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 깨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
곱고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 하세요
까치설의 유래
까치라는 새는 이상하게도 마을 근처 큰 나무 끝에 둥지를 짓곤 하죠.
나뭇가지를 모아 자기 몸뚱아리의 두 배가 넘는 지름이 1m 정도나 되는
제법 큰 둥지를 짓습니다.
가지 끝에 위태하게 얼기설기 지은 둥지는 보기와는 다르게 웬만한
강풍에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둥지 자체의 튼튼함도 있겠지만, 바람이 부는 대로 유연하게 흔들리어
망가짐을 피하는 지혜로움이 숨어 있죠.
들쥐, 곤충, 나무열매 등 가리지 않고 먹는 습성때문에 주로 인간이 사는
마을 주위에 둥지를 튼답니다.
농사에 해로운 해충을 먹어 치우니 익조이고
이 새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 하여 길조로 통하는 새랍니다.
우리는 흔히 설 앞날을 '작은 설'이라는 의미로 '까치설'이라 부릅니다.
이 작은설을 조선시대에는 '아찬설'이라 불렀죠. '아찬'은 '작은'이라는 뜻입니다.
'아찬'이 '작은'이라는 의미를 잃어 버리고 '아치'로 변하여
엉뚱하게도 아치설이 소리가 비슷한 '까치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까치설날’은 어엿한 표준말. ‘설 전날을 뜻하는 어린아이의 말’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단어가 옛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서정범 박사(경희대 명예교수)는
‘한국문화상징사전’(두산동아)에서 “옛날에는 작은설(설날 전날)을 ‘아찬설’ ‘아치설’이라고
했는데, 음이 비슷한 ‘까치설’로 엉뚱하게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아치와 아찬은 모두 ‘작은’이라는 뜻. 요즘도 남서 다도해 지방에서는 물때를 나타내는
말의 하나로 ‘아치조금’이라는 단어를 쓴다.
경기지방에서 ‘까치조금’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장장식 연구관은 “윤극영 선생의 동요를 통해 까치설날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까치와 설날은 아무 관련이 없는 걸까?
세시풍속서인 ‘동국세시기’(1849년)는 ‘청참(聽讖)’이라는 풍속을 소개하면서,
조상들이 설날 새벽에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 해에는 행운이 오는 것으로 믿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장장식 연구관은 “한민족 역사에서 까치는
그리 중요한 새가 아니었다.”면서 “기쁨과 행운을 상징하는
길조(吉鳥)로 자리잡은 것은 조선시대”라고 말했다.
<설날의 유래와 풍습>
<1설>
설은 새해의 시작이다. 이 새해 첫날 '설'의 말밑(어원)은 무엇일까?
<총괄>
설의 뜻은 보통으로는 '슬프다'는 뜻이지만 한편으로는 '삼가다'(근신)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의 옛말 '섧다'에서 온 것이다.
설날은 일 년 내내 아무 탈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행동을 조심하고 그 해 농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축원을 하는 날이었으며 원시시대 금제(터부)의 유제일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날엔 새옷을(설빔) 입기도 한다.
설은 봄, 신춘을 맞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조심하고 근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주는 말이다.
설을 언제부터 쇠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민속학자들은
중국의 사서들이 "신라 때 정월 초하루에는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일월신을 배례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된 것은 분명하다.
전통적으로 설날 아침에 조상에 대해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차례나 성묘,
그리고 세배가 종적인 인간관계의 확인이라면 뒤이어 벌어지는 각종 민속놀이는 횡적인
연대감을 강화하는 의식이다.
또 설날의 풍속 중에는 한해의 다복을 기원하는 축원의례와 미래를 예단하는 점복이 있다.
이와 함께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일찍 살 수록 집안에 복을 많이 안겨준다는
복조리를 사서 실제 조리로도 이용하고 두, 세 개씩 묶어 방 귀퉁이나 부엌에 매어서
그 속에 돈과 엿을 넣어두기도 했다.
이는 다산을 기원하는 농경사회의 염원과 한해의 부지런해야 함을 일깨우는 풍속이다.
또 설날 이른 아침에 짐승의 소리를 듣고 새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했는데
이때 까치소리를 들으면 길하고 까마귀소리는 대흉으로 여겼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세수(歲首)·원단(元旦)·원일(元日)·신원(新元)이라고도 하며, 근신·조심하는 날이라 해서 한문으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쓴다.
조선시대에 의정대신(議政大臣)들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을 드리고, 전문(箋文)과 표리(表裏:거친 무명 또는 흰 명주)를 바치고 정전(正殿)의 뜰로 나가 조하(朝賀)를 올렸으며, 8도에서도 관찰사·병사(兵使)·수사(水使)·목사(牧使)는 전문과 방물(方物)을 바쳤다.
이 날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 하고, 아이들이 입는 새 옷을 세장(歲粧)이라고 하며 어른들을 찾아 뵙는 일을 세배라 한다. 이 날 대접하는 시절 음식을 세찬(歲饌)이라고 하며, 또한 이에 곁들인 술을 세주(歲酒)라 한다. 세찬으로는 떡국[餠湯]을, 세주로는 초백주(椒栢酒)·도소주(屠蘇酒)가 나오는데, 떡국은 손님 대접에도 쓰고 제사에도 쓰므로, 세찬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다. 또 시루떡[甑餠]을 쪄서 올려 놓고 신에게 빌기도 하고, 삭망전(朔望奠)에 올리기도 한다.
한편 사돈집 사이에는 부인들이 근친하는 뜻으로 하녀를 서로 보내어 새해 문안을 드리는데, 이 하녀를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또한 각 관아의 서예(胥隸:衙前과 종)와 각 영문(營門)의 교졸(校卒:장교·나졸) 등은 종이를 접어 이름을 쓴 명함을 상관이나 선생의 집에 드린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한 쟁반을 놓고 이를 받아들이는데 이것을 세함(歲銜)이라고 한다.
민가에서는 벽 위에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액이 물러가기를 빌고, 남녀의 나이가 삼재(三災)를 당한 자는 3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인다. 설날 꼭두새벽에 거리에 나가 맨 처음 들려오는 소리로 1년간의 길흉을 점치는데, 이를 청참(聽讖)이라 한다. 또한 나무에 금·목·수·화·토를 새겨 장기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던져서 자빠지고 엎어진 것을 보아 점괘를 얻어 새해의 신수를 점치는데, 이를 오행점(五行占)이라 한다.
남녀가 1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상자 속에 넣었다가 설날, 황혼을 기다려 문 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친다. 속담에 나오는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은 설날 밤, 인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 보고 발에 맞으면 곧 신고 가버린다. 그러면 그 신의 주인은 불길하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이 귀신을 두려워하여 모두 신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잔다. 그리고 체를 마루벽이나 뜰에 걸어 둔다. 그러면 이 야광신이 와서 이 체의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면 설날부터 3일 동안은 길거리에 많은 남녀들이 떠들썩하게 왕래하는데,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빛나며,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새해에 안녕하시오' 하고, '올해는 꼭 과거에 급제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등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한다. 이렇게 남이 바라는 바를 말하는 일을 덕담(德談)이라고 한다.
설날의 놀이로서는 남녀가 방 안에서 다 같이 윷놀이를 하고, 젊은 부녀자들은 널뛰기, 남자들은 연날리기를 한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수천 년 동안 민간에서 지켜 내려와서 관습화된 음력설을 말살하고자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예를 들면 떡방앗간을 섣달 그믐 전 1주일 동안은 못 돌리게 하였고, 설날 아침 새벽 세배 다니는 사람이 특히 흰 옷을 입었을 때는 양력설에 세배 안 가고, 또 무색옷을 안 입는다 해서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흰 옷에 검은 물이 얼룩지게 하는 등 갖가지 박해를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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