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 온 글들

마지막 강의하듯 살면 인생은 축제입니다

bthong 2008. 7. 8. 09:33


이 시대, 진정한 열정파는 어떻게 사는가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값지고 재밌게 살고 있는가.

최근 국내에 책으로 선보여 화제가 되고 있는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를 통해 얻게 된 질문이다. ‘마지막 강의’는 랜디 포시(47) 미국 카네기멜런대 컴퓨터공학과 교수가 지난해 9월 이 대학에서 열었던 강의를 말한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그는 어린 세 자녀를 둔 가장이다, 그는 책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자신이 떠난 뒤 남겨질 아이들을 위한 삶의 교훈을 희망적으로 이야기했다.

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했던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도 각박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연히 같은 병실을 쓰게 된 두 노인은 문신하기,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카레이싱 하기 등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만들고 실천하며 인생의 기쁨을 나눴다.

죽음을 앞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강의를 하듯 아름답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주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포시 교수의 강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꿈에 대한 강의였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란 소중한 화두를 던졌다.

○ 음악과 요리로 아낌없이 베푸는 ‘아트 포 라이프’ 용미중 사장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기슭에는 ‘아트 포 라이프’란 한옥집이 있다. 서울시향 출신의 음악가 부부가 운영하는 공연장 겸 레스토랑이다. 문 앞에는 ‘삶을 축제로’란 문구가 적혀 있다.

아내인 용미중(47) 사장을 이곳에서 만났다. 10여 년 전 호스피스 단체에서 음악 선교를 한 계기로 ‘나눔의 삶’을 살게 된 그녀는 20년 동안 몸담았던 서울시향을 관두고 지금은 각종 봉사활동에 힘쓰고 있다.

“우연히 호스피스 단체에 봉사하러 갔는데 음악가인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임종 직전의 분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었어요. 즉석에서 신청 곡을 받아 플루트를 연주했죠. 그런데 제가 연주하던 곡을 신청한 할아버지가 바로 그 음악을 들으며 세상을 뜬 거예요. 그 순간 제가 누려 왔던 화려한 무대와 쟁쟁한 오케스트라가 공허해졌어요. 내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마지막 찬양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거죠. 아세요? 임종 직전 환자분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눈꺼풀이 심하게 흔들리는데 찬양을 들으면 그 움직임이 고요해져요.”

그녀가 시한부 인생을 사는 30대 여성을 도우러 갔을 때다. 병상에는 엄마가 천장을 보며 모로 누워 있는데 여덟 살짜리 딸이 곁에서 어른 같은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아, 내가 저 엄마라면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그녀가 지인 10여 명과 함께 ‘아트 포 라이프 자원봉사회’란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암 환자 자녀들과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게 된 계기다. 이탈리아 요리를 따로 배워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서울 애화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 학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봉사활동도 한다.

“봉사활동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 제게 있어선 음악과 요리를 남에게 베풀면 되죠.”

이웃 도우며… 아버지 뒤를 이어… 딸을 위해…

그들은 꽃처럼 향기롭게 웃고 있었다


용 씨에게는 22세인 딸이 있다. 딸에게 긍휼의 마음,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마음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고 딸은 엄마의 기대 이상으로 잘 자랐다고 했다. 이들 모녀는 종종 봉사활동도 함께 한다.

봉사활동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얼마 전에는 딸과 함께 저소득층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집에 있던 딸 또래의 처녀가 펑펑 울었다. 용 씨 모녀의 정다운 모습이 부러워서였다.

“봉사는 나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이 행복하지만 결코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 자궁암 말기 여성의 ‘내 인생의 즐거운 2부’

정영숙(가명·69) 씨는 2000년 자궁암 말기 진단을 받았으나 지금 건강하게 인생의 ‘즐거운 2부’를 맞고 있다. ‘긍정의 힘’을 보여주는 그녀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소개한다.

“이제 서른다섯 살이 된 외동딸은 늘 내게 ‘엄마의 가장 큰 단점은 너무 쾌활하고 지나치게 낙천적인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딸은 달랐다. 외가 식구들이 고혈압 관련 질병으로 하나 둘 세상을 뜨자 자신과 엄마의 건강검진을 부지런히 챙겼다.

2000년 어느 날부터 소변에 조금씩 피가 묻어 나왔다. 6개월 전 건강검진에서 아무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갱년기 증상이려니 넘겼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는데 이유 없이 피곤해 혼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몰래 병원에 간 사실을 귀신같이 알아낸 딸은 검사 결과를 전화로 듣고 ‘엄마, 결과가 별로인가 봐. 다른 병원에 가 봐야겠어’라고 말했다. 마치 ‘엄마, 영화 보고 늦게 올 거야’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다른 병원에서는 나를 밖에 나가 있으라 한 뒤 딸에게 검사 결과를 알렸다. 딸은 내게 다가와 ‘엄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엄마, 암이래.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암. 암이 중요한 게 아니라 괜찮아진다는 게 중요한 거야. 울면 안 돼. 난 이제 수속할 테니 엄마는 병원에서 뭘 하고 지내면 안 심심할지 궁리해 봐’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입원 생활은 시작됐다. 딸의 의연한 태도에 나는 암 초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암 말기였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톱이 부서지는 항암치료까진 괜찮다 해도 마치 절굿공이 후려치는 것처럼 몸이 아픈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변이 지독한 냄새를 풍길 때 죽음이 내게 가까이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항암치료가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옷가지들을 정리하자 딸은 ‘엄마, 영화 찍어?’라며 말렸다. 딸이 안 죽는다니까 진짜 안 죽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딸은 식탁에 ‘싱’이라고 큼지막하게 적어 놓았다. 싱겁게 먹으란 뜻이었다. 즐겨 먹던 젓갈 대신 현미밥, 구운 마늘, 시래기 등을 늘 상에 올리고 남편과 함께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3개월에 한 번 받던 정기검사를 이젠 1년에 한 번 받는다.

나중에 물어보니 딸은 내가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죽는다고 생각하다가 죽는 것보다 산다고 생각하다가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계속 그렇게 했더니 정말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되더란다. 나도 그렇다. 내 삶의 2부가 여전히 창창하게 남아 있다고 믿는다.”

● 아홉 살 딸을 위한 아버지의 소망

골프 컨설턴트인 박경호(38) 씨의 꿈은 아홉 살 딸 서영이를 위한 삶이다.

“서영이가 아홉 살인데, 딸아이 인생의 처음 3분의 1에는 아빠가 없었던 셈이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 많이 노력하며 살아야 해요.”

공무원 생활을 관두고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로 입사했을 때 딸이 생후 3개월이었다. 별 보며 출퇴근하는 날들이 계속되자 딸은 아빠를 보면 놀라 엄마 뒤에 숨기 일쑤였다. 이렇게 3년을 살면서 ‘가정도 돌볼 수 없는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란 회의에 괴로웠다.

뒤늦게 골프 인생을 시작하면서도 그는 딸을 위한 시간이 늘 우선이다. 주말 중 하루는 가족을 위해 쓰고 주중엔 딸의 바이올린 공개수업에도 참석해 딸을 응원한다.

“골프할 때 마음으로 미리 보는 과정이 중요해요. 내가 상상하는 샷이 지금 당장 안 일어나도 큰 방향성을 갖게 되거든요. 우리 서영이가 다양한 꿈을 찾아 즐겼으면 해요.”

만약 포시 교수처럼 어느 날 갑자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면 어떨까.

“딸이 꿈을 이루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것 같네요. 딸과 많은 추억을 만들어야겠습니다.”

● 어느 대학교수의 마지막 강의

수필가인 간복균(67) 강남대 명예교수는 최근 40년 교편생활을 접는 마지막 강의를 했다. 이 강의가 열린 강의실 뒤편에는 아들인 간호섭(40)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참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장래에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산수 문제를 풀라고 하면 종이 뒷면에 그림을 그려놓기 일쑤인 어린 아들에게 “참 잘 그린다”고 칭찬하며 당시에는 귀한 종이를 아낌없이 제공했던 아버지. 하지만 아들이 정작 의상학과로 대학을 지원한다고 했을 때는 사생결단하듯 뜯어말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져 줬다. 아들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뉴욕의 유명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로 승승장구 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대학교수가 되라”며 국내 귀국을 끝없이 종용했다.

이번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항복했다. 마침 1990년대 후반 국내 대학들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교수들을 대거 충원하면서 아들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됐다.

“아버지가 마지막 강의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 저게 미래의 내 모습이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 소원 풀어준다는 마음으로 항복해 같은 길을 걷게 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일 같아요.”

포시 교수는 ‘마지막 강의’에서 “내 생각에 부모의 임무란 아이들이 일생 동안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꿈을 열정적으로 좇을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자녀에게 어떤 부모, 부모에게 어떤 자녀인가. 그리고 얼마만큼 삶에 대한 열정을 갖고 즐겁게 살고 있는가. 포시 교수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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