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정원 및 정원수 관리

정원에 대한 또 다른 시선

bthong 2008. 8. 14. 01:00
 원문출처 : 나의 정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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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진다는 것이 자연을 사랑하는 일일까요?

 

기본적으로 정원 자체가 인공이라는 것.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자연상태의 식물을 옮겨와야 한다는 것 등의 피할 수 없는

부정적 면들을 안고 있어

명확하고 절대적인 해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주인의 정원에 대한 생각을 알게 된다면

그 답은 더욱 아리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원을 가진 이들을 분류해 보면

 

정원을, 집안에 꼭 갖추어야 할 소품처럼 별다른 애정없이 가진 사람.

정원을 일용할 양식을 얻는 채마밭과 소박한 꽃들로, 가꾸고 사는 사람.

정원에서 소자연을 느끼며 그 곁에 더불어 살려는 사람.

정원을 자기 식물콜렉션의 전시장으로 소유한 사람.

정원 생각에 매달려 일년 열두달을 어느 곳도 가지 못하는 사람.

정원을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아 이웃에서 신고가 들어가는 사람.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는지요?

정원은 자기애(自己愛)로 충전하고 충만되어 지는 공간입니다.

자칫 정원을 가꾼다는 미명하에

이웃과 화합하지 않는 편협과 이기,

정원의 다양성과 차별화를 이루기 위해 탐욕과 소유욕이 앞선다면,

자연을 사랑하기 보다 파괴하는 쪽에 가깝고

정원은 더 이상 소박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각기 다른 시선들이 존재하듯이

정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손바닥만한 정원일지라도

생명력으로 충일하고 정원사의 사려깊은 손길이 느껴지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정원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느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아래에 그 시선을 음미할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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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

카럴차페크 지음/ 윤미연 옮김.

출판사 : 다른 세상

 

한창 젊은 나이일 때, 우리는 꽃이란 윗옷의 단춧구멍에 꽂거나

여자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 나이 때는 꽃이

겨울잠을 자는 생물이며, 호미질을 해주고, 거름을 주고, 물을 뿌려주고,

옮겨 심고, 꺾꽂이를 해주고, 가지를 쳐 주고, 지지대를 세워 묶어 주고,

잡초들을 뽑아 주고, 벌레가 먹었거나 시든 잎사귀를 떼어 주고,

진딧물과 흰가루병 같은 것들로부터 보호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화단을 가꾸는 대신 소녀들의 꽁무니를 쫓아 다니고, 야망에 탐닉하고,

자신이 직접 키우지 않는 인생의 열매들을 아무 생각없이 따 먹고,

대체로 아주 거칠게 행동한다.

아마추어 정원사가 되려면 성숙의 시기,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식을 낳아 기를 나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정원으로 만들 수 있는 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처음 정원을 만들 때 대체로 경험이 많은 정원사나 원예전문가에 의뢰한다.

정원 만드는 작업이 끝나면  정원을 거닐면서 꽃들을 즐겁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심는 일이 일어난다.(내가 최초로 심은 식물은 바위솔이다)

식물을 심는 과정에서 손톱 밑이나 긁힌 상처를 통해 흙이 우리 몸속에 들어와서

일종의 중독 증세나 염증을 일으킨다. 일단 이 독에 감염되면 이후부터는 걷잡을 수가 없다.

요컨대 그 순간부터는 정원 가꾸는 일에 열을 올리는 원예광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이웃에게서 전염되어 정원사가 탄생하기도 한다.

아마 이웃집 정원에 피어 있는 수염패랭이꽃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빌어먹을, 나도 저 정도는 충분히 키울 수 있어. 두고봐, 내 꽃밭이 훨씬 더 근사해질 테니까!"

 그렇게 해서 탄생한 아마추어 정원사는 재배에 성공할 때마다 기운이 샘솟고,

실패할 때 마다 자극을 받으면서 새롭게 일깨워진 열정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든다.

그리고 수집욕이 꿈틀꿈틀 용솟음 치면서, 원예 사전에 수록된 A에서 Z까지 모든 식물을

자기 정원에 옮겨 놓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힌다. 그 후 수집욕은 체계화 되고 전문화되어

한 품종에 대한 열정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그 열병은 지금까지 멀쩡하던 한 인간을

장미 마니아나 달리아 마니아, 그 밖의 별별 식물들에 집착하는 편집증 환자로 만들어 놓는다.

 또 어떤 이는 예술적인 열정의 포로가 되어 정원을 끊임없이 재배하고, 변화시키고,

다시 설계하고, 색깔별로 식물을 재구성하고, 식물을 새로운 그룹으로 나누고,

소위 창조적인 불만족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정원에서 멀쩡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가만 놔두지 않는다.

정원 가꾸는 일이 소박한 명상적인 활동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완벽주의자들이 몰두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스러운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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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사냥꾼> 

케여힐셔, 레나테워킹 지음/ 김숙희 옮김

출판사 : 이룸

 

 식물 사냥꾼(plant hunter). 대단히 모순된 개념이다.

한 식물을 노획하여 '강제로 데려가려는' 그들의 소망에는 분명 폭력과 파괴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 바로 이 식물 사냥꾼들 덕분에 그토록 아름답고 다양한 색과 형태의

식물들이 머나먼 나라와 대륙으로부터 우리에게 건너오지 않았는가.

 식물 사냥꾼이라는 개념은 사냥과 정원 가꾸기에 미쳐 있던 영국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영국 정원에 커다란 식물 보물을 갖다주기 위해 어떠한 노고와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대부분 남성)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중략>

 

 18세기 말에는 이국의 화려한 꽃을 내보이며 자랑하는 즐거움과 함께 식물수집이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집앞의 잘 가꾼 화단에는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화려한 이국 식물들이 심어졌다. 도시 근교의 공원에는 주로 미국에서 수입해온

잡목을 심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정원을 가꾸는 일은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얻었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모두가 삽을 들었다. 식물들이 방을 점령했다.

튀어나온 창과 베란다에는 녹색으로 가득하다. 온실들이 지어졌고

취미로 정원을 가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원예잡지들은 이것저것 충고했다.

조경업자의 수가 늘어났고, 추위에 민감한 식물을 성공적으로 재배하는 지식 역시도 풍부해졌다.

 원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보급품을 조달하가 위해 유급수집가들이 전 세계로 파견되었다.

식물 사냥은 직업이 되었다. 전문 사냥꾼들은 더 이상 식물계에 다양한 학문적 탐구를 하지 않았다.

오직 내국 시장을 위해 매력적인 식물을 노리고 찾았다.

예를 들어 란(蘭) 사냥은 고도로 전문화되었다. 빌헬름 미홀리츠 같은 난초 사냥꾼은

그의 고용주에게 세밀한 지시를 받고 전 지대를 샅샅이 �어서

매번 그 지대를 몽땅 '쓸어갔다'

 동아시아는 19세기 식물 사냥꾼에게 완전히 새로운 처녀지를 열어주었다.

동아시아는 무역의 근거지를 제공하는 외에도, 그때까지 외국인의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던 일본과 중국으로 접근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데지마 섬에서 의사로 일했던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는

각종 관상식물을 유럽으로 보냈다. 스파이 혐의로 일본에서 추방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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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출판사 : 황소자리 

 

 씨를 뿌리는 일은 즐겁다. 특별하게 신경을 곤두세울 일도 없어 전혀 힘들지 않다.

씨를 뿌리면서도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날은 5월의 어느 날이었고, 오후였다, 만개한 사과나무 꽃에 꿀벌들이 제법 많이

모여 윙윙거렸고, 나는 그 옆에서 씨를 뿌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의 정원에서(혹은 다른 사람의 정원에서) 인간이 하는 역할과 꿀벌이 하는 역할과 과연 다를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 이런 비교가 우습게 들린다면, 그날 오후 내가 정원에서 한 일이

무엇이었을 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어떤 특별한 식물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파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감자의 유전자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가꾸는 정원'이라는 세계에서 이런 선택을 하는 행위를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식물 종이 장차 번성하고

또 어떤 식물종은 사라져야 할지를 결정하는 권력자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특별히 고른 감자라는 종을 '선택'하고 '개발'하고 '개량'한 정원사, 식물학자, 육종개발자,

그리고 생명과학자 등의 인간 군이 등뒤에서 줄을 지어 자신을 밀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문법에서도 이런 인간 중심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작물을 심고, 잡초를 뽑고, 곡물을 수확한다.' 이런 표현에서

우리는 세상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데, 자연이라는 공간에서 대부분 그렇듯이

정원에서 주체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나는 처음으로 이런 일반적인 생각이 과연 옳을까 의심을 품었다.

이런 생각이 사실은 인간 중심 사고가 빚어낸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어쩌면 꽃의 꿀을 빨아먹는 꿀벌 역시 정원에서는 자기가 주체이고, 꽃은 객체라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꿀벌의 착각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꽃이 꿀벌을 조종하여 자기 꽃가루를 옮기도록

한다는게 객관적인 사실이지 않은가.

 꿀벌과 꽃의 관계는 소위 공진화(共進化, 여러 개의 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진화하는 일)의

고전적인 사례이다. 이런 공진화 관계에서 벌과 사과나무는 서로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챙긴다. 벌이 사과나무 꽃을 방문함으로써 벌은 양식을 얻고 사과나무는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 의식적인 선택이 굳이 있을 필요는 없으며,

또한 주체와 객체를 구분한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생각 끝에, 내가 심는 감자와 나 사이의 관계 역시 벌과 사과나무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자와 나는 공진화 관계였다.<중략>

 

 이런 생각을 했던 5월의 그날 오후, 정원이 갑자기 새롭게 보였다.

정원이 나의 눈과 혀에 제공하는 온갖 기쁨들을 나는 그때까지 아무런 목적이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식물들은 그냥 그대로, 객체로서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늘 내 욕망의 객체로만 생각했던 정원의 식물들이

사실은 나를 이용해서 자기들이 직접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대신 수행하게 만드는

주체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정원 너머의 세상도 이렇게 바라본다면,

즉 자연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를 완전히 바꿔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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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식물사랑>

장-자크 루소 지음/ 진형준 옮김

출판사 : 살림 

 

 식물학자는 자연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이 보여주는 것만을 참으로 인정하며 그 본연의 권위에 대해

그 누군가가 덧붙인 것을 거부한다. 그는 의사가 식물을 인수받는 순간에 식물을 떠나며

그것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관찰한다. 그는 식물이 죽어도 해부를 해서 연구를 하고

말려서 관찰을 하지만 그 형태가 사라져 약절구에서 환약이 되면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나는 이점을 자주 강조했다.

식물학의 발전에 주된 장애는 그것이 의학의 일부분이라는데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본래 기쁘고 즐거운 것을 우스꽝스럽고 역겹게 만든다.

그 가장 우아한 자태들, 그 생생한 색깔들, 그 매력적인 꽃들을------ 도구도 필요 없고

비용도 들지 않고 시골길을 산책하는 것 외에는 피곤한 노력도 필요 없고

작은 현미경과 칼날과 집게와 식물을 자르기 위한 가위만이 필요한 그 즐거운일을------

이 사랑스런 연구와, 우리의 마음과 감각에 거슬리는 무시무시한 도구를 가지고 행하는

해부와는 얼마나 다른가? 시체나 광물들, 때로는 땅의 내장을 아주 힘들여 꺼내야 하며

그 분석에 비용이 많이 들고, 때로는 키클롭스(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애꾸눈의 거인)의

동굴에서 위험도 맞이해야 하는 그 일과는 얼마나 다른가?

 꽃들이 뒤덮인 들판만이 식물학자의 유일한 연구실이다.

산책만이 그의 유일한 노동이다. 그는 전 도구들을 손쉽게 주머니에 넣고 갈 수 있으며

사랑스런 대상에만 몰두할 수 있고 목자의 화환만을 본다.

식물학이 즐거운 연구가 되려면 의사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연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무지한 자들과 편견에 갇힌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식물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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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일의 즐거움> 

헤르만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출판사 : 이레

 

 나무들은 성스럽다. 나무에 귀 기울이고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진실을 체험한다. 나무들은 무슨 교훈을 설교한다거나 처방을 내린다거나 하지 않는다.

나무는 개별적인 일에는 무관심하지만 삶의 근원적인 법칙을 알려준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생각이 숨겨져 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자연의 어머니는 나와 더불어

전례가 없던 일을 시도한다. 내 모습과 내 피부 밑에 흐르는 혈관은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내 우듬지에 매달린 가장 작은 잎사귀가 벌이는 유희,

내 가지에 난 아주 작은 상처조차 유일한 것이다. 내 사명은 바로 그런 일회적인 것 속에서

영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믿음이야말로 나의 힘이다. 나는 조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해마다 내 몸에서 탄생하는 수천의 자손들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내 씨앗 속에 간직된 비밀을 지닌 채 마지막까지 살아간다.

그밖에 어느 것도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의무가 성스럽다고 믿는다. 이 믿음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우리들이 서글퍼져 더이상 삶을 버텨내기 힘들어질 때,

나무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조용히 하라! 조용히 하라! 나를 바라보라! 삶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삶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모두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신이 네 안에서 말씀하시도록 하라. 그리고 너는 침묵하라

네가 두려워 하는 것은 네가 가는 길이 너를 어머니로부터 ,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딛는 걸음마다, 매일 매일이

너를 새롭게 어머니에게 이끌어 간다. 고향이란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향은 너의 내면에 있든가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밤바람에 소슬거리는 나무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정처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가만히 오랫동안 귀 기울이노라면, 방랑하고 싶은 마음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고통이다. 고통을 겪어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않은 그 무엇이다.

방랑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이며, 어머니를 기억하려는 동경이다.

삶의 새로운 비유를 찾으려는 동경이다. 방랑은 고향집으로 이끌어 간다. 모든 길은

고향집으로 향해 있으며, 모든 걸음은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이다.

 그처럼 나무는 저녁에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불안해할 때 솨솨 소리를 내며 말한다.

나무들은 긴 생각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보다 더 오래 살며, 호흡은 길고 고요하다.

우리가 나무들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보다 현명하다.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면서 생각이 짧고 어린애같이 서두르는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젖는다. 나무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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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라는 것이 묘해서 정원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영국의 첼시에서 진짜 '꿈꾸는 정원사'를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우리 일행의 첼시플라워쇼 관람을 안내하게된 그녀는

인생의 한창때에 정원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행로를 바꾸어

'English Gardener'의 수학을 하고 있는 용기있는 대한의 주부입니다. 

그녀의 유학시절(아직도 진행 중)에서 느꼈던 정원에 대한 생각들과 영국정원의 정보들을 묶어

한권의 책으로 나왔습니다.

Gardener(디자이너)를 향한 그녀의 인생행로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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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정원사의 사계 <소박한 정원> 

오경아 지음

출판사 : 디자인하우스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앙글레세이 아베이 정원이다.

갑자기 시야가 훤해지면서 수직의 하얀 힘이 솟는다. 수십 그루의 자작나무가

모여선 채 눈부신 흰줄기로 겨울정원의 마지막을 찬란하게 장식하고 있다.

여름철 귓가를 간지럽게 올려주던 자작의 속삭임은 이제 하얀 눈부심이 되어

바람을 불러 모은다. 자작나무에 바람이 분다. 하얀 출렁임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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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04년 겨울 나는, 부쩍 마당을 서성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하던 일을 접고 영국으로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한 동안 내 손에 쥐어진 많은 것을 버릴 수도 놓을 수도 없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갇혀진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문득 마당의 겨울 자작나무가 나에게 뭔가를 말해주는 듯 싶었다.

잎을 다 떨어뜨린 겨울 나무는, 버릴 수 없다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가질 수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겨울 나무는 다 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봄을 기대할 수 있다.

새로움은 버림으로 시작되고 버림은 새로움을 다시 만들어낸다.

그때 겨울 나무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무모한 영국으로의 도전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 중 세번의 겨울을 맞았다.

봄과 여름이 내 곁을 지나갔지만 그래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그건 어쩌면 겨울 나무를 닮은 내 삶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나면 문득 영국이 아니라 한국에 돌아가 있을 것 같은 시간들,

마지막 남은 한 잎까지 버려야 하는 생활의 고단함, 문득문득 밥을 먹다 아니면

공부를 하다 밀려드는 뜻밖의 외로움과 두려움, 그러면서도 차곡차곡 쌓여지는

내 꿈들의 부풀음을 반복하는 나날이었다. 이 길고 긴 겨울은 아마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끝이 나지 않을까 싶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작은 땅을 마련하고

거기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작나무를 심을 작정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내게 오지 않았던 봄을 그 자작나무에게서 다시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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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나무(피나무)

 

라임나무가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처럼 늘어서 있다.

혼자 있어 고고한 나무도 있지만 여러 그루가 함께 어우러져 더 많은

힘이 나는 나무도 있다. 라임나무는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줄을 맞춰 서 있으면

더 멋있고 힘차다.

인게이스트 홀의 입구, 장식이 화려한 철문 안으로 라임나무가 퍼레이드를 위해

정렬한 병사처럼 늘어서서 오는 사람을 맞는다. 크기가 주는 엄청난 힘이 있다.

백 미터는 족히 되는 큰 길 양쪽으로 줄 맞춰 늘어선 라임나무 길을 걷고 있으면,

매번 아름드리 라임나무의 엄청난 키와 덩치에 마음 속에 탄성이 일어나곤 했다.

라임나무는 가로수로서 가장 사랑받는 나무 중에 하나다.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정렬하듯 큰 나무를 늘어서게 하는 이른바 에비뉴정원 양식은

마차가 생겨나면서 새롭게 시도된 정원의 형태다.

가로수는 길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저택으로 들어서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가 하면

무성한 잎으로 저택을 가려 신비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원래는 유럽의 저택 정원에서 시작됐지만, 훗날 도심의 도로가에 심어지면서

거리나무로 발전되어 오늘날 오래된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 가로수 길이 생겨났다.

라임나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독일 사람인 듯하다.

독일 사람들은 라임나무에 미의 여신, 인간의 삶을 인도해 주는 안내자의 여신

프레야가 살고 있었다고 믿었다. 여름 내내 그 멋진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던 라임나무는

가을이 되자 노란 연두로 잎을 바꾸어 입었다.

그 길을 매일 걸으며 라임나무가 내게도 삶의 길을 인도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곤 한다.

내 삶이 어디서 시작됐고, 어떻게 가야 하고,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

그걸 알고 싶다고 늘 되뇐다.

 

 

 

 

 

<꿈꾸는 정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