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올가가  낳은 아들은 '파울로'였고 피카소는 '파울로'를 모델로 여러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올가는 피카소의 모델을 하면서 자기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 달라고 합니다. 올가로 인해 피카소의 그림은 잠시 고전주의로 회귀했으며, 그는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큐비즘을 배반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어야했죠. 역시 올가를 버린 피카소, 올가는 그의 애정을 잃은 후, 정신 이상엘 빠졌고 반신불수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여인들의 영혼이 창작의 양식이 되어 예술적 영감을 받는다는 피카소.

그는 1920년을 전후하여 초 현실주의 그림들을 주로 그렸는데 그러한 미술 사조에 함몰되지 않고 여러 이미지가 중첩되는 특징있는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마리 테레즈 초상'은 그런 그림의 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4.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 Therese Walter)

   

  

꿈 (마리테레즈)

 

 피카소는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17세의 어여쁜 소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팔등신의 이 늘씬한 소녀에게 홀려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델이 돼달라고 부탁하고, 

그녀는 이후 10년간 피카소의 연인이자 최고의 모델이 된다. 

부인 코클로바가 이혼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피카소는 발터와 오랫동안 몰래 사랑을 나눠야 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아름다움(18셀 연하)를 지녔다고 한다. 

그녀의 얼굴과 몸, 그리고 그의 사랑은 소묘에는 아름답게 구부러진 선으로, 

조각에는 풍만한 모양으로 나타나도록 피카소에게 영감을 주었다. 

<볼라르 판화집 Vollard Suite>에 수록된 동판화에 끊임없이 등장했으며, 

새롭게 등장한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표현에도 생동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피카소가 1927년(46세)에 만난 그녀는 '초현실주의'영향을 받았던 시기에 만났다.
 마리는 주로 그의 작품에서 ‘잠자는 여인’이나 ‘꿈꾸는 여인’으로 표현됐으며, 

주로 화려한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1935년 딸 마야를 낳았으나 피카소는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같은 시기에 부인 코클로바와도 이혼한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그녀, 마야와 연락하며 지냈다.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지 4년이 지난 1977년 그녀는 자살했다.

 

 

마야

Maya a la poupee(1938)

 

피카소가 네번째로 만난 여인 마리 테리즈는 여인이라기 보다는 어린 소녀였습니다. 마리 테리즈는 17세의 희랍풍의 금발 미인으로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 미인이었죠. 그녀는 피카소의 여인 중 가장 어린 나이였고

그 당시 피카소는 46살이었습니다.

 

 

Dream (Marie Therese) 1937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가 18살이 될 떄까지 기다려 올가가 사는 집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마리 테레즈의 집을 마련합니다. 피카소는 그녀에 대한 성적 환상을 주제로 조각, 그림, 판화를 제작했습니ㅏ. 하지만 아직 올가는 피카소의 아내였습니다. 피카소는 낭비벽이 심하다며 올가를 멀리했고 결국 1928년 그녀와 이혼을 합니다. 피카소와 동거하던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를 만난지 8년이 지나 첫 딸을 낳았습니다.

 

 

 

 

 5. 도라 마르 (Dora Maar)

 

 

 

 

  

Dora Maar(1938) 

 

   

                  앉아 있는 도라 마르                                우는 여인 (도라 마르)

                                                   

 

 1936년 피카소는 친하게 지내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로부터

사진작가 도라 마르(본명 마르코비츠 앙리에뜨)를 소개 받는다. 

피카소의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로 몇시간 그와 예술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이었다. 

1936년(55세)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다.

그녀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했으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우울한 2차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마르는

피카소 작품에서 주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도라 마르는 우울증 때문에 심리 치료를 받아야만 했는데, 피카소의 친구이자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오랫동안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피카소의 곁에는 여인 도라 마르가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광기와 싸우던 무렵인 1936년, 피카소는 생애 다섯번째 연인인 도라 마르를 만납니다. 도라는 지적이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로 마리 테레즈와는 정 반대였고, 피카소는 그런 그녀에게 빠져들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피카소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들 속에서는 두개의 얼굴, 두개의 존재가 서로 대치되거나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을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의 이미지가 겹쳐졌기 때문이었죠. 그런 가운데 피카소는 도라의 보살핌을 받아가면서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대표작 '게르니카'를 완성합니다.

 

 

 

 6. 프랑스와즈 질로 (Francoise Gilot)


1941년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피카소는 그의 여섯번째 연인 프랑스와즈 질로를 만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프랑스와즈는 21살의 아가씨였죠.

그녀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은 그녀는 피카소의 여자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 피카소를 떠났습니다.

 

  


   

   

로베르트 카파 촬영(1948)

 

 

 Femme dans un fauteuil(1946)              

                                                   

 

여자-꽃 (프랑스와즈)

 

 법대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던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는 1943년에 파리에 있는 르 카탈랑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났다. 

그 때 그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였고, 그 중에는 당시 연인이었던 도라 마르도 있었다.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는 동안 피카소는 가족, 삶의 기쁨, 평화 등을 주제로 작업을 했으며, 

주로 ‘꽃여인’으로 그려졌다. 

피카소는 파리에 있는 마리 테레즈와 마야를 만나러 며칠간 프랑수와즈의 곁을 떠나기도 했다. 

전형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피카소와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를 먼저 떠나버린 유일한 여자.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는데까지는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피카소와 헤어진 후 ‘피카소와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 그와의 10년 동거생활을 이야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다.

 훗날 프랑스아즈는 당시를 솔직하게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이렇게 올가,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와 관계가 계속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피카소와 나의 삶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나는 그들이 피카소의 '푸른 수염 콤플렉스'의 표현이며, 그것이 또 자신이 수집한 이 모든 여자들을 개인 소유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하고자 하는 피카소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그녀들의 머리를 완전히 베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삶이 계속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한 때 그와 함께 살았던 여자들은 나약하게 기쁨과 고통의 소리를 질러댔고, 부서진 인형들처럼 발작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에게 여전히 생명의 숨결이 이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생명은 피카소의 손이 잡고 있는 끈에 매달려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희극적인, 또는 비극적인 허영을 보탰고 피카소는 그것을 이용했다."

 

 

클로드 / 팔로마

 

아들과 딸_에드와드 쿠인 촬영(1953)

  

 

Claude en costume polonais(1948)

Portrait de Paloma(1952)

 

 

7.  자클린 로크 (Jacqueline Roque)

 

 

일곱번째 이자 마지막 연인은 자클린 로크입니다. 프랑스와즈와의 이별 후, 고독에 몸부린 치던 피카소는 1961년 이혼녀 자클린 로크와 결혼합니다. 피카소보다 40살 연하인 그녀는 매우 헌신적인 동반자여서 피카소는 말년에 최고의 명성을 누리며 작품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1973년 피카소는 '진실은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검은 커튼을 내린 채 한번도 걷지 않았던 자클린은 1985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리 테레즈도 피카소가 죽고 나서 3년 후 그의 곁으로 가겠다며 목을 매 자살했고, 도라 마르 역시 정신 착란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투우를 지켜보는 피카소와 자클린(1960)

 

Femme a la fraise et au chapeau(1963) 

 

 

꽃과 함께 있는 자클린(1954)

베개를 베고 누워있는 여인(1569)

  

  피카소의 말기 작품들은 외재적으로나 내재적으로 성애가 두드러진다. 

이 때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마지막 여자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가 72세 되던 해 만난 여인이다.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이혼녀로, 피카소와 8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 

자클린은 요리를 잘하고 가사일도 잘 돌보았으며 피카소와 에스파냐어로

예술가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또한 피카소를 돌보며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는 매력적인 안주인 역할을 했다. 

자클린은 피카소보다 13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동안 사심 없이 피카소의 복잡한 재산 문제들을 처리했다.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열흘 앞두고 그녀는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