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와 도둑
피천득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 가야지
달밤인가. 달빛이 도둑에게 불리할 터이므로 별빛 영롱한 밤인지도 모르지, 밤눈 밝은 도둑이 담을 넘자 환하게 꽃들이 피어 있다. 어쩌다 도둑이 되기는 하였지만 원래 선량했던 도둑은 본업을 잊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웬 걸, 가난한 선비의 집이었던가 방안에는 책들만 가득하다. 어릴 적에야 누구든 왕자가 아니던가, 누구보다 꿈도 많고 책도 좋아했을지도 모르지. 왕자가 아니더라도 그 누가 젊은 날에 도둑이 될 꿈을 꾸었겠는가.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하고 밖으로 나서는 모습이 전혀 죄의식이 없는 단순방문자이다.
지우고 지워서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해 가는 화가가 한지 위에 단순한 선 몇 줄로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듯, 단 12 낱말의 세 문장으로 이렇게도 아름답고 서정 가득한 시를 쓰시다니. 나는 단박에 매료되어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학교를 중도에서 그만두시고 따님께로 건너간 일이나, 예순이 되시면서 수 없는 청탁을 단호하게 끊으신 후 30년 동안 수필 한 편 어디에건 쓰시지 않은 일 등이 모두 예사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선생님의 부드러움 속에는 범접할 수 없는 단단함이 있어 두고두고 읽히는 수필처럼 곰씹어졌다.
시는 역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렵게 쓰는 것은 쉽게 쓸 능력이 없기 때문은 아니냐고, 그냥 아무 욕심없이 순수해져 보라고, 그리고 정성을 가지고 기다리면 맑디맑은 시 한 줄이 쪼르륵 고일 지도 모른다고, 맘에 안 드는 줄은 가차없이 지우라고, 지우고 또 지워서 더 지울 수 없을 때 그때 남은 바로 그것이 시라고. 우리를 향하여 말하는 듯하다.
이 시는 전쟁이 끝나고 환도 후, 경희대학교 앞 회기동에 사실 때 쓰신 것이라고 한다. 그 때에 집은 흙벽돌로 지어 보잘 것 없었으나, 비교적 넓은 마당 덕분에 꽃을 많이 심고 가꾸며 살았는데 그 때에 쓰셨다고 하니, 벌써 50년 가까이 된 셈이다. 별처럼 좋은 시에 나이가 있을 리 없다. 좋은 시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 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거늘/ 나비 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의 「후회」나,
오늘도 강물에/ 띄웠어요// 쓰기는 했지만/ 부칠 곳 없어// 흐르는 물 위에/ 던졌어요
의 「편지」처럼,
선생님의 시는 모두가 쉽고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의 하나는 쉬운 시를 쓰는 일일 것이다. 나 역시 늘 맘속으로는 짧고 간명한 시가 가장 좋은 시이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짧고 쉬운 시란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절감하게 된다. 어쩌면 짧고 쉬운 시를 쓸 수 없기 때문에 길고 어렵게 쓰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왠지 가슴이 훈훈했다.
담장을 넘던 도둑은 마당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들에 눈길을 준다. 참 마음이 한가한 도둑이다. 슬며시 방을 들여다보지만 있는 거라곤 온통 책뿐이다. 공친 날이다. 그런데 그다지 속이 상한 것 같지는 않다.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 시가 독자들에게 마련해준 여백이 참으로 넉넉하지 않은가.
바쁜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너'의 자리다. '너'의 자리에 나를 세워보지 않고는 이해도 소통도 불가능하다. 방법은 서툴렀지만 그 귀여운 강도는 자기 앞에 서있는 타인이 느낄 불안을 헤아리고 있었다. 마음이 훈훈해진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깥은 여전히 겨울이다. 무정한 세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누가 사람인가. 홀로 자족한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또 도울 줄 아는 사람이다. 더불어 있음의 바탕은 배려다. 시절은 바야흐로 우리 정치·경제·문화 속에 배려의 숨결을 불어넣을 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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