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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을 성관계로 시작하는 소설이 또 있을까?

bthong 2014. 5. 1. 05:33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도깨비불'의 알랭

첫 장면을 성관계로 시작하는 소설이 또 있을까. 그것도 민망한 실패로 끝나는….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심한 알랭, 형편없었어요.” 그리고 또 이렇게. “그러니 키스나 해주세요.” 키스나 해줄 수밖에 없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

키스나 하세요… 정력도 안되면서

알랭. 돈을 사랑하므로 (돈 많은) 여자를 사랑하려는 남자다. 그에게 여자란 돈. 그렇다고 ‘한탕’을 원하지는 않는다. 알랭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방탕하게 살 수 있게 해줄 그런 여자를 원한다. 방탕이란 무엇인가. 일을 하지 않고도 쓸 돈이 넘쳐나고, 그 돈을 쓰는 게 유일한 ‘일’인 삶의 방식이다.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의 도깨비불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의 도깨비불
다 좋다. 세상에는 미모로 남자를 얻고, 그 남자와 결혼하기 전에 사랑에 빠질 만큼 영리한 여자들도 있으니까. 남자는 슬프다. 미모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그들에게는 정력이 필요하다. 비극적이게도, 우리의 알랭에게는 정력이 부족하다. 그도 알고 있다. “내게는 성적 매력이 전혀 없어.”
그는 이렇게 말하는 남자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보니 당신은 부자임에 틀림없군요!”라고.

그렇다면 알랭은 왜 돈을 원하는가? 귀족이 아니면서 귀족처럼 살기 위해서다. 알랭은 이렇게 묻는다. “왜 우리 사회를 공허한 분주함으로 가득 채우는 십중팔구 불필요한 일, 그 지겨운 노동에 속박되어야 하는가?” 맞다.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고 산다. 불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지겹기도 한 일들을.

왜? 돈을 벌어야 돈을 쓸 수 있으므로. 돈을 벌지 않기로 했다면 안 쓰거나 덜 쓰기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시민의 윤리다. 그러니까, 알랭은 소시민으로 살지 않기로 한 남자인 것이다. 문제는 그의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데 있다. 유일한 재산인 몸으로 여자의 돈을 원하나 그마저도 무능한 이 남자. 이게 이 남자를 문제적 캐릭터로 만든다. 퇴폐주의자이지만 관능에 무지한 남자라니. 대포 쏘는 법을 모르는 포병 같은 셈이다. 대단한 비극 아닌가.

이런 남자 대포를 못쏘는 포병 신세 아닌가?

누가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 미국 여자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다. “미국 여자처럼 건전하고 강인한 여자라면 이 모든 것을 잊게 해줄 거요.” 알랭이 머물고 있는 요양소 주인의 말이다. 미국 여자에 대한 환상은 이들의 것만은 아니었다. 구대륙의 퇴폐주의에 절망한 프랑스 남자 예술가들에게 ‘미국 여자’란 일종의 신화였다고 하니까.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그는 소설 시작을 성관계로 시작하는 대범한 터치를 보인다.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그는 소설 시작을 성관계로 시작하는 대범한 터치를 보인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는 이 남자들의 여신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미국 여자가 나온다. 엘렌 올렌스카 백작부인.(유럽을 홀리고 돌아온 미국여자로 등장한다.) 알랭에게도 이런 여자들로부터 구원받을 뻔한 적이 있기는 했었다. “그의 모든 약점을 보완해줄 아름답고 착하고 돈 많은 여자”인 도로시와 “도로시보다는 부자였지만 그렇다고 백만장자는 아닌” 미국 여자 리디아. 리디아가 백만장자였다면 알랭은 도로시보다 그녀를 사랑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사랑이란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하는 것이라는 데 있었을 것이다.

미국 여자만이 모든 걸 해결해줄 구세주로 생각

“내가 그것 말고 다른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알랭이 마약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이유다. 그는 여자와 (그러므로) 돈을 얻는 데 모두 실패했다. 하긴 그렇다. 이 관능에 취약한 퇴폐주의자는 깨닫는다. 자신이 유일하게 무능하지 않을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그것은 죽음. “내 눈앞에 당신이 이렇게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 있는데 만질 수 없어요. 그래서 죽음을 만져보려고 해요. 죽음은 내가 만져도 가만히 있을 것 같거든요.” 돈 많고 아름다운 또 다른 여자에게 알랭이 하는 말이다.

정말 그랬다. 알랭은 권총을 만졌고, 권총이 그의 죽음을 만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나니까. 이 결말을 알린다고 해서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줄어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의 묘미는 작가가 알랭을 끊임없이 냉소하는 데 있으므로. “그것으로 자기 삶이 추해 보이는 것이 좋았다.”라니. 눈치 챘겠지만, 알랭은 작가 자신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실패한 자신의 삶에 보내는 조롱이기도 한 것이다. 생은 망해도 그로부터 나온 글은 아름답다는 것, 영원히 풀 수 없을 문학의 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