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좋아하는 음악

"사의 찬미" 부터 "돌아가는 삼각지" 까지

bthong 2010. 9. 14. 00:53

 

사의 찬미에서 돌아가는 삼각지 까지


윤심덕님

                           초기 대중가요사1925~1928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역사는 100여 년 전 1908년경 당시의 명창들의 판소리 ,민요

등을 레코드 에 담아 내면서부터 이며 이때는 대중가요라고 할 수 없고 주로 전문분야의 사람들만 취급하였다.


대중가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대략1925년 즈음일본에서 유행하던 미국 의노래 또는 일본의 노래를 번안 한 가요였다. 1925년발표된 정사인 작곡 안기영 독창의 창가"내고향을 리별하고"를 대중가요의 시초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이노래는 가곡음반 이라고 해야 마땅 하리라고 본다, 우리들이 흔히 대중가요의 시초는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여러 대중가요들이 있었기는 해도 별다른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것은 판소리,민요,그리고,노래가락 그냥 소리 라고 하는 것들이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만 전해지다가 유성기라는 신기한 신물질의 등장으로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 하면서부터 이며 윤심덕이 김우진과 현해탄 푸른물에 몸을던지면서 사의 찬미가 대중들 에게 큰 반향을불러 일으키면서 대중가요의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운명과 노래가 너무나 같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제의 식민지시대 우리 선조들의 고달픈 삶을 스스로에게 대비시키려는 심정이었기 때문일까?,아무튼 그시대의 모든 대중가요들은 슬프고 애달픈곡, 조국을 잃어 버린 "한"의 노래가사들이 거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아픈 노래와 더불어 간도 땅에서 고향 그리는 노래들 그 모든 대중들의 아픔들이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틀이 짜여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중가요 [황금기1928~1943] [침체기1944~1946] [도약기~1949]

우리나라 대중가요 작가들이 대량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중가요와 신민요를 창작하여 황금기를 이루게된다. 이시기에도 역시 일본의 가요들이 번안되어 함께 공존하는 시기였다.

봉선화[이인범,김천애]황포돗대[최병호]남아일생[남인수]서귀포칠십리[남인수]아름다운화원[박향림]부모이별[백년설]지원병의어머니.아들의혈서,목단강편지,낙동강손님,혈서지원,사나희의길[채규엽]우차만리,집세기동동,삼각산손님,우리는제국군인,:대략1943년도출판황해도노래.장수산찾아서,봄날의화언,산중일기,아리랑풍년,개나리춘풍,야루강인사,영서천리,들국화[고운봉]:대략1945

1944년부터 해방되던해에는 거의 물자부족과 젊은 사람들의 징용과 정신대들의 차출로 대동아 전쟁의 막바지에서 민족의 대아픔이 극에 달할때 우리대중가요도 침체기를 면치못하였다.
일제의 사기앙양으로 공연 하던 극단들은 해방과함께 조국으로 돌아오는 동포들의 환영공연으로 바뀌면서 동포들과 함께 환희의 눈물을 흘리면서 기쁨을 나누었다.

1930년대 말부터 화려한 무대를 제공하며 서민들과 애환을 같이하던 악극단들이 해방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10여년간 다시 악극단의 황금전성기를 맞게된다.
당시 활약한 악극단중 김해송이 이끌던 [K.P.K악단]이 독보적 존재였으며[조선악극단],[라미라가극단][반도가극단][태평양가극단]백마가극단][무궁화악극단]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악극단들이 명멸 하였다.

 

이무렵 미군의 진주와 더블어 재즈를 비롯한 서양음악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특히 부기우기리듬이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큰 유행을 타고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다. 국내 음악인들은 제각기 악단을 조직하여 미8군위문공연 무대에서 활동 하였다.

물자부족으로 어려운시기에 해외에서 돌아오는 요인이나 미군을 맞을 환영노래중에 [서대문을 열어라] 고려성작사 김용환작곡

서대문을 열어라 인경을 쳐라
삼천리 곳곳마다 물결치는 이기쁨
민족의 꽃은 다시피었네
영광된 내조국 영원무궁하리라

해방후 발매된 음반들을 보면'해방 삼천리'[작곡박시춘,김운하작사 노래옥두옥]가거라 삼팔선[이부풍작사 남인수노래]목장의 노래[유호작사 옥두옥노래]우러라 은방울,신라의 달밤,님이여 아옵소서[이난영노래]추억의 꽃다발,사육신,고향만리,럭키서울,낭낭18세[백난아]금박댕기,비내리는 고모령,애정산맥,용사의 노래[이영순작사 박시춘작곡장세정노래]선죽교[이인권]제물포아가씨[박재홍]울고넘는 박달재[박재호]아내의노래[김백희]왜그런지[이예성]한강[심연옥]



1950~1960시련기와 재황금기

1950년 6,25동란이 터지자 우리나라 대중가용계는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서울에 남아있던 만담가[손일평]음악인 최희남,김형노,권원한,고종익 김해송,김형래,이인근,이몽녀,김홍열,강남춘 등이 납북되었고 고복수,신카나리아등은 탈출에 성공 하기도 하였다.


9,28수복후엔 전우야 잘자라[현인]등을 불러 대힛트를 하기도 하였으며 1,4후퇴후 피난지 부산에서 김정구는 백마악극단에서 순회공연을 하였고 한복남은 축음기 바늘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간이 녹음실을 차려[도미도레코드]를 창설하기도하였다,

 

도미도에서는 한정무가[꿈에본내고향]을불렀으며 금사향의 홍콩아가씨 허민은 [페르샤왕자] 미도파 레코드에서는 경상도 아가씨[박재홍]오리엔트에서는[굳세어라금순아][런던소야곡][전선야곡,신세영][[님계신전선,금사향][아내의기원,황정자][마음의고향,백년설][미사의노래,이인권]무영탑사랑,왕자호동,쌍가락지논개[남성봉]태평에서는고랑포아낙네[백난아]멕시코나이트[성황당고개,박재홍]등이 출판되었다

환도후에는 애국가'승리의노래'날려라 해병대기'삼다도소식'슈산뽀이[박단마]승리부기[신카나리아]봄날은간다[백설희]코리아룸바'청춘고백[남인수]뉴차이나타운[김정구]유괘한 사라리맨,비나리는 인천항[이인권]해인사 나그네[백년설]망향의 탱고[진방남]비나리는 삼량진[박재홍]항구없는 항구[박재홍]맘보의 유행은 환도후 맘보춤과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사교춤의 맹위를 떨친다.


가요계에서도 아리랑맘보,도라지맘보,양산도맘보,닐니리맘보,코리아맘보,맘보잠보,청춘이맘보,나포리맘보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맘보 노래가 쏟아져 나왔다. 이어서차차차,트위스트등 외국리듬이 잇따라 유입되면서[노래가락차차차]등이 힛트하였다


영화주제가도 함께 유행하였는데,최초의 음악영화로는[푸른언덕,현인]['찔레꽃,][가거라슬픔이여][딸칠형제][삼등호텔][백치아다다,나애심][여옥의노래 산유화 주제가,김광수작곡][과거를 묻지마세요][유정천리]카츄사의노래][청실홍실][꿈은사라지고][동심초,권혜경]

1960년대 들어서는 [장희빈][강화도령][회전의자][호반의벤취]등이 힛트하기 시작한다. 영화주제가로는[나하나의사랑,송민도]1958년[나혼자만이,권혜경]개제되어 불렀다,1950년대 후반부터는 새대교체가 대폭이루어져 명국환,도성아,김용만,도미,박경원,손인호,고대원,원방현,남일해,등의 신인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남백송,고봉산,방태원,안다성,윤일로,최갑석,백야성,등이 두드러 졌으며 여자가수로서는 권혜경,박재란,최숙자,김정애,안정애,지화자,최양숙,이숙희,곽순옥,박신자,백금선,차은희등이 힛트곡을 내었다,


이시절노래는 왕자호동[도성아]인도의향불[현인]무정열차[남인수]방랑시인김삿갓[명국환]백마야우지마라[명국환]울어라기타줄[손인호]물방아도는내력[박재홍]나하나의사랑[송민도]산유화[남인수]꽃중에꽃[송민도]남원의애수[김용만]부산불루스[이숙희]꿈이여다시한번[현인]장희빈[황금심]비나리는 호남선[손인호]검은장갑[손시향]과거를 묻지마세요[나애심]개나리처녀[최숙자]청산유수[김용만]단장의 미아리고개[1956년이해연]산장의 여인[권혜경]럭키모닝[박재란]노란사쓰의 사나이[한명숙]무너진사랑탑[1961년남인수]생일없는 소년[김용만]남포동밤0시[고봉산]언제까지나[나애심]그대생각[이남순]아네모네탄식[송민도]이별의 인천항[박경원]성황당 고갯길[박재호]오백년 고려성[방태원]명동부르스[고운봉]오동동타령[황정자]추억의 소야곡[남인수]노래가락차차차[황정자]비의탱고[도미]대전부르스[안정애]눈물의연평도[최숙자]아베크토요일[백설희]여옥의노래[송민도]첫사랑마도로스[남일해]내가울던파리[윤일로]우리마을[한명숙]등 1960년대 후반까지 우리들의 귀에 익은 노래들이다.

1959년 17세의 어린나이[이미자]가 데뷔하여 애수,열아홉순정,워싱톤부르스,날아간 파랑새,님이라부르리까등을 불렀으며 동백아가씨로 톱가수가 되었으며 이후 1960년대 후반 배호님이 이미자의 노래 여러곡을 리바이벌하여 불렀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는 배호님은 1964년 두메산골로 가요계에 입문하여 황금의눈으로 어느정도 세인들에게 알려지고 1966취입 하고 다음해 1967년에 발표한" 돌아가는삼각지"가 대구 에서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하였으며 전국 20주연속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면서 가요계의 한시대를 풍미하였다,

 

이후그가 타계한지30여년이 지났어도 우리들은 그의 매혹적인 음성에 반하여 그의 발차취를 더듬는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의 뿌리는 결코 어디에서 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가요 역사에서 언급했드시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소리속에서 이어져 오다 세태에따라 조금씩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천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30세에 요절한 가수 배호님 (ㅠ,ㅜ);;

 

배호노래 모음(*나오는대로 편히 들으세요.^^*)

 

그린로드 생각;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3명이 100 여년전에 미국에서 판소리 레코드 기록한이래

                      윤심덕씨의 한많은 한국노래와 서양음악과 엔카의 합성으로 들리지만,,

                      트로트노래 바로전의 한국 대중 노래를 보급시킨 효시라고 그린로드는 생각 합니다.
                      1900년대 넘어와서 가요계 뿌리를 찾지 못하였다는 가요계 종사자 분들에게

                      한 말씀 드리면,,너무 히트곡에 매달리고 삶에 치우치지 않았는지.. 그린로드는

                      증조 할아버지 제사 날짜도 모르고 사는놈이라 큰소리 칠수도 없지만,, 많은

                      가요계 종사자 분들이 가요계 뿌리를 너무 등한시 한 건 아닐까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