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

차중락

bthong 2007. 9. 19. 13:49

 

망우리 공동묘지, 차중락의 무덤가에서 때때로 밤샘을 하는 소녀가 있다. 도심지가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호젓한 산골짜기에서, 망령이 되살아날 것 같은 무덤들 사이에서 눈오는 밤을 혼자 새우는 여고3년생. 단순한「팬」이라기엔 실로 엄청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무덤 옆 쌓아놓은 돌성(城)엔 아가씨들 편지 자꾸 쌓여

 

그 소녀는 차중락의 무덤가에 돌을 모아 조그마한 돌성을 쌓아놓았다. 성이라기보다는 편지를 넣기 위한 우체통이다. 그 돌로 된 우체통에는 고인에게 바치는 연서(戀書)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묘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잔디도 엉성한 무덤. 우체통은 겨우 비를 가릴 수 있을 정도고 편지는 펼쳐볼 수 있게「노트」로 엮어졌다.

『눈이 오기에 달려왔지요. 오빠 얼굴에 흰 눈이 소복. 하얀 눈을 조용히 쓸어드렸죠. (중략) 해가 저물었군요. 저번「크리스마스·이브」처럼 밤을 샐 용기가 나질 않는군요. H올림』

차중락을 오빠라고 부르는 H란 소녀. 첫「페이지」가 1월 14일자로 시작됐으나 그 다음 장에는 또 다른 필적의 글이 실려있다. 역시 오빠란 호칭.

『귓전에 맴도는 노랫소리에 끌려 오늘도 왔습니다. 오빠가 그리울 때면 아니 마음이 산란해지면 찾아 뵙겠습니다 - X옥』

『오빠 오랫동안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 금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오빠의 미소가 그리운「화(花)」는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백설만이 오빠를 대신해서 반겨주는군요. 저는 결코 울지 않겠어요 - X화』

『오빠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울리기에 찾아왔어요.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서- 오늘도 경이는 오빠가 그리워 이렇게 찾아왔어요. 누가 뭐래도 울지 않겠어요 - X경』

『눈 오던 어느 날 환히 웃던 개구장이씨, 짓궂은 놀림을 못받는 게 서운하군요. 하얀 눈망울 속에 어여쁜 꿈이나 꾸셔요 - 여X』

산책길에 나선 사람이라도 그 무덤의 주인공이 차중락임을 알고는 몇 마디씩 써놓고 가는 것일까? 문학소녀적인 애절한 글귀가 아닌 것도 몇 가지 있다. 그러나「H」「X옥」「X경」「X화」란 이름은 흡사 경쟁이라도 하듯「그리운」사연을 적고 있다. 차중락은 그토록 많은 소녀들에게 아픈 사연을 심어 놓고 갔던가? 소녀들의 사연은 자못 한이 담겨 있다.

 

H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하루도 안 빠지고 날마다

특히 H란 이름의 아가씨는 일기를 적듯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써넣었다. 그 중에는 봉함편지도 한 장. 수신란은「서울특별시 면목동 망우리1호 차중락 귀하」「H가 천국에 계신 오빠에게」라고 쓰여있다. 죽은 사람은 수신 불능임을 그도 알고 있다는 듯 우표는 안붙였고 그 대신 잡지에서 오려낸 듯한 차중락의 사진이 붙어있다.

이 H란 아가씨의 집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는 차중락이 입원했을 때에 거의 빠짐없이 병원에 왔고 임종도 지켜봤다. 2월 16일, 망우리에서 열린 차중락 묘비 제막식에는 50여명의 아가씨들이 몰려와 눈물을 뿌렸다. 거의가 중3에서 고3정도의 교복입은 소녀들. 폭설로 뒤덮인 망우리 공동묘지가 꽃봉오리 같은 소녀들의 눈물방울로 꽤나 질척거렸다. 그 중에서도 5, 6명의 소녀는 계속 손수건을 얼굴에서 떼지 않았고 한구석에서 오열하는 소녀도 보였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등 주로「센치」한 노래를 불러 소녀「팬」을 많이 가지고 있던 차중락이긴 하지만 죽은 현재까지도 그토록 많은 소녀가 그를 잊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H란 소녀는 이날 일기체로 된 3권의 연서를 무덤 앞에 내놓았다.(이「노트」는 유족의 양해 아래 기자가 입수했다)

 

「오빠」가「임」으로 변하고, 그 아가씨는 고교 3년생

「펜」으로 또박또박 일기체로 쓴 연서는 차중락이 숨진 68년 11월 10일부터 시작하여 69년 2월 9일까지 쓰여 있다.「오빠」호칭은 일기 속에서「임」으로 변모되었다.

『임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따라갈까요. 이젠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임께서 가신 길 - 11월 10일』

『이젠 꽃을 사와도 볼 사람이 없어졌군요. 이젠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하나요. 낙엽을 따라서, 그것도 첫눈 오는 날 아침. 모두가 나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드는 것 뿐』

이쯤되면 보통「팬」으로서의 관계 이상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교지(校紙)원고를 쓰고 대학입학자격시험을 걱정한 여고3년생.

 

”저는 숙녀가 되었답니다” 무덤 옆에서 밤을 새우기도

『지금 다섯째 시간이랍니다. 오늘 아마 일기를 못쓸 것 같아요. 방과 후 엄마한테나 가볼까 해요』

『오늘, 대학입시 예비고사를 치른 날. 어제 오빠의「그대의 미소」가 절 마중 나와 주셨더군요』

교복차림의 소녀라 해서 인기가수에 연정을 품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소녀가 무덤가에서 품는 꿈을 상당히「핑크」빛이다.

『달은 밝은데 혼자 있으려니 정말 귀신이 나올 것 같이 무섭더군요. 하지만 24일 밤 같진 않았어요. 그땐 무덤 옆으로만 내려갔으니. 꼭 하얀 귀신이 목덜미를 꽉 잡는 것 같아서 집에 가서도 한동안 떨었답니다』

『오빠는 지금 정말 하늘에 계신가요? 아닐 거예요. 금호동 건넌방에 계시지 않으세요? 그 빨간「커튼」이 드리운 그 차갑던 방에』

『저는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었답니다. 전날같이 그런 자그마한 여학생이 아니고 하나의 성숙한 여자예요. 오빠, 전 오빠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차중락 기념사업회장 최희준은『차중락은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다. 여기「팬」들 그리고 전국의「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동생 차중광(24)과 사촌형인 차도균(28)은 저마다『중락의 뒤를 이어 휼륭한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 제2, 제3의 차중락이 속속 탄생했다.

영화계에서는 이 차중락「붐」을 타고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2편이나 만들어 찍고 있다.『그의 요절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행복한 죽음도 없을 것』이란 게 묘비제막식에 모인 한 사람의 얘기.

그러나 인기인과「팬」과의 관계는 어느 한계선을 유지할 때 아름답고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고인의 무덤에 꽃을 꽂는 소녀의 마음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밤샘하는 소녀에겐 그 나름의 사연이 있게 마련인 것. 그의 무덤가에서 밤새우는 소녀에게 차중락은 어떤 노래를 들려줄 것인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인생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슬픈 노래, 우울한 노래를 부르면 슬픈 인생, 우울한 인생이 되고, 즐거운 노래, 희망찬 노래,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면 즐거운 인생, 희망찬 인생이 된다. 대중 가수들 중에 노래 가사 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 분이 적잖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중의 한 사람, 1960년 대 차중광이라는 가수가 있다. 그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곡 하나만 남기고 뇌염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뺨이 몹시도 그리웁고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새의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이 노래 가사를 뜯어 보면 가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구구절절 배어 있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쳐도, 곱게 물든 단풍을 보고도, 떨어지는 가랑잎을 보고도 가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쳐 있는 과거 지향적인 슬픈 노래다. 슬픔과 고독으로 뭉친 가사다. 차중광씨는 이 노래를 히트곡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이 불렀을까. 아마 수백, 수천 번 이상 불렀으리라. 그 결과 자기도 모르게 몸, 마음, 생각, 인생관과 세계관을 슬픈 의식으로 바뀌어, 마지막에 몹쓸 병에 걸려 낙엽처럼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찬송가 외에 부르는 노래 중에 특히 고향노래를 즐겨 불렀다. 가고파, 해는 져서 어두운데, 내 고향으로 날 보내줘, 고향생각, 고향의 봄, 먼산에 진달래꽃, 스와니강 등등이다. 1995년에 김해로 이사와서 지금도 고향땅에 산지가 13년째가 되지만 그 습관을 버리지 못 한다. 1960년 대는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전흔들은 가정과 사회, 나라 곳곳에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절망적인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당시, 서울과 부산에서 공부하면서 고향 하늘을 쳐다 보면서 고향과 고향 친구들,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다. 나는 내가 부른 노래를 따라 30년 간 부산, 서울, 진영에서 살다가 1995년에 고향땅 김해에 안착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 의식 속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듯이 노래 또한 그렇다. 긍정적인 말을 하라, 좋은 노래를 불러라고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찬송가에 이상한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다가 돈 만원을 손해 본 사람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오늘 아침에 봉황교를 지나 도서관 뒷길, 대남그릇점이 있는 사거리에 왔다. 이 도로는 항상 한산하다. 일방통행로인 그 도로에 수동 휠체어를 타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장애인이 눈에 들어왔다. 두 손을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손가락들이 보이지 않았다. 전동힐체어와 달리 힘들어 보였다. 자기는 빠른 속도로 움직여 보지만 걸어가는 나보다 느렸다. 때마침 그 장애인 20-30미터 앞에서 자동차가 오고 있었다. 장애인은 휠체어를 인도로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운전자가 최소한 예의를 베풀어 장애인이 인도로 올라갈 때까지 자동차를 멈추어 줄줄 알았으나 내 기대는 빗나갔다.

“빵 빵.”
오히려 빨리 비켜라고 경적을 울렸다. 장애인은 재빠르게 턱이 낮은 인도가 나타나자 그곳으로 올라왔다. 나는 인도로 올라온 휠체어를 어렵지 않게 추월했다. 미안했다. 두 발로 걷는 나를 얼마나 부러워할까?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처럼 걸어다녔소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측은한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는데 내 등 뒤에서 찬송가가 들였다. 예상 밖이었다. 비록 육신은 장애인이지만 마음은 장애인이 아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 찬송가 곡과 가사에 귀를 기울였다. 보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노래를 더욱 신명나게 불렀다. 곡은 291장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의 후렴이었다. 비록 몸은 장애가 있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즐거워 하고 있었다. 나는 가사를 생각하면서 비상금을 떠올렸다. 바로 이때를 위해서가 아닐까. 가사를 듣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히 곡은 찬송간데 가사는 아니었다. 몇 번이나 확인했다. 어느덧 한옥체험관 앞까지 왔다. 노래 소리는 이상 더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 선데이서울 69년 2/23 제2권 제8호 통권 제2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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