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맥의 동쪽기슭에는 산수가 수려하고 풍경이 아름다우며 기후가 좋은 변경도시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 나라 8대 내륙통상구의 하나이며 조국의 동대문이라는 신성한 칭호를 가진 도문시이다.여기는 네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맑고 깨끗한 부르하통하,가야하,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도문통상구의 교두는 그 기세가 웅위하고 엄숙하고 장엄하게 출입경변경선에 서있으면서 길이가 1리가량 되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관리하는 두만강대교를 련접시키고있다.국문부근에는 해관,변경보위, 무역검역,위생검역과 상업을 일체로 한 련합검사청사가 있는데 날마다
수백명에 달하는 친척방문과 친선래왕 인원이 여기를 거쳐 출국하거나 입국한다.관광객들이 국문에 올라가 멀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낭양읍의 자연풍경을 바라볼수 있는데 여러가지 건축의 모습과 번화한 교통현황은 관광객들에게 이국풍경에 대한 이채로운 감수를 준다
돈화시 대산취자진의 대구촌에 하나의 구라파식 건축특징으로 세워진 손님방과 오락청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강유람구이다.해마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을 접대한다.
대구저수지와 부근의 목단강은 경치가 아름다와 주요한 풍경구이다.이곳의 사면은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주위에 강물이 흘러 그 풍경이 아름답고 우아하며 휴식하면서 료양하고 관광하면서 놀기에 적합하다.대구저수지는 여러가지 진귀한 물고기들을 많이 기르고있는데 잉어,흑구촌,마구 등 물고기들은 자못 생신하고 맛있는 물고기료리를 만들수 있다.대구는 산이 높고 삼림이 뻑뻑하여 여름과 가을철에 산에 올라가 버섯과 들나물들을 채집할수 있어 사람들에게 산간생활의 정취를 자아내게 한다.
훈춘시 도시구역에서 동쪽으로 약 65키로메터 가면 중조변경접경지에 초모산이 있다.산 우와 아래는 대부분 화산석이다.산중턱에 4계절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과 작은 천지가 있다.이 샘물은 겨울에는 차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수질이 맑고도 순수하다.찌는듯이 무더운 여름이거나 엄동설한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샘물을 마시면 감로수가 페부에 스며드는듯하여 삽시에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하므로 진짜 상등음료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이 샘물은 갈증을 덜어줄뿐만아니라 질병도 치료할수 있다.늘 이 샘물을 마시면 백발이 윤기도는 검은머리로 될수있다.
삼복철에 생신한 고기를 일주일간 담가두어도 변질하지 않는데 참말로 생신함을 보장하는 천연적인 랭장고라 할수 있다.
관광객들이 참관하고 마시는데 편리를 도모하고저 변방전사들은 세멘트로 생기가 넘쳐흐르는 한마라의 룡을 만들어 샘물을 룡아가리로부터 분출되여나오게 하였는데 사람들을 자못 경탄케 한다.
변방전사들은 매우 자랑스럽게 <<북방변계선의 제일 샘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훈춘시소재지에서 남쪽으로 22.5키로메터 가면 흑정자산 남양에서 발원되여 평지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샘솟아 이루어진 아홉개의 못과 그 못아래에 구불구불 흘러 이루어진 쇠사슬 같은 81개의 강이 있는데 이를 권하라고 한다.
날씨가 맑고 따뜻하여 만리창공에 구름 한점 없을 때 거칠고 가파로운 산길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가 바라보면 권하의 기이한 풍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하늘의 별과 바둑처럼 널린 아홉개의 물집은 한개의 천연적인 물곬과 련결되여 한뀀의 투명하고 반짝이는 명주와도 같이 눈부신 빛을 뿌리고있다.
사도포는 연변지구에서 가장 큰 련못이다.매년 7월중순이면 련꽃잎들이 물우에 동동 떠있고 련꽃술이 싱그러운 향기를 풍겨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검실검실한 들판에서 한갈래씩 구불구불 흘러가는 시내물들은 한폭의 신기하고 아름다운 화폭을 이루고 있다.
모아산기슭의 해란강반에 자리잡은 룡정은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아름답고 아담한 도시이다.무릇 룡정에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시내 중심에 있는 룡정지명기원지에 와서 돌아보고 흔상하면서 한차례 관광을 한다.
이곳에는 우아하게 하늘높이 치솟은 수양버들 한그루가 서있다.바람에 나붓기는 휘늘어진 푸른 가지가 래왕하는 관광객들을 정겹게 부르고있다.수양버들옆에는 한장 남짓한 높이의 돌비석이 세워져있는데 비석의 정면에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룡정지명이 기원된 우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고 비석의 아래쪽에 있는 우물어귀를 돌로 둘러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룡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다.
우물은 마치 하나의 거울처럼 흘러간 력사의 찬란한 빛발을 반사하고있다.때는 1879년전후,조선족농민 장인석과 박윤언 두 가정이 륙도구(지금의 룡정)에 이사와 황무지를 일구고 곡식을 심다가 문득 이 오랜우물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푸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부근의 한족농민들과 함께 이곳에 드레박받침대를 세웠는데 조선족들은 이를 용드레우물이라고 하였다.이로부터 륙도구를 룡정촌이라 부르게 되였다.1934년에 지명기원우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우물을 다시 수건하고 주위에 기둥을 세우고 우물둘레에 철관을 씌웠으며 돌비석을 세우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훈춘시 하남대교의 북측에 청나라 건축특색을 띤 6각비석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룡호석각의 보호정자이다.사람들은 이를 룡호비석정자라고 한다.
석각은 화강암층으로 되였고 정면에는 겹글자필법으로 <<룡호>> 두 글자를 새기고 좌측아래쪽에 해서체로 <<오대징서>>란 네 글자를 새기였다.<<룡호>>는 즉 <<룡양호시>>혹은 <<룡반호거>>의 축사이고 나라와 변강을 보위하는 암시를 주고있다.<<룡양호시>>는 룡이 솟아오르고 호랑이가 노려본다는 뜻이고 <<룡반호거>>는 산세의 웅장함을 뜻하는것이다.
룡호석각은 1886년 청정부의 도찰원좌우부어사 오대징이 훈춘에 와서 짜리로씨야와 훈춘 동쪽변경선을 재차 측량할 담판을 하는 기간에 남겨놓은 필적이다.
이것은 변강 여러 민족 인민들이 짜리로씨야의 강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분발하여 로씨야의 침략을 물리친 력사의 견증물이며 나라의 존엄과 조국령토의 완정을 보위한 력사의 기념비이다.
1980년,나라에서는 비용을 내여 청나라 풍격을 띠고있는 정자를 세웠다.이 석각은 미명을 후세에 전하면서 후대들을 격려할 것이다.
미인송은 장백산에 특유한 하나의 진귀한 나무종류로서 <<장백송>>혹은 <<백적송>>이라 불렀다.전하는데 의하면 탄우가 비발치던 항일전쟁년대에 한 나젊은 항일련군의 녀간호원이 한 부상병을 구하기 위하여 적들과 격전하다가 몸에 중상을 입게 되였다.그는 한그루의 곧게 뻗은 아름다운 소나무에기대여 섰는데 붉은 선혈이 그의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와 나무줄기를 따라 흘러 나무몸뚱이를 적시였고 나무뿌리와 흙까지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그 이후부터 이 나무는 사람의 색갈로 변하였고 나무의 생김새도 역시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간호원과 같이 변하였다.이후로부터 <<미인송>>이라는 이름이 널리 전해졌다고 한다.
미인송은 절세의 미인처럼 아름답고 생명력이 매우 강하며 일년 사계절 무더운 여름철이거나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도 그 꿋꿋한 몸체와 하늘높이 뻗은 가지는 그 언제나 지칠줄 모르고 생기가 왕성하고 정력으로 차넘치고있다.
미인송은 매우 높은 관상가치가 있을뿐만아니라 경제적실용가치도 매우 크다.그 재료 자체가 습기를 받는 성능이 낮고 부식을 막고 알칼리성에 견디는능력이 강하기에 다리건축과 조선업에 좋은 재료로 되고있다.때문에 미인송은 국가일급보호자원으로 되고 있다.
白頭山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걸쳐있는 산.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690m의 백운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백두산은 구성암석과 지질구조에 의해서 크게 5부문의 수직구조로 파악된다.
백두산의 밑바닥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이며, 그위에 제3기말의 현무암대지, 제3기말의 경사 현무암고원, 제4기의 알칼리 조면암류, 부석의 순서로 덮여 있다. 백두산의 밑바닥을 이루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는 평안북도에서 함경북도에 걸치는 평북육괴·함북육괴로 백두산의 지표에서는 극히 일부분의 침식산지를 빼고는 노출되어 있지 않다. 제3기에 들어서 지표로부터 60~70㎞ 깊이의 지하에서 상부 맨틀을 구성하는 암석 가운데 방사능원소들이 붕괴되면서 열점이 만들어졌다. 이의 영향으로 당시의 지표암석인 화강편마암류에 수직방향의 쪼개진 틈(열곡구조)이 만들어졌다.
해발고도 1,000m까지는 완만한 경사의 현무암대지이다. 이는 제3기말인 310만~1,990만 년 전 6회의 화산분출로 200~400m 두께의 현무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방사능원소들의 붕괴로 만들어진 열점에서의 열에 의해서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의 마그마 챔버(magma chamber)에 모였다가, 자체 압력이 증가되면서 열곡구조의 약한 틈(약선대)을 따라서 분출한 현무암이다. 이 현무암은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굳어진 것으로 천지 주변의 200~300㎞ 범위에 흘러서 3만㎢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가 되었다.
백두산의 중국 쪽의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1,000~ 1,800m 55㎞의 거리가 경사도 8~12°의 완만한 현무암고원이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초의 제2차 염기성 용암의 분출(약 260만~290만 년 전)로 만들어진 녹회색의 현무암으로 470m 두께로 덮여 있다(그림 2-3). 해발고도 1,800m까지, 즉 현무암대지와 경사 현무암고원까지가 순상화산을 이루는데 이는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여러 번 분출된 까닭이다. 해발고도 1,800~2,500m는 보다 급경사(35~40°)의 종 모양 화산을 나타낸다. 이는 제4기에 21만~61만 년 전, 13만 년 전, 9만~10만 년 전의 3회에 걸쳐 잘 흐르지 않으며 점성이 큰 산성 용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조면암이기 때문이다. 그 두께는 약 650m이다
천지 주변의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백두산 꼭대기 지표면은 40~60m 두께의 회백색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는 가스가 많고 폭발력이 큰 화산에서의 분출 마지막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공중 분출물이 떨어져 덮인 것이다. 부석은 고온의 마그마가 지상에 분출됨에 따라서 이에 용해되어 있었던 휘발성분과 수증기 등의 가스가 증발되어 바위 부스러기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된 것으로, 가벼워서 물에 뜬다. 이와 같은 천지 주변의 부석더미는 백두산 화산활동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며, 천지 형성과정과 그 시기를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일반적으로 마그마의 분출만으로 이루어진 화구는 그 둘레가 2㎞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며 주변의 외륜산에는 화산폭발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는 부석이 두껍게 덮여 있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다.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그림 4의 매몰림대)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氷場)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주빙하지형으로는 백두산 기상대 근처 동쪽 사면에 표토가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 형성된 계단 모양의 솔리플럭션(solifluction), 역시 기상대 부근 2,180m 고도에 작은 무덤 모양으로 표토가 0.3~ 0.4m 높이로 부풀어 오른 대규모의 유상구조토, 잔설의 재동결과 녹은 물의 침식에 의해서 지면이 둥그렇게 움푹 파인 설식요지, 암석이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서 부서지고 무너져내려 바위부스러기 더미를 이룬 애추(talus) 등이 보고되어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는 강한 바람이 부는 때가 많아 바람이 깎은 지형현상으로 풍식구멍·풍식버섯·풍식기둥 등이 암석에 많이 나타나 있다.
천지 주변의 연평균기온은 -7.3℃이며, 1월평균기온 -24.0℃, 7월평균기온은 8.5℃이다. 월평균기온으로 보면 영상의 기온은 6~9월의 4개월간 10℃ 이상으로 오르지 않고, 영하의 월평균기온은 10월에서 다음해 5월까지 8개월간 계속된다(표). 이를 쾨펜의 기후구로 나타내면 한대기후 가운데 툰드라 기후에 속한다. 천지 주변의 백두산 기후는 동결기(10~5월의 8개월간)와 해빙기(6~9월의 4개월간)의 2계절로 나뉜다. 동결기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서 가장 낮은 기온이 -40℃까지 나타나고, 해빙기(이곳의 여름철)에도 월평균기온은 10℃ 이상으로 오르지 못해 땅표면이 녹기만 할 뿐 서늘하여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풀만 자란다. 첫서리는 8월 상순에, 마지막서리는 7월 하순에 내려서 무상기간은 7월말에서 8월초까지 20일간이다. 연강수량은 1,500㎜로 주변의 낮은 지대인 삼지연보다 600㎜ 더 많다. 이는 해발고도가 높아서 응결고도 이상 지역이 넓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개가 자주 발생하여 강수량이 많은 6~9월에 월평균안개일수는 15일이며, 그중 80%가 비와 함께 하여 안개의 평균 계속시간은 6.6시간이다. 7월과 8월에는 비가 많고, 6월과 9월에는 우박으로 내릴 경우가 많다. 눈은 9월 중순에서 다음해 6월 중순까지 9개월간 내리며, 8개월 이상(적설기간은 257일) 눈이 쌓여서 1.2~ 2m 정도의 두께에 이른다. 바람이 매우 강하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주로 분다. 따라서 백두산의 기후는 기상변화가 매우 심한 고산 툰드라 기후를 나타낸다.
천지주변의 월평균기온과 풍속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평균 |
월평균기온(℃) |
-24.0 |
-21.5 |
-16.6 |
-7.5 |
-0.6 |
3.9 |
8.5 |
8.5 |
1.7 |
-5.2 |
-13.8 |
-21.1 |
-7.3 |
풍속(m/s) |
15.6 |
14.5 |
14.1 |
12.0 |
11.3 |
7.4 |
7.3 |
6.8 |
8.5 |
10.0 |
15.5 |
17.4 |
11.7 |
1959~70년의 평균값
백두산에는 650여 종의 식물종이 분포해 가지수로 볼 때는 한국의 다른 지역보다 적은 편이다. 이는 최근 200~400년 전의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새로운 식물천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백두산은 해발고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고도에 따라서 식물종의 분포가 뚜렷해 식생의 수직분포를 보인다(그림4).
삼지연(1,400m)에서 신무성(1,600m)까지는 교목대로 잎갈나무·분비나무·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림과 자작나무·사시나무·달피나무 등이 분포한 침·활엽수림의 혼합림대를 이룬다. 교목 밑에는 물싸리나무·들쭉나무·까치밥나무 등의 관목림과 초본이 자란다. 신무성에서 무두봉 부근의 해발고도 2,000m까지는 잎갈나무·가문비나무·분비나무 등의 침엽수림대로,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나무의 키가 작아진다. 무두봉(1,930m)에서는 겨울철의 강한 북서풍의 영향으로 사스레피나무의 가지가 남동쪽으로 편향수(偏向樹)가 되며, 수목한계선을 나타낸다. 해발고도 2,000m 이상은 키가 작은 관목류와 초본들이 자라는 고산대로, 산악툰드라 지대이다. 이곳에 자라는 초본류는 두메자운·담자리참꽃·바위돌꽃, 눈속에서 꽃이 피는 노란 만병초 등이다. 이 지대는 특히 꽃이 피고 씨가 만들어지는 기간이 짧아서 7~8월에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서 아름다운 꽃밭을 이룬다.
백두산의 토양은 해발고도 1,600m까지는 산악포드졸성 갈색삼림토양이며, 1,600m에서 수목한계선인 2,000m까지는 산악포드졸성 토양, 그 이상의 높이에서는 산악초원토양이다. 8·15해방 전의 보고에 따르면 북포태산(2,289m)의 해발고도 1,900m 지점에서 산악포드졸성 토양이 발견되었고, 이 지점의 지표 아래 87㎝ 밑은 9월 중순에도 얼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백두산에는 호랑이·곰·이리·늑대·멧돼지·사슴·노루 등 50여 종의 산짐승, 꿩·부엉이·딱따구리 등 137종의 새, 산천어·열목어 등의 냉수성 어류가 살며, 나비 등의 곤충도 많다.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는 없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5종, 작은 동물과 곤충류가 4종, 그리고 이끼가 생장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창바이 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 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창바이 폭포-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
백두산의 최대자원은 적송·잎갈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의 삼림으로서, 이들 목재는 철도와 압록강 및 두만강의 뗏목에 의해서 길주·만포·무산의 제재소로 운반된다. 기타 자원으로는 건축용의 골재와 단열재로 이용 가능한 부석, 천연수로 이용되는 천지의 물, 약초와 산나물 등을 들 수 있다.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 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그밖에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白頭山定界碑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진 경계비.
백두산은 고구려나 발해의 시기에는 우리나라 땅이었으나, 그후 우리나라의 판도가 반도로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서의 두만강·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때 두만강 상류의 무산지방(茂山地方)은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이리하여 조선과 청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 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특히 동부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일대 삼림지대는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으며 지린[吉林]의 영고탑(寧古塔)은 이러한 특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이에 날로 융성해지는 청나라는 이 지역을 한인(漢人)·몽골인 등 주변 민족의 침범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그위에 양유를 심어놓았으며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과의 접경에도 해당되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인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채취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월경사건(越境事件)은 자주 발생하여 문제시되었고, 청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국왕과 동석하여 죄인을 심리한 일도 3번이나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는 월경침입이 자주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 명이 작당하여 우리측의 관원과 군병을 납치한 일도 있었다.
1677년(숙종 3)에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6년 후에 다시 치제했다.
1691년 조선의 조정은 청대신 5명이 영고탑을 경유하여 장백산에 가서 그곳을 관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크게 놀랐다. 그뒤 1710년에는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며 그 도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따라서 2년 후인 1712년에 청은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국경을 실지답사시켰는데, 조선은 그 소식을 그해 2월 24일 청 예부(禮部)에게서 통고받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에 불응하자는 측도 있었으나, 결국 응하기로 하고 접반사를 임명해 파견했다. 목극등은 싱징[興京]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했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차사관(差使官)·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후에 무산으로 갔다. 그리하여 조선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의 일방적 조처로 정계비가 세워졌다. 따라서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세우기로 했던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大淸'이라 행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종서(縱書)하고 청의 필첩식(筆帖式), 조선의 군관·차사관·통관의 성명을 각서(刻書)했다.
이와 같이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 건립이었으므로, 조선 말기에는 청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임의로 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경계문제가 양국간의 문제로 재연되어 간도(間島)의 귀속문제에 연결되었다.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조사케 하여, 정계비문 가운데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물 한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토문강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졌다.
백두산에 관한 최초의 등산기록은 1764년(영조 40)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이 쓴 〈백두산유산록〉이다. 그는 5월 14일 함경북도 경성을 출발하여 5월 23일 백두산 꼭대기에 오른 후, 6월 2일에 돌아와 18일간에 걸쳐서 백두산을 등산했다. 최남선은 1926년 7월 24일부터 8월 7일까지 동아일보사의 백두산 탐험대에 동행하여 백두산 정상까지 오른 후, 1927년에 기행문인 〈백두산근참기〉를 발표했다. 이는 백두산의 지리·역사·민속 뿐만 아니라 백두산 문화론, 민족정기의 고취, 조국애의 고창 등을 내용으로 한 웅대한 기행문학이다. 더구나 1931년에 행방불명된 백두산정계비의 자세한 내용과 그것을 세울 때의 자세한 상황을 기록하여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936년 8월 7일부터 18일까지의 12일 동안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조사한 후, 그 탐험대원들이 펴낸 ≪아아! 천지다≫는 쉽게 씌어져서 일반인들이 백두산을 인식하기에 적절한 책이다. 겨울철의 등산기록으로는 〈백두산-교토제국대학 백두산원정대 보고〉가 있다. 1934년 12월 20일 일본 교토를 출발하여 다음해 1월 21일 교토에 돌아오는 등산보고서로, 겨울철 등산의 어려움과 당시까지의 백두산에 대한 문헌, 등산 중의 사진 등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최근의 조사보고로는 1989년 8월 2일부터 6일까지 백두산 식물을 조사한 〈백두산의 꽃〉이 있다. 중국측의 조사뿐이지만, 백두산 식물의 천연색 사진과 생물학 분야의 조사가 요약되어 있어서 생생한 자료가 된다. 북한은 백두산의 일부를 1959년에 '백두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으며, 1976년에는 이 구역을 확장했다. 중국은 1958년 천문봉(2,650m) 부근에 기상대를 설치하고, 1960년에는 2,100㎢를 '창바이 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다. 북한과 중국측의 자연보호구는 1980년에 '국제생물권보호구'로 지정되었다.
백두산의 교통로는 북한이나 중국을 통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백두산 입구인 삼지연까지 비행기·열차·자동차 편이 있다. 삼지연에서 백두역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며, 백두역에서 향도역까지는 케이블카로 10분 걸린다. 향도역에서 장군봉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중국 쪽에서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의 얼다오바이허가 백두산 입구가 된다. 이곳까지는 옌지[延吉]나 안투[安圖]에서 열차나 자동차 편이 있다. 얼다오바이허에서 창바이 폭포 입구까지는 50㎞의 거리로 버스를 이용하며, 버스 종점에서 창바이 폭포를 지나 천지 물의 단 한곳의 유출구인 달문까지는 2㎞의 거리로 걸어서 오른다. 현재 우리가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중국을 통하는 방법뿐이다.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남으로 맥을 뻗어 낭림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산·월악산·속리산·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한국 산의 큰 줄기를 망라한 산맥이다. 즉 한반도 산계의 중심이며, 국토를 상징하는 산줄기로서 함경도·평안도·강원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 걸쳐 있다.
〈산경표 山經表〉에 보면 한국의 산맥은 1개 대간(大幹), 1개 정간(正幹), 13개 정맥(正脈)의 체계로 되어 있고, 이러한 산경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선의 굵기 차이로 산맥의 규모를 표시했는데 제일 굵은 것은 대간, 2번째는 정맥, 3번째는 지맥, 기타는 골짜기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 등으로 나타냈다. 정맥과 정간의 차이는 산줄기를 따라 큰 강이 동반이 되느냐에 따라 강이 있으면 정맥, 없으면 정간이 되는데, 유일한 정간은 바로 오늘날의 함경산맥에 해당하는 장백정간(長白正幹)이다. 산맥을 대간·정간·정맥의 체계로 이해하는 전통적 산맥분류법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백두대간을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마천령·낭림·부전령·태백·소백 산맥을 모두 합친 산맥이 된다. 근대적 산맥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지질학자 고토[小藤文次郞]가 14개월 동안 한반도를 둘러보고 난 후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란 글에 한반도의 산맥을 발표한 데서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지질학적 관점에서 도출된 산맥이며, 해발고도라든가 교통·물자교류 등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산줄기의 존재에 대한 관점은 결여되어 있다. 산이 높고 봉우리가 조밀한 줄기가 산맥으로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산맥으로서 잘 드러나지 않는 낮은 구릉이 지질구조 때문에 산맥으로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 산맥의 연결성을 살피는 데는 전통적 산맥체계가 더 나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고유의 산에 대한 관념과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며, 두만강·압록강·한강·낙동강 등을 포함한 한반도의 많은 수계의 발원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 되는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이기도 하다.
산을 생명이 있는 나무에 비유하여 큰 줄기와 작은 가지를 나누어 국토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망하는 시각은 풍수적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풍수적 관점에서 한국 지기(地氣)의 발원처는 백두산이며, 백두대간을 타고 내린 기(氣)가 정맥을 타고 다시 나누어지고 각 정맥들에 맥을 댄 지맥들에 의해 바로 우리들의 삶이 어우러지는 마을과 도시로 지기가 전달된다. 그래서 전국토는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풍수의 기본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때 선승(禪僧)이며, 한반도 풍수지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도선국사(道詵國師)도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마치니 그 세는 수(水)를 근본으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이다"라고 하여 일찍이 백두대간을 국토의 뼈대로 파악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지질학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리고 외세에 의해 붙혀진 산맥 이름보다 백두대간적인 산맥 인식의 중요성은 그것이 국토의 고유성과 유구한 생명력, 사람과 자연의 일체화를 지향하는 유기체적 산맥관으로서, 우리의 지리관·산맥관에 뿌리를 댄 한국적 산맥론의 표상이다.
白頭山覲參記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쓴 백두산 기행문.
1926년 박한영(朴漢永)과 함께 조선교육회에서 주최하는 백두산 일대의 박물탐사단에 참가한 후 쓴 것으로, 〈동아일보〉에 1926년 7월 28일부터 1927년 1월 23일까지 총 89회에 걸쳐 연재된 것을 1927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권두에 `백두산근참기 권두'라는 장황한 머리말을 붙이고, '광명은 동방으로서'에서 '그래도 그리운 인간세계'에 이르는 40개의 항목을 탐사 순서에 따라 기술했다. 이 글은 동방문화의 중심이 조선의 단군시대의 무대인 백두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입장에서, 백두산을 '불함문화의 시원이요 동방원리(東方原理)의 권두언'이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 국토와 문화에 대한 찬탄과 긍지를 보여주는 '조선주의'(朝鮮主義)와 연결되었으나, 그 발상은 일본 우파의 민족주의사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고 있어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주장 이후 조선민족과 조선문화의 일본화 주장으로 이어졌다. 〈반순성기 半巡城記〉·〈교남홍조 嶠南鴻爪〉·〈풍악기유 楓岳記遊〉·〈심춘순례 尋春巡禮〉·〈금강예찬 金剛禮讚〉과 더불어 최남선의 중요한 기행문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백두산떡쑥류
白頭山 ―― 類
pussy-toes
국화과(菊花科 Asteraceae) 백두산떡쑥속(白頭山―屬 Antennaria)에 속하며 회백색 털이 덮인 낮게 자라는 식물.
남북아메리카, 유럽 북부, 아시아 등이 원산지이다. 일반적으로 줄기 밑 부분에 달리는 잎은 크며 줄기를 따라 올라갈수록 작아지고 그 수도 줄어든다. 몇몇 종류들은 두상(頭狀)꽃차례를 말려 쓰기 위해 심고 있는데 이 꽃차례가 고양이의 발을 닮아서 고양이발이라고 하며 이 꽃을 영구히 볼 수 있다 하여 '영구화'(everlasting)라고 부르기도 한다. 암석정원에서 기르는 종류도 약간 있다.
백두산떡쑥(A. dioica)은 흰색의 부드러운 털이 달리고 흰색부터 장미색을 띠는 작은 꽃이 피는 여러 재배 품종들이 있다. 왜백두산떡쑥(A. neodioica)을 포함한 일부 종(種)들은 수꽃이 드물다. 'ladies' tobacco'라고도 하는 질경이떡쑥(A. plantaginifolia)은 줄기 아래쪽에 달리는 잎이 더 길고 넓다.
우리나라에는 백두산떡쑥 한 종이 백두산의 건조한 풀밭에서 자라고 있다.
白頭山 ――
(Cervus elaphus xanthopygus)
소목(―目 Artiodactyla) 사슴과(―科 Cervidae)에 속하는 붉은사슴(red deer)의 한 아종(亞種).
붉은사슴은 유럽·북서아프리카·아시아에 분포하는데, 백두산사슴은 몽골·만주·시베리아의 온대 삼림지역에서 서식한다. 야행성이므로 낮에는 산림의 계곡에 숨어 있다가 저녁 때 나타나서 먹이를 찾는다. 털은 여름에는 적갈색이나 겨울에는 회갈색이 된다. 겨울에는 낮에도 무리를 형성하여 돌아다닌다. 뿔은 봄부터 자라기 시작하여 7월이면 피부(velvet)가 벗겨지며, 10월경에 암컷 집단이 형성되면서 교배를 하게 된다. 임신 기간은 225~270일이며, 5월경에 1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예전에 비해 수가 많이 줄었으며 보호를 받고 있다.
白頭山淸年線
총 연장 141.7㎞. 동해안지역인 길주를 기점으로 마천령산맥 남설령을 관통해 북동부 내륙지역인 재덕·합수·백암·운흥·보안을 거쳐 압록강변의 혜산까지 이른다. 양강도의 기본간선으로 고원지방의 임산자원과 지하자원을 개발하고 장차 만주 내부로 이어지는 하나의 큰 동맥을 이룰 목적으로 건설했다. 지선으로 백암과 혜산에서 백무선(白茂線:백암-무산, 187.4㎞)·삼지연선(三池淵線:혜산-삼지연, 56.2㎞)이 각각 갈라진다. 1929년 5월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항공사진 촬영에 의한 지형 측량을 실시해 철로에 응용함으로써 현지에서 선점(選點)실측을 하고 노선을 결정했다. 1931년 5월 1일 길주-수북 간을 제1공구로 착공해 1932년에 26.2㎞, 1933년 재덕-합수 간 31.0㎞, 1934년 합수-백암 간 12.8㎞, 1935년 백암-봉두리 간 29.7㎞, 1937년 봉두리-혜산 간 42.0㎞를 제15공구로 해 차례로 개통했다. 남설령(1,762m)에 긴 터널을 뚫었으며, 8·15해방 전까지 혜산선(惠山線)이라 부르다가 8·15해방 직후에 철도명을 개칭하고 철로개선작업을 해 혜산역에서 위연역까지 복선화했다. 또한 1978년에는 전구간을 전철화했다. 현재 양강도의 주요생산물인 임산자원·광석·목재가공품·감자·축산물 등이 해안지역으로 수송되며, 해안에서는 수산물·농산물·공업제품 등이 양강도에 수송된다. 그밖에 여객수송은 백두산 일대의 방문객이 대부분이다.
백두산은 환태평양 화산대의 일부분으로 화산 폭발 때 생긴 흰색 부석으로 인해 한꼭대기가 사시사철 희게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챵바이샨)이라 한다. 백두산 연평균기온은 -8도로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에 달한다. 항상 구름 속에 뒤덮여 잠깐씩 얼굴을 내비치는 푸르른 천지의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 없다. 따라서 6월초까지 눈이 덮여 있는 백두산 등정은 한여름 장마철보다는 6월 말- 7월 초, 8월말 - 9월초가 가장 적당한 시기이다. 한민족 발상지로 민족의 성산으로 숭배되는 우리 나라 최고봉인 백두산을 먼 타국 길 중국으로 돌아가서 보아야 하는 서글픔은 분단국 국민만이 느끼는 비애이다. 천지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통일 염원을 다짐하게 된다.
- [백두산의 역사]
백두산은 우리 민족을 비롯한 주변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숭배되어온 영산이다. 1597년 1668년 1702년의 화산분출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은 항상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청나라는 백두산을 조상의 발원지로서 장백신이라 봉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하였다. 봉금령 해제와 더불어 조선 이주자들이 크게 늘어나자 이를 염려한 청나라가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 분수령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러나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이 난해해 1883년 조선은 어윤중에게 정계비를 조사하게 했다. 이에 청나라는 '토문강'이 '두만강'이라 우기면서 백두산일대의 간도지역을 청나라 소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조선과 청나라 간의 영토분쟁이 발생하기에 이르렀고 양국간 해결 없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일전쟁후 일본은 1909년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는 대힌 조선과 문제가 된 간도땅을 청나라에 이양한다는 내용의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두만강이 중국과의 국경선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백두산은 현재까지도 중국과 북한의 영토로 양분되어 있는 상태이다.
- [드나들기]
1. 바이허(白河)는 백두산 입구 마을이다. 백두산으로의 첫 발걸음은 먼저 바이허로 들어오는 일부터 시작된다. 바이허는 얼따오바이허와 면해 있다. 숙박지나 백두산행 교통편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얼따오바이허로 나가는 것이 유리하다. 바이허에서 백두산 첫 관문이 산문(山門) 매표소까지는 자동차로 40분이 걸린다. 백두산 내의 교통편이 없음에 유의하여 미리 백두산 내 이동을 고려한 일정을 짜는 것이 효율적이다.
* 열차로 바이허(白河) 드나들기
백두산 아래 마지막 종착역 바이허역은 통화로부터 21:05-04:36, 08:45-17:16의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통화에서 지안 고구려 유적지를 다녀온 후 새벽 열차로 새벽 일찍 바이허에 도착하여 백두산을 등정하는 일정이 가장 보편적인 루트이다. 여름 철에는 열차표 구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반대로 아침 일찍 옌지를 출발해 백두산 등정을 마친 후 통화로 가는 열차편은 22:20-07:05, 06:48-15:17이다.
*. 버스로 바이허(白河) 드나들기
옌지 장거리 버스터미널에서 07:10, 10:10, 12:20에 출발하는 버스는 바이허까지 7시간이 소요된다. 4시간 떨어진 허롱에서는 08:30, 14:10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롱징에서는 06:30에 단 한차례 버스가 있는데 5시간 가량 걸린다. 바이허에서 옌지행은 06:50, 롱징, 허롱 훈츈행 첫차는 07:30에 있다.
2. 백두산 드나들기
*옌지(延吉)에서 들어가기
옌지 장거리 버스터미널에서 매일 한차례 05:00에 출발하는 버스는 장백폭포까지 7시간이 소요된다(¥55). 16:00에 옌지로 되 돌아간다. 옌지에서 택시나 지프를 대여할 경우 왕복 대여료는 하루 ¥1,500-2,000이다. 여행사에 의뢰할 경우 1박 2일 일정에 식사비가 포함되지 않은 가격이 ¥1,500-2,000이다.
*바이허(白河)에서 들어가기
아침 05:00-06:30 사이에 바이허역 숙박지 부근에서 장백폭포까지 운행하는 미니버스와 지프의 왕복 요금은 ¥50이다. 백두산에서 바이허로 나오는 출발시간은 버스마다 다르므로 미리 운전사에게 확인하도록 한다. 바이허에서 백두산까지의 지프 하루 대여료는 7,8월 성수기에 한해 ¥500-600이다.
*얼따오바이허(二道白河)에서 들어가기
지프 대여비는 하루 ¥300-400이다. 바이허(白河)보다 저렴한 반면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얼따오바이허 장거리 버스 터미널에서 아침 05:00-06:00 사이에 장백폭포까지 출발하는 미니버스가 운행된다.
- [백두산 방향잡기]
1.산문 매표소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차에서 내려 왼쪽 매표소에 여권을 제시한다. 보혐료 ¥5와 입장권 ¥120(중국인, 유학생 ¥15)을 구입하여 長白山 이라 쓰인 정문 우측안으로 들어간다. 관리인의 표 검사가 끝나면 정문 안쪽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자신이 타고온 차에 승차한다. 단체관광객도 차에서 내린 후 정문을 통과하는 것이 관례이다.
2.삼거리
세 갈래 갈림길로서 천지 입구는 좌측이며 우측은 장백폭포로 가는 길이다. 천문봉을 지프로 오를 경우 이곳에서 하차한후 천지 입구 우측 매표소에 지프 사용료를 먼저 지불해야 한다. 8명 기준인 지프 한 대 사용료는 ¥400-450이다. 반드시 백두산 관리소측에서 운영하는 전용지프를 이용해야 한다.
3. 기상대
지프의 종착지로 이곳에서 보이는 가파른 언덕이 천문봉이다. 걸어서 약 5분이면 백두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7,8월 성수기의 지프는 30분 후에 하산한다.
4.천문봉
백두산 16개 봉우리 중 하나로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5.온천장
백두산 등정 후 휴식을 풀기 좋은 곳이다. 수건과 비누를 포함한 1인 요금은 ¥50이다. 여러차례 보수를 해 시설은 양호한 편이다.
6.폭포 주차장
주차장이므로 일단 하차하여 장백폭포까지 걸어가야 한다. 이곳에서 도보로 10분거리인 폭포 입구까지 운행하는 지프료는 1인 ¥10이다.
7.폭포 매표소
장백폭포 입장료는 ¥20이다. 이 근처에서 판매되는 온천물에 삶은 계란은 3개에 ¥10이다.
8.등정 매표소
장백폭포에서 천지로 직접 올라가는 등정입구로서 입장료는¥26이다. 매표소 옆의 등정 계단은 상당히 가파르다.
- [백두산 등정코스]
백두산 등정 코스는 개인 성향에 따라 각양 각색이다. 자신에게 알맞는 합리적 코스 선정으로 여정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 전문 트래킹코스
장백폭포 → 천지 → 천문봉 → 흑풍구 →고래등 →원시림 → 사스래폭포 → 온천장으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약 6시간이 소요되며 백두산 내에서 1박하여야 한다. 등산 전문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코스이다.
2.일부 트래킹 코스
삼거리에서 지프로 천문봉으로 올라간 후 하산시 도보로 천지, 장백폭포를 거쳐 온천장으로 내려오는 일정이다. 등산만 3-4시간이 소요된다. 반대 코스로 장백폭포에서 천문봉으로 올라간 후 지프로 하산할 수 있다. 개인 여행자들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코스이다.
3. 천지 트래킹 코스
천문봉 고나광은 지프를 이용하고 장백폭포에서 천지만 왕복 등, 하산하는 코스이다. 등산시간은 2시간 30분이다. 천문봉에서 천지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코스도 가능하다. 바쁜 일정에 적합한 코스이다.
4. NO 트래킹코스
전일정을 차로만 움직이고 폭포주차장에서 장백폭포까지만 걷는 코스이다. 전 일정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단체관광코스로 주로 애용된다.
- [볼거리]
1. 천지(天地 톈츠)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구호로 해발 2,155m 높이의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있다. 평균수심 204m, 최고수심 373m 이며 남북 길이 4.86km, 동서길이 3.35km 이다. 천지에 담긴 물의 용량은 무려 40억t에 이른다. 매년 1,400mm 의 강수량과 지하 온천수, 눈이 녹은 물이 수원을 공급하고 있다. 잉어를 비롯한 몇 종류의 어종이 서식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 호수로서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2. 장백폭포(챵바이푸뿌)
높이 68m의 폭포로 천지의 달문을 통해 1km 정도 흘러내린 물이 절벽에서 갑자기 수직으로 낙하된다. 2.5m의 폭포 폭은 두갈래로 나뉘어 있다. 동쪽 폭포 수량이 전체 수량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3. 16개 백두산 봉우리
백두산 천지 주변은 16개의 봉우리로 둘러 싸여 있다. 가장 높은 주봉은 2,750m의 백두봉으로 북한측에 위치하고 있다. 주요 봉우리는 향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제비봉, 천문봉이다. 천문봉 좌측 장군봉에는 북한에서 설치한 케이블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16개의 봉우리는 중국측에 6개 북한측에 7개가 있다.나머지 3개의 봉우리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
4. 소천지(小天地 tidhxPscm)
장백폭포 하류 3km 지점에 위치한 자그마한 2개의 호수로 주변이 벚나무에 둘러싸여 고요하기 그지없다. 두 호수의 크기는 비슷하다. 둘레 260m이며 수심은 10m 이다.
5. 백두산 온천
장백폭포 근처에는 최고수온 82도, 최저수온 37도의 고열온천군이 자리잡고 있다. 다량의 무기질과 유화수소를 함유한 백두산 온천수는 피부병과 고나절염에 효과가 있다. 뜨거운 온천수에 삶은 달걀은 일반 달걀과는 달리 노른자부터 익는 것이 특징이다.
6. 국제자연보호구
백두산은 자연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된 지역으로 1980년 유네스코에 의해 '백두산 국제자연보호구'로 지정되었다. 백두산에는 173종의 조류와 동북호랑이, 반달곰, 담비등의 300여종의 각종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는 미인송을 비롯해 주목과 들메나무 등 희귀 나무류와 산삼, 영지 등 불로초로 불리는 한약재들이 번식하고 있다. 백두산 고도에 따라 침엽활엽수대 → 침엽수대→사스레나무수대 →고산수대로 뚜렷이 분포된 초목의 생태변화를 살펴보는 일도 매우 흥미롭다.
- [숙박]
1.얼따오바이허(二道白河)에서의 숙박
얼따오바이허(二道白河)는 옌지나 바이허(白河)행 버스 출발지이므로 백두산 등정 후 이튿날 새벽에 옌지로 떠나기 좋은 곳이다. 바이허역에서 오토바이 삼륜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얼따오바이허 시내 중심의 미인송빈관(美人松賓館메이런쏭삔관)은 부근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2인실이 ¥280이다(TEL 571-8595). 가격이 저렴한 숙소로는 얼따오바이허 시장 앞에 있는 연길여관(옌지뤼관) 이다. 버스터미널 옆에 있으며 3-5인실이 1인당 ¥20이다. 식사는 한끼당 ¥10이며 공동 샤워장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TEL 571-3880)
2.바이허(白河)에서의 숙박
역이 있는 바이허는 열차를 타기 편한 곳으로 역 주변에 간이숙소들이 많이 몰려 있다.바이허역을 나서면서 좌측의 가장 좋은 호텔로는 미인송을 둘러싸인 백설빈관(白雪賓館바이쉬에삔관)을 꼽을 수 있다. 정갈한 2인실 객실이 ¥344이다. (TEL 571-2545. FAX 571-5158)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으로는 규모가 작은 조선여관(챠오셴뤼관) 이다. 온돌방 1인당 요금은 ¥15, 식사는 ¥5이다.(TEL 571-2534). 바이허역을 나와 우측 길 건너에 있는 봉화호텔의 2인실은 ¥200이다.(TEL571-3677)
3. 산문 근처의 숙박
산문지역 호텔들은 단체 여행객들이 편히하게 묵어 갈수 있는 곳으로 여름철이면 방잡기가 상당히 힘들다. 산문지역에서 비교적 시설 좋은 천지호텔(天地賓館 톈츠삔관) 3인실은 ¥600, 2인실은 ¥500이다(tel 255-0255). 옆의 비호산장은 2인실 ¥460, 3인실 ¥600이다. (tel 571-8740). 건물이 여러 동으로 나뉘어 있는 백산호텔(바이샨따쥬띠엔)은 2인실 ¥440, 3인실 ¥560이다. 온돌방이 갖추어져 있는 삼신별장은 2인실 ¥440, 3인실 ¥500으로 종업원들이 친절한 곳이다(TEL 574-2058)
4.장백폭포 근처의 숙박
백두산 도보 등정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백폭포 근처 호텔 시설은 상당히 낙후되어 있으나 백두산 천지 아래의 숙박은 뜻깊은 일이다. 비교적 시설 좋은 두견산장의 2인실은 ¥515, 3인실은 ¥665이다 (TEL 571-2574), 근처의 악화빈관(岳樺賓館위에화삔관)은 2인실이 ¥500, 3인실 ¥650이다(TEL 571-1578). 또한 온천장 주차장 근처에 야영가능한 텐트촌이 운영되고 있으나 변동이 심하므로 출국전 미리 확인한후 준비하도록 한다(서울 동부고속관광 TEL(02)754-6044)
- [식사]
백두산 내에는 전문식당이 없으므로 장백폭포 근처나 산문, 바이허(白河) 호텔 내 중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바이허역 앞에는 소규모의 한식당이 몇 개 있다. 비교적 맛있는 곳으로 봉화호텔 1층 식당을 들 수 있다 (TEL 571-3677) 주변의 또다른 한식당으로는 현대식당, 고려식당, 조선족 반점이 있으며 식사 한끼에 ¥10-20이다.
- [쇼핑]
쇼핑센터는 산문지역과 장백폭포 입구에 있다. 백두산 관광 기념품으로는 티셔츠(¥100에 10-15장), 엽서(¥10-20), 백두산 컬러화보 책자, 배지, 모자 등이 살 만하다. 백두산 천지나 장백폭포 입구에는 백두산 돌이라며 보석처럼 빛나는 화산석을 들고 나오는 잡상인들이 많은데 모두 가짜이다. 얼따오바이허(二道白河) 관광식당 앞 여기 산에서 재배한 산삼이나 영지버섯, 참깨 산나물 등을 파는 현지 잡상인들이 많다. 가격은 70%까지 할인할 수 있으며 국산 우산이나 옷, 가방과의 물물교환도 성사된다.
한채 한채 질서정연하게 일떠선 정결하고도 우아한 붉은벽돌,푸른기와집들이 닭무리속에 서있는 학처럼 머리를 쳐들고 거연히 서있는데 이것은 변방 모 퇀 1련의 병영이다.멀지 않은 곳에 망원대가 위엄있게 구름속을 꿰뚫고 서있는데 이 망원대에 오르면 먼곳으로 안개가 자오록한 일본해가 하늘가에 닿아있고 가까운 곳으로는 중국,조선,로씨야 삼국의 경치가 한눈에 안겨온다.방천의 좌측은 로씨야의 국경도시 뽀드고르나야,우측은 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두만강시와 잇닿아있다.방천의 군민은 자호감을 품고 이렇게말한다.이곳에서는 눈앞에서 삼국접경의 산천풍모를 볼수 있고 세 나라의 닭과 개의 울음소리를 들을수 있다.
그렇다,여기에서는 확실히 다른 나라의산천경개도 흔상할수 있다.
돈화시 대산취자진의 동쪽에 삼면이 물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어촌이 있는데 이를 소산취자촌이라 한다.촌은 산을 의지하여 자리잡고있는데 옆에는 물을 끼고있으며 서남쪽은 목단강이 있고 동쪽은 안명호가 있다.근년래 휴가촌을 새로 세웠는데 매년 방방곡곡에서 오는 손님들을 수없이 접대하고있다.
소산취자촌풍경은 수려하여 남국수향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있을뿐만아니라 북방의 호방한 특징도 소유하고있다.관광객들은 여기에서 등산이거나 낚시질을 할수 있으며 배놀이도 하고 헤염도 칠수 있다.게다가 배를 타고 이웃에 있는 풍경구인 경박호풍경구에까지 갈수 있다.
웅위한 수류봉이 경신평원의 동남단에 거연히 솟아있다.수류봉은 이 부근 산들중에서 가장 높은 전략요새지이다.
여름날,날이 개이기 시작할 때 수류봉꼭대기에 올라서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한없이 상쾌할것이다.남쪽일본해에서 불어오는 안개는 마치 따뜻하고 부드럽고 바람에 날리는 연사처럼 가볍게 발밑으로 스쳐지나갈것이고 먼곳의 산봉우리는 때론 사라졌다가도 나타났다 하는데 마치 선산경각과도 같아 정말로 선경에 들어선듯한감을 줄것이다.내려다보이는 광활한 경신평원은 마치 보송보송한 록색담요와 같고 서쪽에서 흐르는 두만강은 은띠와 같고 아홉개의 큰 못은 아홉개의 반짝이는 진주와 같아 사람을경탄케 한다.
관광객들을 순조롭게 산꼭대기에 올라 이 아름다운 경치를 흔상하게 하기 위하여 이곳에 주둔하고있는 변방전사들은 완강한 의력으로 하나하나의 돌로 층계를 쌓아 한갈래 견고한 변방요새에 장성을 쌓았다.
숭선은 화룡시 남부 변경지대에 위치하고있다.숭선에는 저명한 군함산이 있어 절벽이 험악하고 나무가 무성하며 산에 핀 꽃은 탐스럽고 아름답다.군함산아래는 맑고도 투명한 두만강이 흐르는데 맑은 물에서 고기가 노니는것을 볼수 있다.강가에서 물고기를 낚아 강물로 끓여낸 물고기국은 실로 감칠맛을 돋구는 한끼의 푸짐한 들놀이음식으로서 특별한 정취를 풍긴다.해마다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면 여기로 관광이거나 들놀이를 오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여든다.
숭선의 풍경이 아름답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숭선의 산수는 천하에 드물다고 한다.이것은 비록 과장된 말이지만 확실히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과도 같아 왔던 사람들은 돌아가기 아쉬워한다.국가의 저명한 미술학원에서는 해마다 학생들을 여기에 보내여 회화를 사생한다.두만강기슭에서 숭선의 풍경은 제일 전형적이고도 독특하여 변강풍경뿐만아니라 이국풍모와 민속풍경을 이곳에서 어렵지 않게 엿볼수 있다.
흑풍구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흑석아래에는 여라문곳에서 뜨거운 약수가 솟아나오는데 어떤 곳은 사발만큼 크고,어떤 곳은 가는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있는데 이것이 지면우에 분포되여있는 천여평방메터의 온천무리들이다.온천은 오색찬란한 빛을 뿌리고 또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열기를 발산하고있는데 관광객들의 특별한 눈길을 모으고있다.특히 겨울이면 그 둘레가 소복단장을 한 빙설천지이지만 온천두리에서는 도리여 열기가 차넘치고 뽀얀 안개가 서서히 피여올라 참말로 독특한 경치를 이루고있다.
온천은 온도가 60도-70도이상이며 어떤 때에는 82도에까지 달하여 닭알을 넣으면 인차 익혀먹을수 있는 고온온천으로 되고있다.
온천은 신비로운 샘물이라고 불리우는데 근육을 느슨히 하고 피의 활력을 증강시켜 한기를 몰아내고 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효과가 뚜렷하다.지금 온천에는 여러곳에 욕실을 세워 관광객들이 사용하고 있다.
온천부근에는 또 장백약수샘이라는 광물질샘물이 있어 위병,만성관심병에 현저한 치료효과가 있다.광물질샘물을 마시면 마치 구미에 맞는 얼음에 랭각시킨 청량음료를 마시는것과 같아 소화를 돕고 비장을 튼튼히 하며 열을 제거하고 더위를 몰아내기에 사람들은 <<천연사이다>>라고 한다.
하늘공중에서 쏟아져내리는 장백폭포는 그 거창한 폭음이 산골짜기를 진감하면서 흰 물보라를 사방에 흩날리는데 물보라에 실려 반공중에 걸려있는 칠색무지개와 백룡이 날아내리는듯한 경상을 볼 때 <<삼천척을 곧추 날아내리니 구천에서 은하가 떨어지는가 의심했노라>>는 저명한 시구를 련상하게 된다.
장백폭포는 천지북쪽 1250메터의 낭떨러지에 위치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해발높이가 가장 높은 폭포로서 락차가 68메터이며 폭포 밑면에 12메터 가까운 깊이의 못이 이루어져있다.천지는 뭇산봉우리들로 둘러싸였는데 다만 북쪽 측면에 터진 구멍이 있어 <<벌문(출구)>>이라고 한다.
천지의 물은 여기로부터 산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데 이 한구간이 산이 높고 경사가 가파로와 쏟아져 흐르는 물이 마치도 비스듬히 세워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보는것 같다.이리하여 사람들은 이 사다리처럼 내리꼰지는 폭포를 <<천하>> 혹은 <<통천하(하늘로 통하는 강)>> 라고 한다.통천하는 1250메터의 기나긴 흐름을 거쳐 깎아지른듯한 낭떠러지에서 돌연히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그 방대한 기세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몇리밖에까지 들리고있다.멀리에서 바라보면 툭하고 약한 두갈래의 폭포가 마치 구중천으로 날아오르려는한쌍의 은백색 룡을 방불케 하고 도도한 은하가 인간세상에 쏟아지는듯하다.홀연 나타났다가도 사라져가는 비할바없이 아름다운 칠색무지개를 보고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천지는 장배산에서 가장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는 풍경명승지이다.거울같은 천지높이 산꼭대기에 반듯하게 놓여있는데 그 둘레에는 여러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천지늪에서 설레이는 푸른 파도는 해볕에 반짝반짝 빛나고 그 물은 투명하다.흐렸다가도 개이고 또 맑은 날씨에도 불시로 흐리며 비가 억수로 퍼부어 그 변덕스러운 조화를 가늠키 어려우며 춘하추동 사시절 종잡기 어려운 기이한 변화를 볼수 있다.
백두산천지는 화산이 분출되여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화산분출구호수이며 중조 두 나라 국계의 호수로서 송화강,두만강,압록강의 발원지이다.호수의 높이는 해발 2194메터이고 제일 깊은 곳은 373메터로서 우리 나라에서 제일 깊은 호수이다.
천지에는 약 20억립방메터의 물이 잠겨있어 하나의 거대한 천연적인 물저장고이다.천지는 외롭게 고공에 달려있고 또 물의 출구가 호수밖에 있으므로 사람들에게는 갑절 신비롭게 느껴진다.그렇다면 천지의 물은 구경 어디에서 오는가?천지의 물은 주요하게 비물과 눈물 그리고 지하에서 솟아나오는 샘물로 이루어진다.
천지의 바닥이 돌로 이루어져 호수의 물은 맑고도 깨끗하고 투명하여 마치 백옥과 같고 또 거울과도 흡사하다.산봉우리들이 물에 거꾸로 비쳐 마치 곳곳마다 기암괴석이 있고 거울속에 하늘이 있는것처럼 청아하고 아름답다.
신기하고 기이한 장백산은 <<천연적인 비밀>>을 간직하고 <<만고의 령물>>을 지니고있어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있다.천지물 수면에 간혹 나타나는 괴물을 보기만 하면 놀라움과 흥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괴물에 대한 전설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봉천통지>>,<<무송현지>>에 모두 그 기재가 있다.1980년이래로 많은 관광객들이 친히 괴물을 목격하여의론이 분분하였다.어떤 사람들은 <<머리는 대개 사람머리만큼 크고 눈은 밤알만한데 둥글고 입이 앞으로 쀼죽하게 나왔고 목과 몸덩이가 접한부분에 한갈래 백색 고리무늬가 있다.털은 반질반질 윤기가 나 바다표범가죽 같다.그러나 꽃무늬가 없고 회백색이다.이 괴물의 머리와 목이 물밖으로 나온외 잔등의 한 부분이 또 물밖으로 로출되였었는데 추측컨대 몸전체의 크기가 소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천지괴물의 출현은 마치 <<비행접시>>,<<야생인>>을 발견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한시기 보도분야의 신기한 특대뉴스로 되여 사람들이 거리에서나 혹은 모여앉으면 의론하는 화제로 되였다.비록 천지괴물이 지금까지도 풀수 없는 수수께끼로 되고있지만 그 존재는 의심할나위가 없는것이다.오래지 않아 이 괴물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자연의 신비한 비밀을 탐지하게끔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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