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타인에게 칼을 건넬 때는 반드시 칼등을 잡고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건네는 것이 예의다. 이사 갈 때 칼을 버리고 가면 그 집과의 인연을 끊고 가는 것이고, 부엌에 칼을 아무렇게나 놓으면 가족이 다치거나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칼(날)이 날카롭기 때문에 이런 금기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는 금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칼로 사과를 먹다가 언니에게 이 금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건만, 지금도 여전히 시인은 사과껍질을 깎던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칼로 사과를 먹으며 누군가에게 칼로 사과를 먹였던 일을 떠올린다.
이 시의 맛을 깊게 하는 건 마지막 연이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오래 되짚어 보게 하는 구절이다. 젊지 않은데도, 여전히 가슴 아플, 많은 일이 줄지 않는 걸 보면 칼로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칼로 주는 사과를 너무 많이 받아 먹었나 보다. 칼로 먹고 칼로 먹였던 게 비단 사과뿐이었겠나 싶다. 뭔가를 준다는 게 이렇게 위태로울 때가 있다. 그것이 자기에게든 타인에게든, 그것이 사랑이든 배려든. 젊음이 아름다운 건, 가슴 아플, 많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은 그러기에 두려운 대상이다. 황인숙 시인은 여전히 젊고 경쾌하다. 계속 칼로 사과를 콕콕 찍어먹을 수 있을 만큼! 부리로 사과를 콕콕 쪼아먹는 새처럼, 아니 그의 시처럼.
'참고자료 > 애송시 10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송시 100편 - 제 66편] 이정록 - 의자 (0) | 2008.05.12 |
---|---|
[애송시 100편 - 제 65편] 유치환 - 생명의 서(書) (0) | 2008.05.12 |
[애송시 100편 - 제 64편] 김용택 - 섬진강1 (0) | 2008.03.27 |
[애송시 100편 - 제 63편] 구상 -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0) | 2008.03.27 |
[애송시 100편 - 제 62편] 김현승 - 눈물 (0) | 2008.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