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비둘기집 / 이석

bthong 2009. 2. 24. 09:12

아! 숭례문, 42년 만에 새 음반 낸 마지막 황손 이석

숭례문 참화1년… 안타까움 그리움 역사의식 음반에 담아
 
고봉석 기자

“노래로 역사의식 일깨우고 싶다”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불에 타 없어 진지 1년이 지났다,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어야 할 숭례문은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최근 숭례문에 대한 그리움과 문화재의 소중함을 담은 ‘아! 숭례문’이라는 음반을 내 노래로 역사의식을 심어줘 화제가 되고 있다.
 
 60년대 히트곡이었던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 이석(68)이 세 번째 음반 ‘아! 숭례문’을 냈다. 60년대초 첫번째 앨범 외국 곡을 번안한 ‘두마음’을 내고 1967년 ‘비둘기 집 ’이 실린 두 번째 앨범을 낸 이후 실로 42년만에 낸 것이다.
 
▲  황손 이석 © 브레이크뉴스

 세번째 앨범에서 황손 이석은 ‘아! 숭례문’을 타이틀곡으로 지난 해 참화로 불에 탄 숭례문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 있는 역사의식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앨범에는 기존에 애창곡 이었던 ‘비둘기집’ ‘두마음’ ‘외로운 조약돌’도 함께 실었다. 특히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홍보하는 내레이션도 함께 담아 전주를 알리고 있다.
 
 이 곡은 ‘주부가요열창’의 심사위원 심수천이 곡을 만들었다. 가수 태진아 현철의 가사를 많이 썼던 작사가 김동찬이 노랫말을 붙였다. 반주는 죽향 이생강선생이 연주를 맡아 노래 전체에 웅장함이 베어있다.
 
 “세상이 바뀌어 변해가도/사람이 바뀌어 달라져도/항상 너는 예를 다해/그 자리에서 향기롭게 웃고 소리 없이 우네/아! 숭례문 우리 숭례문/아! 숭례문 영원히 빛나라”
 
 황손 이석은 불에 탄 숭례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에 이 노래를 부를 때 간혹 눈물을 흘리곤 한다. “음반을 판매해서 돈을 벌기 위해 음반을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잊혀져 가는 역사의식을 노래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TV를 통해 숭례문이 불에 타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만 보아야 했던 그는 5시간 내내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야 했다. 일개 방화범의 손에 의해 6백여년간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던 숭례문이 맥없이 무너지는 참화를 그냥 지켜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역사의식이 담긴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황손 이석은 지난해 때마침 작곡가 심수천으로 부터 “왕손이 직접 노래를 부르면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해 평소 생각과 맞물려 음반작업 수개월만에 아! 숭례문이 탄생된 것이다.
 
▲  황손 이석  © 브레이크뉴스
 “평소에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습니다.  앨범이 나오기 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마침 전주시에서 지원을 해주어 숭례문에 대한 문화재의 소중함을 노래로 불러 국민들에게 전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모 레코드사에서는 제작비 전액을 지원해 줄 테니 음반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 왔습니다만 제가 거절 했습니다. 괜히 계약서 쓰고 얽매이고 상업성을 띠기 싫었기 때문이죠.”
 
 42년 만에 음반을 내는 그는 녹음실에 들어가기 전에 매우 흥분되고 떨렸다고 한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까하는 염려스러움 때문이었다.
 
 “실로 42년 만에 녹음실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흥분되고 가슴이 두근거려 녹음을 하기 전에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녹음을 했어요. 다행히 녹음기사가 아직도 40대 목소리가 나온다고 해 무사히 녹음을 마쳤어요.”
 
 1941년생인 그는 가수, 미국이민, 사찰생활, 자살시도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소년기를 엄격한 궁궐에서 생활을 하며 자랐다.
 
 “운동회날 달리기를 하려면 상궁들이 ‘아니 되옵니다 . 뛰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는 거예요 교장선생이 저를 대신해서 뛰어 주었어요. 왕실법도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자치기도 못하고 숟가락 젓가락소리도 내면 안되었죠.”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음악을 시작한 그는 중고등학교때 내내 고독하고 슬픔이 밀려와자유당시절 비원에서 가슴이 답답할 때 소리를 지르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이때 목이 터져 가수가 되고 지금의 굵직한 바리톤 목소리를 간직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가수 조영남이가 그래요 ‘형님! 발성 연습도 안했는데 목소리가 왜 이리 좋습니까?’라고 묻기도 했어요”
 
 미8군 무대에서 주로 팝송을 불렀던 그의 음악적 재능은 미군들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인정되었다. 그러나 윤대비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왕손이 광대노릇을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완강히 반대를 했던 것이다. 황손 이석은 먹고 살기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니 용서해달라는 석고대죄를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그는 군대에서 부상을 입는 순탄하지 못한 군생활로 이어졌다. “제가 월남 상이군인 7급 이예요. 월남에서 교통사고로 오른쪽 어깨를 다쳐 지금도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동궁에서 태어나 1979년까지 40여년을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았던 그는 전두환 정권때 궁에서 쫓겨나다시  피해 미국으로 망명아닌 망명을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LA근처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며 생활고를 해결 했지만, 그나마 10여년의 미국 생활도 청산하고 귀국을 해야만 했다.
 
 “저희 가게에 강도가 13번이나 침입을 했어요. 하도 강도들이 들끓어서 가게에서 일 할 때는 권총을 차고 일을 했었죠. 어느 날 강도가 장총을 들고 침입했어요. 지갑을 달라고 하기에 지갑을 건내려고 하니까 ‘야! 새끼야 빨리’하며 한국말을 쓰는데 한국교포였어요. 그때 많은 자괴감을 느꼈죠”
 
 미국에서 돌아와 마땅히 안착할 수 있는 곳을 못찾던 그는 양산 통도사 김해 육지사, 서울 수국사 등 절을 전전하며 살아 왔으나 전주시의 도움으로 지난 2004년  10월 전주에 둥지를 틀었다.
 
 현재 전주시 풍남동 한옥마을 승광재에서 거주하며 문화유산해설, 전국강연, 전주대교양국사 객원교수(2006~2008), 조선왕조 발상지 유적기행, (사)황실문화재단 총재를 맡아 황실복원운동 등으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집도 없이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상징적인 황실이  없는 나라에서 황손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담 했습니다. 여러번 자살도 시도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바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나라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되살리는데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숭례문’곡으로 전국순회공연도 갖고 있는 그는 상징적인 황실문화를 살려 달라고 건의 하기 위해 뱀띠 동갑내기인   이명박대통령과 면담신청을 해 놓은 상태이다.
 
 숭례문이 불에 탄지 1년이 되었다. 황손 이석은 “조급성에 밀려 빨리 복원하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묻어나는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복원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비둘기집 / 이석

 

 

전 우 작사 / 김기웅 작곡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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