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韓食) 세계화 꿈꾸는 조태권 광주요 회장 “한 상 떡하니 차려내니 세계 부호들이 까무러칩디다”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
한국인은 유독 집에서 먹는 밥을 좋아한다. 왕족 부럽지 않을 진수성찬이라도 ‘집밥’만 못하다고들 한다. 정말 군침 도는 맛인 ‘손맛’과 ‘옛 맛’은 집밥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 한데 우리는 이 맛을 지키는 데 소홀했다. 식당들의 저가 및 원조(元祖) 경쟁 속에 ‘한식=서민 음식’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그런데 여기 ‘한식의 고급화’를 주장하는 이가 있다. 탁월한 한국의 맛을 잘 포장하면 연 7% 경제성장도 문제없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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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식 백반’이란 메뉴가 있다. 밖에서 밥을 먹을 때 나는 엔간하면 그 가정식 백반을 선택한다. ‘가정식’이라는 말에 꼼짝없이 이끌리는 탓이지만 가정식이 실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그 가정식일 리 없다. 어머니의 ‘손맛’이라 일컬어지던 그 맛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내 손이 마땅히 이어받았어야 할 그 맛들을 우리 세대는 서양식 공부를 한답시고 다 놓쳐버렸다.
식당에서 먹는 음식들은 모조리 짜거나 맵거나 달다. 슴슴하거나 아릿하거나 향긋하거나 구수한 깊은 맛들, 그 유현하고 격조 높던 옛 맛들은 암만 찾아봐도 없어 어머니 돌아가신 지금 어딜 가서 맛볼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집엔 분명 우리집만의 음식이 있었다. 무를 살짝 익혀서 참기름에 무쳐내는 ‘익지’와 거기 꿀까지 넣은 ‘약지’와 찹쌀을 쪄내서 삭히는 ‘점주’라는 음료와 콩가루 묻힌 마늘잎을 쪄서 무치는 부드럽고 구수한 계절 반찬이 숱했더랬다.
특히 내가 잊지 못하는 건 종류가 다양하기 짝이 없던 장들이다. 메줏가루에 고춧잎과 고추무거리를 넣고 부뚜막에 올려 잠깐 익혀 먹던 ‘즙장’과 거칠거칠한 질감이 입안의 미각돌기를 희한하게 자극하던 ‘겨장’과 초봄 천지에 꽃잎이 흩날리고 햇살이 제법 따가워질 무렵 하늘이 비치는 장단지에서 메주를 건져 노란 속을 파내 푸른 움파를 다져 넣어 먹던 ‘햇장’을 잊지 못한다. 싱그럽고도 청량하게 입안을 감돌던 그 내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새봄의 향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 어디에도 그런 즙장과 겨장과 햇장은 없다. 있기만 하다면 기꺼이 비싼 값을 치를 용의가 있다. 그게 단지 어린 시절 먹고 자란 향수식품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절대기준의 맛을 가진 것인지가 나로서는 아리송하다. 다만 한식이 이탈리아, 프랑스, 중국, 태국에 전혀 뒤질 리 없는 세계적 음식이 될 자질(?)을 갖췄다는 믿음만은 확고하다. 화식이다, 사천식이다 북경식이다, 지중해식이다, 암만 소문난 요리상을 받아도 격식에 맞게 무친 산나물이나 하늘이 비치던 장항아리에서 간 뜬 ‘햇장’만큼 가슴 깊은 흥취가 일었던 적은 적다.
조태권(趙太權·60) 광주요 회장에게 관심이 끌린 것은 그런 이유였다. 집집마다 숨어 있는 한식 조리법을 찾아내 고급화하고 그걸 세계 시장에 최고로 비싼 값에 내다팔아야 하며 음식이야말로 그 나라 문화의 총체이자 정수라는 그의 주장은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만나지 않고도 그에게 동감하고 지지했다. 자신의 성북동 집을 열어 최고급 한식을 조리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먹인다는 소문은 10여 년 전부터 듣고 있었다. 그는 세계 초일류들과 어울리던 사람이고 최고로 호사하는 의식주를 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 멋과 품격을 진작에 체득한 사람이렷다.
거기다 사업가적 마인드로 명품의 존재의의와 가치를 꿰뚫어 산업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알며 21세기엔 문화를 팔아먹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미래예측력까지 가진 사람이라니 어찌 솔깃하지 않으랴. 한식당 ‘가온’에서 그를 만났고 광주요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고 어떤 파티석상에서 좌중을 압도하며 껄껄 웃어대는 그를 봤다.
“식품산업 하나만 잘해도…”
경상도 악센트가 살짝 섞인 듯도 하지만 그의 말씨와 태도는 당당하고 열정적이고 확신에 찬 국제인의 이미지가 짙다. 한식 세계화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하면 두 시간 정도 쏟아져 나오는 아이디어와 계획과 이론과 경험이 그야말로 장강만리다. 그 에너지와 열기가 옆에 앉은 사람의 가슴까지 덩달아 뛰게 만든다.
“한식 세계화에만 성공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들고 나온 연 7% 성장, 그거 문제없어요. 식품산업은 미래에 더욱 엄청난 규모로 커집니다. 2006년 기준으로 세계 철강시장 규모가 650조원이고 자동차가 1320조원이고 IT가 2750조원이에요. 그런데 식품산업은 4800조원이라고요. 2010년이 되면 이 시장은 1만조원 규모로 커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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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의 홍계탕(위)과 마두부찜.
앞으로 유망한 산업이 뭐가 있겠습니까. 모방 아닌 산업은 관광밖에 없거든요. 중산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2020년이면 인도, 중국이 커져 세계의 중산층이 20억명이 생기게 됩니다. 20억의 반만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건 엄청난 일이야. 교통, 숙박, 음식, 관광, 볼거리, 먹을거리, 잘 거리, 다닐 거리, 이게 바로 문화거든요.
이 네 개 중 교통과 잠은 이 땅 안에서만 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만 음식은 바깥에 나가서 팔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걸 우리 아이디어로 만들어야지. 10억명이 1년에 한 번만 한식을 먹는다고 칩시다. 20달러짜리 한 번 먹으면 200억달러죠. 두 번 먹으면 400억달러 아닙니까. 어디 그뿐이겠어요? 식품산업은 기하학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시장입니다. 우리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앞으로 식품산업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만의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 이런 것을 들고 세계로 가는 거죠.
그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면 또 뭐가 따라오느냐. 원산지에 가서 그것을 직접 먹어보겠다는 관광객. 그들이 우리나라로 몰려옵니다. 우리나라 국토 70%가 산 아닙니까. 각종 산나물, 버섯, 고랭지 채소 얼마나 많고 얼마나 맛있습니까. 산을 경작해 고랭지 채소들 심고 버섯 심고, 머루·오디·복분자 단지를 만들고, 그게 꽃피면 꽃구경 하고, 열매 따서 술 담그고 저장고 만들고, 실버타운 만들고, 뱃길로 그런 단지를 돌아다니며 관광하게 만드는 겁니다. 식품산업 하나만 잘하면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요. 너무 아름다운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다고요. 그렇게 우리나라 미래를 구상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라면 나는 운하도 반대하지 않겠어요.”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야 하고 산과 강을 무리하게 파헤쳐야 하는 운하 건설을 나는 결단코 반대하지만 조 회장이 꾸는 꿈엔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미래 한국의 청사진이 음식산업을 중심으로 전국토를 새롭게 물들이면서 펼쳐질 수도 있구나! 더구나 조 회장이 주장하는 한식 세계화 계획은 한 끼 20달러짜리 식사가 아니다. 한 끼에 적어도 100달러짜리는 되는 최고급 한식을 팔아야 한다는 거다.
한 끼 270만원짜리 한식 만찬
우린 집집마다 즐비하게 장독을 늘어놓고 살던 민족이다. 장독대란 게 뭔가. 소금 대신 간을 하는 기본양념 저장고다. 온갖 발효식품이 철마다 지방마다 집안마다 다르게 밥상 위에 오르던, 예민한 혀를 가졌던 사람들이다.
밖에서 밥을 사먹는 일이 점점 일반화하고 있다. 밖에서 먹는 밥이 집에서 먹는 밥과 같기를 원해서 나온 게 바로 서두에 말한 가정식 백반일 것이다. 그 이름은 여타의 메뉴들이 이미 어머니 솜씨와는 다른 ‘식당’ 메뉴라는 선언이 내포된 이름이고 어쩌면 우리 식당들이 가정 아닌 ‘영업용 음식’을 따로 만들어 팔고 있다는 고백을 담고 있기도 하다.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문화가 중시될수록 음식엔 품격이 요구된다. 게다가 전래한 우리 것을 잘만 가꾸면 그게 산업이 되어 미래 나라살림을 살찌울 뿌리가 돼줄 수도 있다고? 조 회장의 얘기를 들을수록 그 가능성은 커 보인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맛이 아니라 포장이에요. 음식이란 한번 고급으로 각인되면 영원히 그 수준을 유지하는 겁니다. 담는 그릇과 테이블과 세팅과 꽃과 식탁 위의 모든 소품과 그 방의 분위기와 거기에 참석한 손님, 음악, 술, 이 모든 게 음식을 포장하는 것들이죠.
일본의 스시(초밥). 그것도 원래는 고급 음식이 아니었어요. 1800년대 말 뱃사람들이 생선을 잡아 안 썩게 하려고 소금에 절였다가 밥하고만 먹었던 게 스시예요. 그런데 일본인들은 스시를 일본의 최고 음식으로 격상시켰거든요. 식당 건물도 최고급 자재로 짓고 그릇도 꽃도 최고급을 사용하고 여직원들 기모노도 최고로 입히고, 물론 서비스도 최상으로 갔죠.
음식에 가치를 부여해서 성공한 거죠. 우리는 음식문화 하면 만날 삼겹살 같은 것만 언급하며 서민생활과 대중의 미덕을 강조하죠. 그렇게 해선 백날 가난밖에 물려줄 게 없어요. 세계적인 술이 있는 나라들을 보세요. 다 선진국입니다. 음식이 발전하면 정치, 문화, 경제가 골고루 발전하게 돼 있어요. 우리처럼 불균형한 나라는 없어요. 우리도 세계로 나아가려면 각 분야의 문화가 골고루 한 단계 올라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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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해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포도밭 동네인 나파밸리에서 세계 부호들이 주목할 만한 화려한 잔치를 벌였다. 전적으로 개인의 주머니를 털어서 벌인 일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밭 주인과 와인 제조업자와 음식담당 기자 60여 명을 초대해서 최고의 한식을 대접했다. 한식이 얼마나 고급한 음식인지를 세계인의 눈앞에 내놓고 싶었다.
비행기에 광주요에서 정성들여 구워낸 청자접시, 백자사발, 백자 사각 테이블 매트, 불고기 내열 자기, 사단 찬합, 밥그릇, 국그릇 등 식기로 사용할 도자기 1000여 점을 따로 실었다. 홍삼 달인 물 5ℓ, 닭 육수 15ℓ, 생선회에 낼 초고추장 2ℓ, 간장 3ℓ, 후식으로 낼 밤초· 대추초, 약초에 꿀을 넣고 60시간 달인 약차도 실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고급 한식당 가온의 요리사 6명을 함께 데려갔다. 저녁 한 끼 행사의 경비만 총 1억6000만원. 60인분이었으니 1인당 270만원짜리 식사였다.
와인과 초고추장이 만나다
나파밸리는 와인 생산량으로 볼 때 21세기 전세계 식문화의 중심지가 될 곳이었다. 그게 그의 예견이었다.
“와인이 있는 곳엔 전세계 음식이 다 들어가게 돼 있어요. 한 병에 수백달러짜리 고급 와인을 마시는 건 세계의 부호들이죠. 그들끼리는 서로 다 친하고 통한다고요.”
고급 와인을 마시는, 세계 외식산업을 이끌어가는 부호들이 나파밸리에 모여들었다. 먼저 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래야 우리 음식이 세계 최고의 음식이 될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 부호들의 까다로운 혀가 한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테스트하고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다들 까무라쳤다. “원더풀, 판타스틱!”이 쏟아졌다.
“심지어는 와인이 초고추장과 절묘하게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2년 전 나파밸리에서 할란(Harlan) 와인을 만드는 빌 할란씨를 만났어요. 그 집에 초청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2년 뒤엔 한식을 가져와서 맛보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작년에 그 약속을 지킨 겁니다.”
제대로 된 한식 메뉴를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하고 식탁 꾸밈을 모색하고 레시피를 만들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그릇을 굽고 어울리는 장식을 찾는 연구들, 한국 문화의 총체이자 정수를 보여줄 식탁을 차리는 작업에 꼬박 2년이 걸린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한국을 발견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따라간 우리 기자들도 놀랐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전혀 겪어보지 못한 한식을 제공했거든요. 오페라 보러 가기 전에 절대 한식 못 먹잖아요, 냄새나서. 그 한식이 너무나 우아하게 변신해서 돌아오니까 다들 신선한 충격을 받더라고요. 이것이 한식이구나 하는 흥분, 그 흥분이 매스미디어로 전달됐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 끼에 수백만원짜리가 말이 되느냐고 하지만 우리가 5000만명을 위한 식문화를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2020년 10억명이 넘는 엄청난 시장을 보고 나가는 거 아닙니까. 세계는 초스피드로 변하고 있어요. 뒤만 돌아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한식은 왜 비싸면 안 됩니까. 일식에 거리낌없이 15만원을 투자하고 100만원 넘는 와인을 마시고 발렌타인 30년산을 거침없이 따는 사람들이 한식은 10만원만 넘으면 비싸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20년 동안 모은 전 재산을 식문화 개혁에 바쳤다. 지금까지 투자한 돈만도 500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후회는커녕 미래를 꿈꿀 수 있어 언제나 가슴이 뛴다.
그가 벌인 사업은 대개 이렇다. 선친 타계 후 물려받은 전통 도자기 ‘광주요’, 일상에서 사용하기 좋게 만든 생활자기 ‘아올다’, 고품격 공간을 만들어주는 벽지 ‘자비화’, 최상의 식재료와 손맛으로 의식동원(醫食同源) 사상을 실현하는 고급 한식당 ‘가온’, 한식의 대중화를 도모하는 ‘녹녹’, 우리 술과 음식이 어우러지는 한식요리주점 ‘낙낙’, 전통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술회사 ‘화요(火堯)’….
음식과 그릇과 그림과 술을 함께 생산해 우리 문화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이지만(아직 별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세상은 생각이 다른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비난하는 사람도 꽤 있다. 정통 한식이 아니다, 족보에도 없다, 전통을 왜곡한다, 지나치게 귀족적이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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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을 ‘味盲’으로 만든 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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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친은 광주요를 창업해 우리 도자기를 되살려낸 조소수 선생이다. 조 회장은 1988년 가업을 잇기 위해 광주요를 맡았다.
“내가 하는 일은 사치를 위한 게 아닙니다. 제 나라 음식 꼭꼭 싸안고 있는 게 애국자입니까? 제 나라 음식에 비전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 나라를 끌고 갑니까. 나는 요새 조리 연구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얘기해요. ‘내가 당신들의 족쇄를 풀었소. 지금까지 당신들은 우리나라 안에서 나는 식재료를 가지고 만들어야 한식이라 했는데 이제 세계 모든 식재료를 쓸 수 있지 않소’라고!
앞으로 한식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질 겁니다. 음식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재료의 맛이 먼저고 다음이 양념과 향료와 테크닉이거든요. 우리의 탁월하고 다양한 양념, 젓갈류,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를 조금씩 섞어나가면 그게 다 우리 음식이 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먹는 부대찌개, 그게 소시지 넣는다고 서양 음식입니까? 우리 스타일로 우리 양념으로 만든 것은 우리 음식이에요. 결국 우리 국민이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렸어요.”
우리 음식은 비싸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은 왜 생긴 것일까. 거기에 대한 격정과 울분에 찬 이야기엔 조태권이 아니라면 하기 어려운 통찰과 조감이 있다. 나는 우리 어머니의 익지와 약지와 즙장과 햇장이 왜 영업용으로는 나오지 못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의문을 가진 적도 없이 다만 아쉬워만 했었다. 그런데 조 회장은 거기 대해 명쾌하게 대답할 줄 안다. 그는 대뜸 식당의 역사부터 들고 나왔다. 우리 음식에 대한 인식이 어째서 그렇게 비하되고 왜곡됐나를 되짚게 만드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음식 장사는 전쟁 후 한창 배고플 때 활기를 띠었단 말예요. 그건 단순히 생계유지 수단이었지 문화가 아니었어. ‘밥집’ 하면 저급한 직종으로 인식된 거지. 프랑스, 이탈리아의 호사스러운 귀족문화가 음식을 예술과 창조적 행위로 승화시킨 것과는 정반대 경로거든. 밥장사는 소규모 자본에 의한 단일품목 전문점이 주종을 이뤘고 그러자니 식당 간에 생존을 위한 경쟁이 심화됐고 자연 품질 경쟁이 아니라 가격 경쟁만이 치열해졌어. 반가(班家) 음식은 집안으로 다 숨어 들어가버리고 밖에는 생계유지용만 나온 겁니다.
나는 칼국수 잘한다, 파전 빈대떡 잘한다, 그러다보니 만날 원조가 나오는 거야. 원조 파전, 원조 족발…. 가치 경영을 해야 하는데 가격경쟁을 하다 보니 품질이 자꾸 떨어졌어요. 품질이 낮아지니 맛이 없을 수밖에 없고, 맛이 떨어지니 그걸 감추기 위해 강한 양념과 화학조미료를 사용할 수밖에 더 있어? 그런 가공된 맛의 악순환이 이제는 국민 전부를 미맹(味盲)으로 만들어버렸어. 뭐가 신선한지 뭐가 감칠맛인지 느낄 줄도 모르게 돼버렸다고.”
한편 고급 한정식은 개발연대에 일본식 요정문화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맛이 아니라 곁에 앉는 기생이 예쁘면 몰려갔으니 음식 내용이나 그릇이나 집 꾸밈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다.
“음식 장사는 점점 상놈이나 하는 거지 양반이 할 게 못되게 된 거지. 돈 있고 지위 있는 사람은 음식장사를 안 해. 게다가 니나노집 같은 아류문화로 왜곡되고 변질돼버렸으니 천대받을 수밖에 없지. 원래 전해오던 품격 있는 조리법과 상차림과 그릇과 접대예절의 전통은 사라지고 한국인의 의식주가 전반적으로 서구화, 저급화했어요. 그러니 음식에 대한 가치를 만들 수가 없었던 거죠.”
그런 지적은 참담했다. 국민 거의가 자극적인 맛을 찾는 미맹이 돼간다는 지적도 억울하고 분했다. 얼마나 예민한 혀를 가졌던 우리들인데!
가온에는 ‘홍계탕’이라는 30만원짜리 요리가 있다. 거기 얽힌 얘기를 듣자니 그 분함이 조금 눅었다. 홍계탕은 홍삼과 오골계를 넣고 오래 끓인 육수에 쌀을 넣고 우린 탕이다.
대기업 초청으로 두바이의 왕자들이 한국에 왔을 때 가온에서 만찬이 있었다. 조 회장이 그날 저녁 내놓은 것이 홍계탕이었다. 이튿날 이 왕자들은 그 음식을 한 번 더 먹고 싶다며 호텔 숙소로 다섯 그릇을 주문했다. 두바이 왕자들이 두 번째 한국에 왔을 때는 시간이 없어 미처 가온에 들르지 못하고 떠나게 됐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 그때 먹었던 홍계탕 열세 그릇을 자가용 비행기로 보내줄 수 없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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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탕에 반한 두바이 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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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은 “우리 문화의 정수를 담은 고급 한식당을 세계화하는 것이 최고의 창조경영”이라고 말한다.
“직원들이 공항으로 직접 배달해주고 음식값 390만원을 결제했어요. 슈퍼스타가 있어야 주연이 있고, 주연이 있어야 조연도 있습니다. 그 조연 속에서 다시 주연이 나오는 거고. 음식도 같은 이치입니다. 30만원짜리 홍계탕을 아무나 먹게 하자는 게 아니죠. 최고의 음식을 원하는 사람이 왔을 때 그 사람을 위한 음식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나중에 그런 인구가 20억이 될 때 한식이 줄곧 삼겹살만 고집해서야 되겠어요?
새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찾자는 것이다. 그는 틈나면 반가의 음식을 찾아다닌다. 물론 직접 만든다. 요리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다. 이런 감각은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더 큰 건 체험 덕분이다. 그는 진작부터 세계에서 좋다는 것은 다 먹고 다녔고 다 누려봤다. 젊어서 종사했던 일이 전세계 부호들과 어울려서 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집안이 부유했다. 선친은 그때 이미, ‘삐꾸’라는 별명의 뷰익 수입차를 타고 다니던 사업가였다. 조 회장은 6형제 중 막내였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 세상은 찬란하기만 했다. 그러나 영속되는 영화가 어디 있으랴. 경기중학교 2학년 때 5·16이 났다. 아버지는 부정축재자로 몰렸고 집안은 삽시간에 거덜이 났다. “아버님은 당시 ‘내쇼날’을 제일 먼저 갖고 들어온 분이었는데 있던 재산 다 없어지고 일본으로 가셨지. 그때부터 내가 문제아가 된 거예요. 공부 안 하고 건들거렸어. 철든 건 미국 가서지.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했더니 어머니가 5000달러를 주시더라고. 미국에서 형이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있었거든.
청송 외가댁에 가서 6개월 공부해 토플 시험을 쳤어요. 8월에 시험을 봤는데 12월에 유니버시티 오브 미주리에서 입학허가서가 날아왔어요. 그게 1970년인데, 일단 볼티모어로 가서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장장 28시간을 컬럼비아까지 달려가는데 와, 대단하데. 그때 미국 땅의 광활함을 처음 봤지. 고생 많이 했어요. 고생하면서 인간 됐지.”
웨이터 심부름꾼으로 출발
대학을 갔지만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엔 책을 무조건 외웠다. 비로소 공부에 맛을 들여 1년 만에 장학금을 받을 정도가 됐다. 집이 망했으니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운명이란 묘한 거다. 그가 음식 만드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계기는 이미 그때 만들어졌다.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니까 선배가 프랑스 식당을 소개해줘요. 버스보이를 하라는 거지. 버스보이는 웨이터의 심부름꾼이야. 웨이터가 월급 받으면 그중의 15%가량을 떼주게 돼 있어요. 버스보이 10년 해도 웨이터가 안 될 수도 있어요. 난 그 식당 베스트 버스보이였어. 냅킨 접기, 리넨 세탁, 접시 닦기 다 잘했어.”
홀리데이 인 프랑스 식당의 버스보이 조태권은 어느 날 미끄러운 식당바닥에서 수십개의 접시를 얹은 트레이를 들고 와장창 미끄러진다. 미끌어지면서 잠시 기절한다. 깨어나니 노조원들이 달려와 식당주인을 고발하라고 권했다.
“보상을 받으면 나눠 먹자는 거지. 난 멀쩡한데 고발할 수 없다고 버텼어.”
그 정직을 높이 산 주인은 다음해 전격적으로 이 귀족적인 동양청년에게 웨이터 노릇을 맡긴다. 웨이터는 식당일을 모조리 익힐 수 있다. 소스, 수프, 스테이크 만드는 법을 그때 다 배웠다.
웨이터로 석 달 일해 1500달러를 벌면 학교로 돌아가고, 방학이 되면 다시 웨이터가 되기를 반복했다. 친구들이 찾아와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게 아까워 일부러 밤낮을 바꿔가면서 공부했다. 처음엔 말도 서툴던 청년이 ‘유니버시티 오브 미주리’를 3년 반 만에 조기 졸업하는 개가를 올린다.
“웨이터로 일할 때예요. 그날이 내 생일이었어. 영업이 끝날 때쯤 어떤 손님이 음식을 잔뜩 시켰다가 남겨놓고 나가는 거야.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채소, 고기, 샴페인을 잔뜩 싸들고 풀장이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죠.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내가 왜 여기 앉아 남이 남긴 음식이나 먹고 있는 거지? 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없었거든. 그날 내가 딱 각오를 했어요. ‘내 남은 인생에 절대 남이 남긴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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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킨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졸업 후 메릴랜드 오션 시티의 한 스테이크집에서 3개월 일해서 5000달러를 벌어 부모 계시던 일본에 들른다. 그의 선친은 1963년 광주요를 창업한 조소수 선생! 당시 명백하게 스러져가던 우리 도자기를 되살려낸 어른이다. 조선말 광주관요 폐쇄로 흩어졌던 청화백자 제작술을 보유한 ‘독짓는 늙은이’를 찾아내 일본으로 모셔가 우리 도자기의 부흥을 도모했고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는 중이었다.
“그 무렵 일본에 갔더니 아버지 사업이 시스템이 잘못 돼 있었어.”
자동차를 한 대 사서 전국 순회 전시를 하게 만든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1974년, 서울에 한창 살롱문화가 시작될 때였다. 경기중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직해 잘나갈 때라서 그들과 어울려 다녔다.
“내가 원래 얻어먹는 성격이 아니거든. 몇 주 지나니 외상이 100만원이 넘어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취직하려고 대우 김우중 회장을 찾아갔지. 옷을 말쑥하게 입어 외국 바이어쯤으로 보였나봐. 아버지의 마루이치 상사 명함을 들고 갔더니 최규철 전무가 나와서 ‘아버님이 조자 소자 수자 어른이시냐’고 물어요.”
처제의 죽음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고생할 수 있겠어?” 딱 한마디 질문만 받은 후 대우에 취직했다. 대우에서 그는 주변의 시샘을 받을 만큼 승승장구했다. 부산지점에 잠시 머물다 맨 처음 뚫은 아프리카 섬유시장을 맡았고, 이어 유럽 전역의 지사장을 맡아 해외 영업망을 개척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 하나를 얻었다. 세계 최고위층들과 어울린 경험은 방위산업을 맡으면서였다.
“유럽 시장에 자동차를 들고 나가기는 시기상조라는 판단이 서자 김우중 회장이 날더러 방위산업을 맡으라고 했어요. 라오스, 필리핀엘 갔는데 ‘섹션 치프(Section Chief)’ 명함으론 국방장관을 만날 수가 없더라고. 김 회장에게 전권 위임하는 명함을 만들어달라고 했어. 그걸 받고 나서부터 세계 권력자들을 다 만나는 거야. 그러면서 그 나라 최고의 문화를 보는 거요. 그걸 다 경험했어. 과장 직급일 때 바깥에서 내가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다니깐.”
대우 그리스 지사장으로 있을 때였다.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이라크에 가서 에이전시 계약을 파기하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아내는 만삭이었고 이라크로 가서 일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처제가 언니를 도와주러 막 도착해 있었어요. 이라크에서 돌아와 인사도 못하고 자고 있는데 밤 10시쯤 누가 막 깨워요. 전날 도착한 처제가 안 일어난다는 거야. 뇌출혈이 온 거예요. 봤더니 벌써 시신이야. 그때 한 스물둘 됐나. 내가 서른셋이었으니까. 와, 못 살겠데요. 돈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인간 존재의 무력감이 찾아오는데 견딜 수가 없데요. 집사람을 서울로 돌려보냈어요. 그리고 사표를 냈어요. 이젠 월급쟁이는 안 된다. 내가 나를 스스로 만들자, 싶었어요.”
서울로 돌아왔다. 쉬고 싶었다. 얼마 후 서울에 온 이라크 에이전시가 김우중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에게 연락해왔고, 쉬고 있다는 말을 듣더니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독립해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 않아 수락한다. 주변에서 50만달러를 빌려 이라크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고 중동 지역을 대상으로 무기사업을 벌였다. 군사기밀에 속하는 얘기들이라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그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역시 세계 최고의 부호들과 어울렸고 초호화 음식과 술과 파티를 즐기는 게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입맛과 취향과 기호가 점점 고급화하고 세련돼갔다.
대우에 사표를 낸 게 1982년, 부친이 세상 뜬 후 광주요를 맡은 게 1988년이다.
“어머니께서 ‘너는 막내지만 여유가 있으니 가업을 이어다오’라고 당부하셨어요. 우선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이 드는 일이지만 언젠가는 빛을 볼 거라고 하셨죠. 혜강 같은 도예가가 다 우리집에 와서 작업했어요. 이천이 도자기 메카가 된 것도 광주요 때문이죠. ‘네가 광주요라는 이름이 이어지도록 해다오’라고 어머니가 하도 원하셔서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맡겠다고 했죠.”
도자기 강국은 경제 강국
그러나 맡고 보니 돈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무엇이든 대충 하는 건 그의 성정이 아니다. 선친에게서 듣고 배운 도자기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최고급의 감각을 보태 자신만의 도자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도공들과 함께 박물관을 순례하고, 책을 읽고, 옛 도자기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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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목한 것은 상감기법이다. 태토를 파내 무늬를 새기고 그 속에 구리 따위 금속 성분을 채워서 굽는 이 상감도자기는 강한 불길에 휩쓸려 금속이 제 색깔을 내지 못하고 날아가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금속을 날리는 그 불을 일명 ‘지랄불’이라 했는데 조 회장은 여러 번의 실험과 연구로 마침내 지랄불을 극복했다. 거기서 그친 게 아니다. 그는 산화, 환원을 번갈아 시도하는 ‘중성기법’으로 붉은색, 푸른색을 함께 띠는 상감 도자기를 개발해냈다. 도자기에 일본식이 아닌 한국 문양(목부용)을 넣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세계를 다녀보니 도자기 강국은 또 전부 경제강국이데요. 역시 정치·문화·경제·사회가 골고루 밸런스를 이루며 발전했어요.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있고 술이 있고 음식이 있고 그릇이 있어요. 게다가 이 모든 게 다 등급별로 만들어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파고드니 튀어나오는 게 다름 아닌 우리 음식의 역사였다. 품위가 훼손된 이유도 밝혀졌다. 우리가 제대로 된 세계화로 가려면 그 문화의 언밸런스를 밸런스가 되도록 해야겠구나 싶었다. 시급했다.
“21세기에 중요한 건 타이밍이에요. 유연성이 없으면 안 되거든요. 일본도 실리콘밸리 하려고 했는데 못 했어요. 왜 안 됐느냐? 문화 차이죠. 일본은 재고(再考)를 거듭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려요. 결론이 나면 늘 테크놀로지가 한발 먼저 가버리니까.”
“문화는 리더가 만드는 것”
그는 한국 음식 세계화를 어깨에 짊어진 자신의 처지를 일종의 숙명이라고 여긴다. 도자기를 굽다보니 거기 어울리는 음식을 생각했고, 음식과 함께 마실 술을 고민했고, 공간을 채울 벽지를 찾아냈고, 그걸 함께 내보일 고급식당 가온을 만들었다. 일부러 가격수준이 다른 식당 낙낙과 녹녹도 열었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공력과 돈이 있으니 이젠 손을 뗄 수도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앞날이 번히 보이는 일이니 입을 다물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강의 요청이 오면 어디든 달려가 음식과 미래 얘기를 한다. 음식만이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란 깨달음은 날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가온에서 내가 맛본 붕어찜과 메밀만두와 돼지갈비찜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러면서 씹는 맛과 향내의 여운이 길었다. 나야 주머니가 가벼우니 자주 찾을 수 없겠지만 특별한 날 가온에 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돼지갈비찜은 어느 종가 며느님에게 배운 거예요. 이게 기가 막힌 맛 아닙니까. 소금도 안 쓰고 간장도 안 쓰고 딱 새우젓갈로만 간을 했어요. 보세요. 와인하고도 잘 맞고 우리 소주, 화요하고도 궁합이 딱 맞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이 이만큼 가치를 만들어놓은 이 사업을 누군가 유능한 사람이 나타나 바통 터치해줄 것을 기대한다. 자신이 일당 천밖에 안 된다고 자꾸 말한다.
“일당 천이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1000명뿐이라는 거죠. 그러나 대기업 사장이라면 일당 십만은 되지 않겠어요? 일당 십만이 되면 그때부터 막강한 힘이 생깁니다. 문화는 결국 리더들이 만드는 겁니다. 진정 뜻이 있고 의지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 일당 십만의 리더가 이 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난 언제든 손뗄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 소주를 마시면서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술이 있구나, 어떤 나라 술보다 좋구나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랫사람들이 다 따라가게 돼 있어요. 리더들이 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겁니다. 위에서 가치를 만들면 아래서 따라가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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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 경북대 국문과 졸업 ●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 저서 : ‘김서령의 가’‘여자전’ | |
일본이 좋은 예다. 정치가들과 그룹총수들은 손님을 일부러 일식집에서 접대했다. 1980년대에 이미 LA의 고급 일식당은 1인당 500달러를 받았다. 미국 최고 스테이크 집이 1인당 150달러일 때 그 세 배 넘는 가격을 매긴 것이다. 우리 한식은? 가온의 음식값이 비싸다고 욕할 게 아니다. 다 함께 한식 세계화 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너무 늦으면 안 된다. 돈 두둑하게 벌어놓은 기업인이라면 조태권 회장의 이 말에 귀 기울여달라.
“세계 최고 디자이너를 데려와 실내 장식을 하고 세계 최고의 건축가를 데려와서 21세기형 한옥을 만들어라. 거기에 최고의 공예품들을 넣어 베스트 공간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당신들은 돈을 쓴 것이지만 땅은 자산으로 남지 않나. 밑져봐야 건물의 감가상각비밖에 더 있겠나. 거기에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집어넣어라. 최고급 한식당이 어떤 것인지 세계에 보여주자. 외국 손님들, 국회의원, 기업인 다 거기서 접대하라. 큰돈 안 쓰고 최고의 레스토랑 만들고 그걸 미니마이즈 해서 세계 각지에 내놔봐라. 이게 최고의 창조경영이다. 몇 년 안 가 승산 있는 사업이 될 게 확실하고 동시에 국가 자존심을 업그레이드하는 길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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