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집
이 시집은 素月 김정식 님의 시 중 95편을 뽑아 모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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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나비...
素月의 生涯
인용 : [김소월론] 중 일부 (서종수, 1985년)
素月의 생애는 그동안 계희영, 김정호, 김안서 등의 회고록과 그들
의 진술을 토대로 한 일대기들이 작성되어 왔으나, 이렇다 할 만큼
의 확실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서로들 이견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생에 대한 상세한 전기의 작성보다는 그 정서형성
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주변인물들과 그의 일반적으로 밝혀진 행
적 등, 시인의 문학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점들을 짚고 넘
어 가기로 한다.
金素月은 1902년 그의 외가에서 대가족의 장손(갓놈)으로 태어나 여
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 성도는 그가 태어난지 2년만인 1904년 철도공사장의 일
인(日人) 목도꾼들에게 폭행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으며,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맹목적이라 할 만큼 사랑을 쏟았으나 문맹으로 인해
훗날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워 줄 만큼의 역할을 못 했다고 한다. 또
한 조부 상수는 집안의 장손이라하여 끔찍히 사랑하였으나, 素月이
성장하면서 불화가 된다. 첫째 숙모 계희영은 '이야기'를 많이 들
려줘 상상력을 자극, 그의 문학세계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으리
라고 보며, 素月이 성장하였을 때에도 가내에서 유일한 이해자로써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素月은 이상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나, 정신이
상의 부친, 시대적 이념을 외면하면서 소아적이며 규범에만 얽매이
던 조부, 세속적인 기대에 만 연연해 하고 무식했던 어머니, 남편으
로부터 버림을 받은 숙모 등의 주변 환경은 '총명하고 감수성이 예
민했다'는 素月이 성장함에 따라 은연중에 정성의 형성에 깊은 영향
을 미쳐 그의 시세계에 반영되었으리라 본다.
여하튼 素月은 행복한듯이 잘 자랐으며 남산학교를 지나 오산중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에 비로서 그의 스승이라 알려져 있는 안서
김억을 만나 수학을 하게 됨으로써 시작의 문을 들어선다.
안서가 [素月의 {진달래 꽃}에 수록된 그 아름다운 시들의 거지반
이 '아늑하고, 따사하고, 고요하고, 그러나 한많고 엄숙한 오산'에
서 초가 잡혀졌던 것이다.(김안서 : [소월의 생애 <여성> 39호. 193
9.6)]라고 했는데, 지금에야 확실한 사실은 알길이 없지만 '오산학
교'가 素月의 시(문학)에 있어서 요람이라할 수 있는 것은 믿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素月이 오산에 재학중일 때 결혼을 한 사실과 안서를 만나는 것은
그에게는 획기적인 변화였으며, 그 이후 1920년에는 안서의 추천으
로 [창조 5호]에 {낭인의 봄} 등 5편을 발표하여 중앙문단에 발을
들여 놓고, 그가 배재고보에 편입하던 1922년에는 당시 안서가 편집
을 하던 [개벽]에 집중적인 발표를 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1923년
에 배재를 졸업하고 동경대학 상대를 진학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
너갔다가 9월에 귀국을 하여 서울에 약 4개월을 머물다가(이 시기에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으며, 나도향 등과도 사귀었다 한다) 고향으
로 내려가 조부의 광산경영을 도우며 생활을 하는데 그는 이때에 유
일한 동인활동으로 김동인·김찬영·임장화 등과 함께 [영대]의 동
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의 조부와의 불협화음이 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
한 이때에 처가가 있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으로 이사를 하고 25년
에는 그의 유일 시집 {진달래 꽃}을 출판하기에 이른다. 26년 8월
부터 27년 3월까지 [동아일보구성지국]을 경영하였으며(<동아일보史
> 권 1.), 이 사업에 실패하고 고리대금업에 까지 손을 대게 되나
여기에서도 실패를 하고 말았는데, 이와 일맥상통하는지 27년에서 3
1년까지 가끔 몇편씩 발표해 오던 시들이 32년에서 33년 사이에는
전혀 없었으며, 34년에 들어서 요절하기까지 [삼천리] 8월·10월 11
월호 등에 자작시 11편 번역시 6편과 [신인문학] 11월호에 [차안서
선생 삼수갑산운]을 발표하여 마치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밝음과
같이 작품활동을 하다가 12월 24일 아침 돌연 생의 막을 내리는 것
이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뇌일혈에 의한, 음독자살, 또는 알콜중독에
의한 사망이라는 등의 이설이 분분한데 그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
지만 그의 곁에서 임종을 맞이한 부인의 진술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고 생각한다.
素月의 죽음이 이같이 베일에 싸이게 된 것은 [素月의 죽음은 문중
에서 '부끄럽고 끔찍하다'하여 함구하고 말았다.(계희영 : 앞의 책)
]는 계희영의 말로써 이해가 갈 것같으나, 그 보다 먼저 필자는 素
月의 시어 [떨어져](초혼), [저만치](산유화), [무연한](상쾌한 아
츰) 등에서 단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그의 삶 자체가 한걸음 물러
나 상태의 타인으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단평해 본다.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가는 봄 삼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질
강남 제비도 안 잊고 왔는데.
아무렴은요
설게 이 때는 못잊게 그리워.
잊으시기야 했으랴, 하마 어느새,
님 부르는 꾀꼬리 소리.
울고 싶은 바람은 점도록 부는데
설리도 이 때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질.
가시나무
산에도 가시나무 가시덤불은
덤불범불 산마루로 벋어올랐소.
산에는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 나선 혼잣몸이 홑옷자락은
하룻밤에 두세번은 젖시도 했소.
들에도 가시나무 가시덤불은
덤불덤불 들끝으로 벋어나갔소.
강촌(江村)
날 저물고 돋는 달에
흰 물은 ㅆㅆ......
금 모래 반짝......
청노새 몰고 가는 낭군!
여기는 강촌
강촌에 내 몸은 홀로 사네.
말 하자면, 나도 나도
늦은봄 오늘이 다 진토록
백년처권(百年妻眷)을 울고 가네.
길세 저문 나는 선비,
당신은 강촌에 홀로 된 몸.
개아미
진달래꽃이 피고
바람은 버들가지에서 울때,
개아미는
허리가 가늣한 개아미는
봄날의 한나절, 오늘 하루도
고달피 부지런히 집을 지어라.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ㅇ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의 노래
그대가 바람으로 생겨났으면
달 돋는 개여울의 빈 들 속에서
내 옷의 앞자락을 불기나 하지.
우리가 굼벵이로 생겨났으면
비오는 저녁 캄캄한 녕기슭의
미욱한 꿈이나 꾸어를 보지.
만일에 그대가 바다난 끝의
벼랑에 돌로나 생겨 났더면
둘이 안고 굴며 떨어나 지지.
만일에 나의 몸이 불귀신이면
그대의 가슴 속을 밤도와 태워
둘이 함께 재 되어 스러지지.
고적(孤寂)한 날
당신님의 편지를
받은 그날로
서러운 풍설이 돌았읍니다.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언제나 꿈꾸며 생각하라는
그 말씀인 줄 압니다.
흘려 쓰신 글씨나마
언문 글자로
눈물이라 적어 보내셨지요.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뜨거운 눈물 방울방울 흘리며
맘 곱게 읽어 달라는 말씀이지요.
구름
저기 저 구름을 잡아 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
밤이면 새카만 저 구름을.
잡아 타고 내몸은 저 멀리로
구만리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그대여, 들으라 비가 되어
저 구름이 그대한테로 내리거든
생각하라, 밤 저녁, 내 눈물을.
그를 꿈꾼 밤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들리는듯 마는듯
발자국 소리,
스러져가는 발자국 소리.
아무리 혼자 누워 몸을 뒤재도
잃어버린 잠은 다시 안와라.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그리워
봄이 다 가깆 전,
이 꽃이 다 흩기 전
그린 님 오실까구
뜨는 해 지기 전에.
엷게 흰 안개 새에
바람은 무겁거니,
밤샌 달 지는 양자,
어제와 그리 같이.
붙일 길 없는 맘세,
그린 님 언제 뵐련,
우는 새 다음 소랜,
늘 함께 듣사오면.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길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짐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오.
오늘은
또 몇 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짐도
정주 곽산(定州 郭山)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오.
갈래 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오.
깊고 깊은 언약
몹쓸 꿈을 깨어 돌아누울 때,
봄이 와서 멧나물 돋아 나올 때,
아름다운 젊은이 앞을 지날 때,
잊어버렸던듯이 저도 모르게,
얼결에 생각나는 "깊고 깊은 언약"
꽃촉불 켜는 밤
꽃촉불 켜는 밤, 깊은 골방에 만나라.
아직 젊어 모를 몸, 그래도 그들은
"해 달 같이 밝은 맘, 저저마다 있노라"
그러나 사랑은 한두번만 아니라, 그들은 모르고.
꽃촉불 켜는 밤, 어스러한 창 아래 만나라.
아직 앞길 몸를 몸, 그래도 그들은
"솔 대 같이 굳은 맘, 저저마다 있노라"
그러나 세상은, 눈물날 일 많아라, 그들은 모르고.
꿈길
물구슬의 봄새벽 아늑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불긋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나는 걸어가노라 이러한 길
밤저녁의 그늘진 그대의 꿈
흔들리는 다리 위 무지개 길
바람조차 가을 봄 거츠는 꿈
꿈꾼 그 옛날
밖에는 눈, 눈이 와라.
고요히 창 아래로는 달빛이 들어라.
어스름 타고서 오신 그 여자는
내 꿈의 품속으로 들어와 안겨라.
나의 베개는 눈물로 함뿍이 젖었어라.
그만 그 여자는 가고 말았느냐.
다만 고요한 새벽, 별그림자 하나가
창틈을 엿보아라.
꿈으로 오는 한 사람
나이 차려지면서 가지게 되었노라
숨어있던 한 사람이, 언제나 나의
다시 깊은 잠 속의 꿈으로 와라
불그렷한 얼굴에 가늣한 손가락의
모르는듯한 거동도 전날의 모양대로
그는 야즈시 나의 팔 위에 누워라
그러나, 그래도 그러나!
말할 아무 것이 다시 없는가!
그냥 먹먹할 뿐, 그대로
그는 일어라. 닭의 홰치는 소리.
깨어서도 늘, 길거리엣 사람을
밝은 대낮에 빗보고는 하노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울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좀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울 알았으랴.
제석산(啼昔山) 붙은 불은
예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의 풀이라도 태웠으면!
널
성촌(城村)의 아가씨들
널 뛰누나
초파일 날이라고
널을 뛰지요.
바람 불어요
바람이 분다고!
담 안에는 수양(垂楊)의 버드나무
채색(彩色)줄 층층그네 매지를 말아요
담 밖에는 수양의 늘어진 가지
늘어진 가지는
오오 누나!
휘젓이 늘어져서 그늘이 깊소.
좋다 봄날은
몸에 겹지
널뛰는 성촌의 아가씨네들
널은 사랑의 버릇이라오.
님과 벗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를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님에게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 모를 딴 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 들에 헤매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 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축업은 베갯가에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무도록 귀에 들려요
밤 들고 잠드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 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잊고 말아요
님의 말씀
세월이 물과 같이 흐른 두 달은
길어 둔 독엣 물도 찌었지마는
가면서 함께 가자 하던 말씀은
살아서 살을 맞는 표적이외다
봄풀은 봄이 되면 돋아나지만
나무는 밑그루를 꺽은 셈이라
내 몸에 꽃필 날은 다시 없구나
밤마다 닭소리라 날이 첫시(時)면
당신의 넋맞이로 나가 볼 때요
그믐에 지는 달이 산에 걸리면
당신의 길신가리 차릴 때외다
세월은 물과 같이 흘러 가지만
가면서 함께 가자 하던 말씀은
당신을 아주 잊은 말씀이지만
죽기 전 또 못잊을 말씀이외다
닭 소리
그대만 없게 되면
가슴 뛰노는 닭소리 늘 들어라.
밤은 아주 새어올 때
잠은 아주 달아날 때
꿈은 이루기 어려워라.
저리고 아픔이여
살기가 왜 이리 고달프냐.
새벽 그림자 산란한 들풀 위를
혼자서 거닐어라.
두사람
흰 눈은 한 잎
또 한잎
영(嶺) 기슭을 덮을 때.
짚신에 감발하고 길심 매고
우뚝 일어나면서 돌아서도......
다시금 또 보이는,
다시금 또 보이는,
마른 강 두덕에서
서리 맞은 잎들만 쌔울지라도
그 밑이야 강물의 자취 아니랴
잎새 위에 밤마다 우는 달빛이
흘러가던 강물의 자취 아니랴
빨래소래 물소래 선녀의 노래
물 스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라
물때 묻은 조약돌 마른 갈숲이
이제라고 강물의 터야 아니랴
빨래소래 물소래 선녀의 노래
물 스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랴
만나려는 심사
저녁해는 지고서 어스름의 길,
저 먼 산엔 어두워 잃어진 구름,
만나려는 심사는 웬 셈일까요.
그 사람이야 올 길 바이없는데,
발길은 누 마중을 가잔 말이냐.
하늘엔 달 오르며 우는 기러기.
만리성(萬里城)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 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
맘 켱기는 날
오실 날
아니 오시는 사람!
오시는 것 같게도
맘 켱기는 날!
어느덧 해도 지고 날이 저무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하소연하며 한숨을 지으며
세상을 괴로와하는 사람들이여!
말을 나쁘지 않도록 좋이 꾸밈은
닳아진 이 세상의 버릇이라고, 오오 그대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두세번 생각하라, 우선 그것이
저부터 밑지고 들어가는 장사일진댄.
사는 법이 근심은 못 가른다고,
남의 설움을 남은 몰라라.
말마라, 세상, 세상 사람은
세상에 좋은 이름 좋은 말로써
한 사람을 속옷마저 벗긴 뒤에는
그를 네 길거리에 세워 놓아라, 장승도 마치 한가지,
이 무슨 일이냐, 그날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제가끔 제 비위의 헐한 값으로
그의 몸값을 매마자고 덤벼들어라.
오오 그러면, 그대들은 이후에라도
하늘을 우러르라, 그저 혼자, 섧거나 괴롭거나.
먼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못잊어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묵념(默念)
이슥한 밤, 밤기운 서늘할제
홀로 창턱에 걸어앉아 두 다리 늘이우고
첫 머구리 소리를 들어라.
애처롭게도, 그대는 먼첨 혼자서 잠드누나.
내 몸은 생각에 잠잠할 때, 희미한 수풀로서
촌가(村家)의 액(厄)맥이 제(祭) 지내는 불빛은 새여오며
이윽고, 비난수도 머구리소리와 함께 잦아져라.
가득히 차오는 내 심령(心靈)은......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무심히 일어 걸어 그대의 잠든 몸위에 기대여라
움직임 다시 없어, 만(萬)뢰는 구적(俱寂)한데,
희요(熙耀)히 나려 비추는 별빛들이
내 몸을 이끌어라, 무한히 더 가깝게.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걷잡지 못할만한 나의 이 설움
저무는 봄저녁에 저가는 꽃잎
저가는 꽃잎들은 나부끼어라.
예로부터 일러오며 하는 말에도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그러하다, 아름다운 청춘의 때에
있다던 온갖 것은 눈에 설고
다시금 낯 모르게 되나니,
보아라, 그대려, 서럽지 않은가.
봄에도 삼월의 져가는 날에
붉은 피 같이도 쏟아져 내리는
저기 저 꽃잎들을, 저기 저 꽃잎들을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풀 그늘 어두운데
뒷짐지고 땅 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반딧불 꾀어드는 수풀 속에서
"간다 잘 살아라"하며 노래 불러라.
반달
희멀끔하여 떠돈다, 하늘 위에,
빛죽은 반달이 언제 올랐나!
바람은 나온다, 저녁은 칩구나,
흰물가엔 뚜렷이 해가 드누나.
어두컴컴한 풀없는 들은
찬 안개 위으로 떠흐른다.
아, 겨울은 깊었다, 내 몸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앉는 이 설움아!
가는 님은 가슴엣 사랑까지 없애고 가고
젊음은 늙음으로 바뀌어든다.
들가시나무의 밤드는 검은 가지
잎새들만 저녁빛에 희끄무레이 꽃지듯 한다.
밤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와요
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워와요
이리도 무던히
아주 얼굴조차 잊힐듯해요.
벌써 해가 지고 어둡는데요.
이곳은 인천의 제물포, 이름난 곳,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바다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하이얗기 밀어드는 봄 밀물이
눈앞을 가로 막고 흐느낄 뿐이야요.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
일을 필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때.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내려쪼이며
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 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어서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새로운 환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 한번 활기있게 웃고나서, 우리 두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즈런히 가즈런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여, 오오 생명의 향상이여.
봄밤
실버드나무의 거무스렷한 머리결인 낡은 가지에
제비의 넓은 깃나래의 감색(紺色) 치마에
술집의 창 옆에, 보아라, 봄이 앉았지 않는가.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며, 울며 한숨지어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설고 그리운 새카만 봄밤
보드라운 습기는 떠돌며 땅을 덮어라.
봄비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늣으니 으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부모(父母)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부부(夫婦)
오오 안해여, 나의 사랑!
하늘이 묶어준 짝이라고
믿고 살음이 마땅치 아니한가.
아직 다시 그러랴, 안 그러랴?
이상하고 별납은 사람의 맘,
저 몰라라, 참인지 거짓인지?
정분(情分)으로 얽은 딴 두 몸이라면,
서로 어그점인들 또 있으랴.
한평생(限平生)이라도 반백년(半百年)
못 사는 이 인생에!
연분의 긴 실이 그 무엇이랴?
나는 말하려노라, 아무러나,
죽어서도 한 곳에 묻히더라.
부엉새
간밤에
뒷창 밖에
부엉새가 와서 울더니
하루를 바다 위에 구름이 캄캄.
오늘도 해 못보고 날이 저무네.
분(粉) 얼굴
불빛에 떠오르는 샛보얀 얼굴,
그 얼굴이 보내는 호젓한 냄새,
오고가는 입술의 주고받는 잔,
가느스름한 손길은 아르대여라.
거무스레하면서도 불그스레한
어렴풋하면서도 다시 분명한
줄그늘 우에 그대의 목소리,
달빛이 수풀 위를 떠 흐르는가.
그대하고 나하고 또는 그 계집
밤에 노는 세 사람, 밤의 세 사람,
다시금 술잔 위의 긴 봄밤은
소리도 없이 창 밖으로 새여 빠져라.
붉은 조수(潮水)
바람에 밀려드는 저붉은 조수.
저 붉은 조수가 밀어들 때마다
나는 저 바람 우에 올라 서서
푸릇한 구름의 옷을 입고
불같은 저 해를 품에 안고
저 붉은 조수와 나는 함께
뛰놀고 싶구나, 저 붉은 조수와.
비단 안개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요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마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못할 무엇에 취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요
영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루라도 몇번씩 내 생각은
내가 무엇하려고 살려는지?
모르고 살았노라, 그럴 말로
그러나 흐르는 저 냇물이
흘러가서 바다로 든댈진댄.
일로 쫓아 그러면, 이내 몸은
애쓴다고는 말부터 잊으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것을
그러나 다시 내 몸,
봄빛이 불붙는 사태흙에
집짓는 저 개아미
나도 살려 하노라, 그와같이
사는 날 그날까지
살음에 줄거워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뜻이면
오오 그러면 내 몸에는
다시는 애쓸 일도 더없어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삭주구성(朔州龜城)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리요
물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텐고
삭주구성은 산넘어
먼 육천리
산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로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산위에
산 위에 올라서서 바라다보면
가로막힌 바다를 마주 건너서
님 계시는 마을이 내 눈 앞으로
꿈 하늘 하늘 같이 떠오릅니다.
흰모래 모래 빗긴 선창 가에는
한가한 뱃노래가 멀리 잦으며
날 저물고 안개는 깊이 덮여서
흩어지는 물꽃 뿐 안득입니다.
이윽고 밤 어둡는 물새가 울면
물결 좇아 하나 둘 배는 떠나서
저 멀리 한바다로 아주 바다로
마치 가랑잎 같이 떠나갑니다.
나는 혼자 산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해 붉은 볕에 몸을 씻으며
귀 기울고 솔곳이 엿듣노라면
님 계신 창 아래로 가는 물노래
흔들어 깨우치는 물노래에는
내 님이 놀라 일어 찾으신대도
내 몸은 산 위에서 그 산 위에서
고이 깊이 잠들어 다 모릅니다
산유화(山有花)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지네
상쾌한 아침
무연한 벌 위에 들어다 놓은드산 이 집
또는 밤새에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지 못할 이 비.
신개지(新開地)에도 봄은 와서 가냘픈 빗줄은
뚝 가의 어슴푸레한 개버들 어린 엄도 추기고,
난벌에 파릇한 뉘집 파밭에도 뿌린다.
뒷 가시나무밭에 깃들인 까치떼 좋아 지껄이고
개울 가에서 오리와 닭이 마주 앉아 깃을 다듬는다.
무연한 이 벌 심거서 자라는 꽃도 없고 메꽃도 없고
이비에 장차 이름 모를 들꽃이나 필는지?
장쾌한 바닷물결, 또는 구릉(丘陵)의 미묘한 기복(起伏)도 없이
다만 되는대로 되고 있는대로 있는 무연한 벌!
그러나 나는 내버리지 않는다, 이 땅이 지금 쓸쓸타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금 시원한 빗발이 얼굴을 칠때,
예서뿐 있을 앞날의많은 변전(變轉)의 후에
이 땅이 우리의 손에서 아름다와질 것을! 아름다와질 것을!
생(生)과 사(死)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서 늙어서야 죽나니,
그러하면 그역시 그럴 듯도 한 일을,
하필코 내 몸이라 그 무엇이 어째서
오늘도 산마루에 올라서서 우느냐.
설움의 덩이
꿇어앉아 올리는 향로의 향불.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초닷새 달그늘에 빗물이 운다.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아내몸
들고나는 밀물에
배 떠나간 자리야 있으랴.
어지른 아내의 남의 몸인 그대요
"아주, 엄마 엄마라고 불리우기 전에"
굴뚝이기에 연기가 나고
돌바위 아니기에 좀이 들어라.
젊으나 젊으신 청하늘인 그대요
"착한 일 하신 분네는 천당 가옵시리라"
애모(愛慕)
왜 아니 오시나요.
영창에는 달빛, 매화꽃이
그림자는 산란히 휘졌는데,
아이, 눈 깍 감고 요대로 잠을 들자.
저 멀리 들리는 것!
봄철의 밀물 소리
물나라의 영롱한 구중궁궐 궁궐의 오요한 곳,
잠 못 드는 용녀의 춤과 노래, 봄철의 밀물 소리.
어두운 가슴 속의 구석 구석......
환연한 거울 속에, 봄구름 잠긴 곳에,
소슬비 내리며, 달무리 둘려라.
이대도록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어버이
잘살며 못살며 할 일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나니,
바이 죽지 못할 것도 아니지마는
금년에 열네살 아들딸이 있어서
순복에 아버님은 못 하노란다.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뜨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숙
나는 혼자 뫼 위에 올랐어라.
솟아 퍼지는 아침 햇빛에
풀잎도 번쩍이며
바람은 속삭여라.
그러나
아아 내 몸의 상처 받은 맘이여
맘은 오히려 저리고 아픔에 고요히 떨려라
또 다시금 이 한때에
사람에게 있는 엄숙을 모두 느끼면서.
여수(여수)Ⅰ
저 오늘도 그리운 바다,
건너다보자니 눈물겨워라!
조그마한 보드라운 그 옛적 심정의
분결같은 그대의 손의
사시나무보다도 더한 아픔이
내 몸을 에워싸고 휘떨며 찔러라.
나서 자란 고향의 해돋는 바다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옛 이야기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오며는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이 눈물에 저는 움니다
제 한몸도 녜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읍니다
그때는 지난 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읍니다
그런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 이야기 뿐만은 남았읍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 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 줍니다
옛날
생각의 끝에는 졸음이 오고
그리움의 끝에는 잊음이 오나니,
그대여, 말을 말아라, 이후부터,
우리는 옛낯 없는 설움을 무르리.
오는봄
봄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쓸쓸한 긴 겨울을 지내 보내라.
오늘 보니 백양의 벋은 가지에
전에 없이 흰새가 앉아 울어라.
그러나 눈이 깔린 두던 밑에는
그늘이냐 안개냐 아지랑이냐.
마을들은 곳곳이 움직임 없이
저편 하늘 아래서 평화롭건만.
새들게 지껄이는 까치의 무리.
바다를 바라보며 우는 까마귀.
어디에서 오는지 종경소리는
젊은 아기 나가는 조곡일러라.
보라, 때의 길손도 머뭇거리며
지향없이 갈 발이 곳을 몰라라.
사무치는 눈물은 끝이 없어도
하늘을 쳐다보는 삶의 기쁨.
저마다 외로움의 깊은 근심이
오도가도 못하는 망상거림에
오늘은 사람마다 님을 여의고
곳을 잡지 못하는 설움일러라.
오기를 기다리는 봄의 소리는
때로 여윈 손끝을 울릴지라도
수풀 밑에 서리운 머릿길들은
걸음걸음 괴로이 발에 감겨라.
오시는 눈
땅위에 새하얗게 오시는 눈.
기다리는 날에는 오시는 눈.
오늘도 저 안온날 오시는 눈.
저녁불 켤 때마다 오시는 눈.
왕십리(往十里)
비가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우리집
이 바루
외따로 와 지나는 사람 없으니
"밤 자고 가자"하며 나는 앉아라.
저 멀리 하늘편에
배는 떠나 나가는
노래 들리며
눈물은
흘러 내려라
스르르 내려감는 눈에.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
또 저 산 넘어 넘어
구름은 가라.
원앙침(鴛鴦枕)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창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눈물은 새우잠의
팔굽베개요
봄꿩은 잠이 없어
밤에 와 운다.
두동달이 베개는
어디 갔는고
언제는 둘이 자던 베갯머리에
"죽자 사자" 언약도 하여 보았지.
봄메의 멧기슭에
우는 접동도
내 사랑 내 사랑
좋이 울것다.
두동달이 베개는
어디 갔는고
창 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월색(月色)
달빛은 밝고 귀뚜라미 울때는
우둑키 ㅅ멋없이 잡고섰던 그대를
생각한는 밤이여, 오오 오늘밤
그대 찾아 데리고 서울로 가나?
잊었던 맘
집을 떠나 먼 저곳에
외로이도 다니던 내 심사를!
바람 불어 봄꼿이 필 때에는
어찌타 그대는 또 왔는가.
저도 잊고 나니 저 모르던 그대
어찌하여 옛날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 가는맘.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읍니까!
오늘은 또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 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그려.
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자주(紫朱) 구름
물 고운 자주 구름,
하늘은 개여 오네.
밤중에 몰래 온눈
솔숲에 꽃피었네.
아침볕 빛나는데
알알이 뛰노는 눈
밤새에 지난 일은.....
다 잊고 바라보네.
움직어리는 자주구름.
장별리(將別里)
연분홍 저고리, 빨간 불붙은
평양에도 이름 높은 장별리
금실 은실의 가는 비는
비스듬히도 내리네 뿌리네.
털털한 배암무늬 돋은 양산(洋傘)에
내리는 가는 비는
위에나 아래나 내리네, 뿌리네.
흐르는 대동강, 한복판에
울며 돌던 벌새의 떼무리,
당신과 이별(離別)하던 한복판에
비는 쉴틈도 없이 내리네, 뿌리네.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읍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제비
하늘로 날아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
일정한 깃을 두고 돌아오거든!
어찌 설지 않으랴, 집도 없는 몸이야!
J.M.S
평양(平壤)서 나신 인격의 그 당신님, J.M.S
덕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재조있던 나를 사랑하셨다.
오산 계시던 J.M.S
십년 봄만에 오늘아침 생각난다.
근년 처음 꿈없이 자고 일어나며.
얽은 얼굴에 자그만 키와 여윈 몸매는
달은 쇠끝같은 지조가 튀어날듯
타듯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
만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님,
소박한 풍채, 인자하신 옛날의 그 모양대로,
그러나, 아 - 술과 계집과 이욕(利慾)에 헝클어져
십오년에 허주한 나를
웬일로 그 당신님
맘속으로 찾으시오? 오늘 아침.
아름답다. 큰 사랑은 죽는 법 없어,
기억되어 항상 내 가슴속에 숨어있어,
미쳐 거츠르는 내 양심을 잠 재우리,
내가 괴로운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나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집생각
산에나 올라서서
바다를 보라
사면에 백열리, 창파 중에
객선만 둥둥......떠나간다
명산 대찰이 그 어디메냐
향안(香案), 향탑(香榻), 대 그릇에,
석양이 산머리 넘어가고
사면에 백열리, 물소리라
"젊어서 꽃같은 오늘날로
금의로 환고향하옵소사"
객선만 둥둥......떠나간다.
사면에 백열리, 나 어찌 갈까
까투리도 산속에 새끼치고
타관만리(他關萬里)에 와 있노라고
산중(山中)만 바라보며 목메인다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고
들에나 내려오면
치어다보라
햇님과 달님이 넘나든 고개
구름만 첩첩......떠돌아간다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
삼수갑산 내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나니 기험타 아하 물도 많고 산 첩첩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루 가자 내 고향을 내 못가네
삼수갑산 멀더라 아하 촉도지난(蜀道之難)이 녜로구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가네
불귀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가네 내 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벗어난다 아하하
천리 만리
말리지 못할만치 몸부림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여 볼까.
한줄기 쏜살같이 뻗은 이 길로
줄곧 치달아 올라가면
불붙는 산의, 불붙는 산의
연기는 한두 줄기 피어올라라.
첫치마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꽃은 지나니 저문 봄에,
속 없이 우나니 지는 꽃을,
속 없이 느끼나니 가는 봄을.
꽃지고 잎진 가지를 잠고
미친듯 우나니, 집난이는
해 다 지고 저문 봄에
허리에다 감은 첫치마를
눈물로 함빡히 쥐어짜며
속없이 우노나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노나, 가는 봄을.
초혼(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추회(追悔)
나쁜 일까지라도 생(生)의 노력(努力),
그 사람은 선사(善事)도 하였어라
그러나 그것도 허사(虛事)라고!
나 역시 알지마는, 우리들은
끝끝내 고개를 넘고 넘어
짐 싣고 닫던 말도 순막집의
허청(虛廳)가 석양(夕陽) 손에
고요히 조으는 한때는 다 있나니,
고요히 조으는 한때는 다 있나니.
춘강(春崗)
속잎 푸른 고울 잔디
소래라도 내려는 듯,
쟁쟁하신 고운 햇볕
눈 뜨기에 바드랍네.
자주 들인 적은 꽃과
노란 물든 산국화엔,
달고 옅은 인새 흘러
나비 벌이 잠재우네.
복사나무 살구나무,
불그스레 취하였고,
개창버들 파란 가지
길게 늘여 어리이네.
일에 갔던 파린 소는
서룬 듯이 길게 울고,
모를 시름 조던 개는
다리 뻗고 하품하네.
청초(靑草) 청초 우거진 곳,
송이송이 붉은 꽃숨,
꿈같이 그 우리 님과
손목 잡고 놀던 델세.
춘향과 이도령
평양에 대동강은
우리나라에
곱기로 으뜸가는 가람이지요
삼천리 가다가다 한가운데는
우뚝한 삼각산이
솟기도 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과 이도령도 살았다지요
이편에는 함양(咸陽), 저편에 담양(潭陽),
꿈에는 가끔가끔 산을 넘어
오작교 찾아찾아 가기도 했소.
그래 옳소 누이님, 오오 내누님.
해돋고 달 돋아 남원 땅에는
성춘향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풀따기
우리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없는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하늘끝
불현듯
집을 나서 산을 치달아
바다를 내다보는 나의 신세여!
배는 떠나 하늘 끝을 가누나.
하다못해 죽어달래가 옳나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빛이랴 허공이랴,
소리만 남은 내 노래를
바람에나 띄워서 보낼 밖에.
하다못해 죽어달래가 옳나
좀더 높은 데서나 보았으면!
한세산 다 살아도
살은 뒤 없을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지금까지
살아서 이만큼 자랐으니.
예전에 지내본 모든 일을
살았다고 이를 수 있을진댄!
물가에 닳아져 널린 굴껍질에
붉은 가시덤불 벋어 늙고
어둑어둑 저문 날을
비바람에 울지는 돌무더기
하다못해 죽어달래가 옳나
밤의 고요한 때라도 지켰으면
합장(合掌)
나들이, 단 두 몸이랴. 밤빛은 배여와라.
아, 이거 봐, 우거진 나무 아래로 달 들어라.
우리는 말하며 걸었어라, 바람 부는대로.
등불 빛에 거리는 헤적여라, 희미한 하늬 편에
고이 밟은 그림자 아득이고
퍽도 가까이 풀밭에서 이슬이 번쩍여라.
밤은 막 깊어 사방은 고요한데,
이마즉, 말도 안하고, 더 안가고,
길가에 우두커니 눈 감고 마주 서서,
먼 먼 산, 산절의 절 종소리.
달빛은 지새어라.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해가 산마루에 올라와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밝은 아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내게 두고는 끝까지 모두다 당신 때문에 있읍니다.
다시는, 나의 이러한 맘뿐은, 때가 되면
그림자같이 당신한테로 가오리다.
오오, 나의 애인이었던 당신이여.
황촉불
황촉불 그저도 까맣게
스러져가는 푸른 창을 기대고
소리조차 없는 흰 밤에,
나는 혼자 거울에 얼굴을 묻고
뜻없이 생각없이 들여다보노라.
나는 이르노니, "우리 사람들
첫날밤은 꿈속으로 보내고
죽음은 조는 동안에 와서,
별 좋은 일도 없이 스러지고 말아라"
후살이
홀로된 그 여자
근일에 와서는 후살이 간다 하여라.
그렇지 않으랴, 그 사람 떠나서
이제 십년 저혼자 더살은 오늘날에 와서야.....
모두다 그럴듯한 사람사는 일레요.
훗길
어버이님네들 외우는 말이
"딸과 아들을 기르기는
훗길을 보자는 심정이로다"
그러하다, 분명히그네들도
두 어버이 틈에서 생겼어라.
그러나 그 무엇이냐, 우리 사람!
손들어 가르치던 먼 훗날에
그네들이 또다시 자라 커서
한결같이 외우는 말이
"훗길을 두고 가자는 심성으로
아들 딸을 ㄴ도록 기르노라"
희망
날은 저물고 눈이 내려라
낯설은 물가으로 내가 왔을 때.
산속의 올빼미 울고 울며
떨어진 잎들은 눈 아래로 깔려라.
아아 소쇄(蕭殺) 스러운 풍경이여.
지혜의 눈길을 내가 얻을때!
이제금 알기는 알았건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갓 아름다운 눈어림의
그림자뿐인 줄을.
이울어 향기깊은 가을 밤에
우무주러진 나무 그림자
바람과 비가 우는 낙엽 위에.
이 시집은 素月 김정식 님의 시 중 95편을 뽑아 모은 것입니다.
시 제목을 기준으로 해서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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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입니다.
좋은 시간들 되세요...
술나비...
素月의 生涯
인용 : [김소월론] 중 일부 (서종수, 1985년)
素月의 생애는 그동안 계희영, 김정호, 김안서 등의 회고록과 그들
의 진술을 토대로 한 일대기들이 작성되어 왔으나, 이렇다 할 만큼
의 확실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서로들 이견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생에 대한 상세한 전기의 작성보다는 그 정서형성
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주변인물들과 그의 일반적으로 밝혀진 행
적 등, 시인의 문학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점들을 짚고 넘
어 가기로 한다.
金素月은 1902년 그의 외가에서 대가족의 장손(갓놈)으로 태어나 여
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 성도는 그가 태어난지 2년만인 1904년 철도공사장의 일
인(日人) 목도꾼들에게 폭행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으며,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맹목적이라 할 만큼 사랑을 쏟았으나 문맹으로 인해
훗날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워 줄 만큼의 역할을 못 했다고 한다. 또
한 조부 상수는 집안의 장손이라하여 끔찍히 사랑하였으나, 素月이
성장하면서 불화가 된다. 첫째 숙모 계희영은 '이야기'를 많이 들
려줘 상상력을 자극, 그의 문학세계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으리
라고 보며, 素月이 성장하였을 때에도 가내에서 유일한 이해자로써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素月은 이상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나, 정신이
상의 부친, 시대적 이념을 외면하면서 소아적이며 규범에만 얽매이
던 조부, 세속적인 기대에 만 연연해 하고 무식했던 어머니, 남편으
로부터 버림을 받은 숙모 등의 주변 환경은 '총명하고 감수성이 예
민했다'는 素月이 성장함에 따라 은연중에 정성의 형성에 깊은 영향
을 미쳐 그의 시세계에 반영되었으리라 본다.
여하튼 素月은 행복한듯이 잘 자랐으며 남산학교를 지나 오산중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에 비로서 그의 스승이라 알려져 있는 안서
김억을 만나 수학을 하게 됨으로써 시작의 문을 들어선다.
안서가 [素月의 {진달래 꽃}에 수록된 그 아름다운 시들의 거지반
이 '아늑하고, 따사하고, 고요하고, 그러나 한많고 엄숙한 오산'에
서 초가 잡혀졌던 것이다.(김안서 : [소월의 생애 <여성> 39호. 193
9.6)]라고 했는데, 지금에야 확실한 사실은 알길이 없지만 '오산학
교'가 素月의 시(문학)에 있어서 요람이라할 수 있는 것은 믿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素月이 오산에 재학중일 때 결혼을 한 사실과 안서를 만나는 것은
그에게는 획기적인 변화였으며, 그 이후 1920년에는 안서의 추천으
로 [창조 5호]에 {낭인의 봄} 등 5편을 발표하여 중앙문단에 발을
들여 놓고, 그가 배재고보에 편입하던 1922년에는 당시 안서가 편집
을 하던 [개벽]에 집중적인 발표를 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1923년
에 배재를 졸업하고 동경대학 상대를 진학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
너갔다가 9월에 귀국을 하여 서울에 약 4개월을 머물다가(이 시기에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으며, 나도향 등과도 사귀었다 한다) 고향으
로 내려가 조부의 광산경영을 도우며 생활을 하는데 그는 이때에 유
일한 동인활동으로 김동인·김찬영·임장화 등과 함께 [영대]의 동
인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의 조부와의 불협화음이 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
한 이때에 처가가 있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으로 이사를 하고 25년
에는 그의 유일 시집 {진달래 꽃}을 출판하기에 이른다. 26년 8월
부터 27년 3월까지 [동아일보구성지국]을 경영하였으며(<동아일보史
> 권 1.), 이 사업에 실패하고 고리대금업에 까지 손을 대게 되나
여기에서도 실패를 하고 말았는데, 이와 일맥상통하는지 27년에서 3
1년까지 가끔 몇편씩 발표해 오던 시들이 32년에서 33년 사이에는
전혀 없었으며, 34년에 들어서 요절하기까지 [삼천리] 8월·10월 11
월호 등에 자작시 11편 번역시 6편과 [신인문학] 11월호에 [차안서
선생 삼수갑산운]을 발표하여 마치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밝음과
같이 작품활동을 하다가 12월 24일 아침 돌연 생의 막을 내리는 것
이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뇌일혈에 의한, 음독자살, 또는 알콜중독에
의한 사망이라는 등의 이설이 분분한데 그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
지만 그의 곁에서 임종을 맞이한 부인의 진술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고 생각한다.
素月의 죽음이 이같이 베일에 싸이게 된 것은 [素月의 죽음은 문중
에서 '부끄럽고 끔찍하다'하여 함구하고 말았다.(계희영 : 앞의 책)
]는 계희영의 말로써 이해가 갈 것같으나, 그 보다 먼저 필자는 素
月의 시어 [떨어져](초혼), [저만치](산유화), [무연한](상쾌한 아
츰) 등에서 단적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그의 삶 자체가 한걸음 물러
나 상태의 타인으로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단평해 본다.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가는 봄 삼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질
강남 제비도 안 잊고 왔는데.
아무렴은요
설게 이 때는 못잊게 그리워.
잊으시기야 했으랴, 하마 어느새,
님 부르는 꾀꼬리 소리.
울고 싶은 바람은 점도록 부는데
설리도 이 때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질.
가시나무
산에도 가시나무 가시덤불은
덤불범불 산마루로 벋어올랐소.
산에는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 나선 혼잣몸이 홑옷자락은
하룻밤에 두세번은 젖시도 했소.
들에도 가시나무 가시덤불은
덤불덤불 들끝으로 벋어나갔소.
강촌(江村)
날 저물고 돋는 달에
흰 물은 ㅆㅆ......
금 모래 반짝......
청노새 몰고 가는 낭군!
여기는 강촌
강촌에 내 몸은 홀로 사네.
말 하자면, 나도 나도
늦은봄 오늘이 다 진토록
백년처권(百年妻眷)을 울고 가네.
길세 저문 나는 선비,
당신은 강촌에 홀로 된 몸.
개아미
진달래꽃이 피고
바람은 버들가지에서 울때,
개아미는
허리가 가늣한 개아미는
봄날의 한나절, 오늘 하루도
고달피 부지런히 집을 지어라.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ㅇ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의 노래
그대가 바람으로 생겨났으면
달 돋는 개여울의 빈 들 속에서
내 옷의 앞자락을 불기나 하지.
우리가 굼벵이로 생겨났으면
비오는 저녁 캄캄한 녕기슭의
미욱한 꿈이나 꾸어를 보지.
만일에 그대가 바다난 끝의
벼랑에 돌로나 생겨 났더면
둘이 안고 굴며 떨어나 지지.
만일에 나의 몸이 불귀신이면
그대의 가슴 속을 밤도와 태워
둘이 함께 재 되어 스러지지.
고적(孤寂)한 날
당신님의 편지를
받은 그날로
서러운 풍설이 돌았읍니다.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언제나 꿈꾸며 생각하라는
그 말씀인 줄 압니다.
흘려 쓰신 글씨나마
언문 글자로
눈물이라 적어 보내셨지요.
물에 던져 달라 하신 그 뜻은
뜨거운 눈물 방울방울 흘리며
맘 곱게 읽어 달라는 말씀이지요.
구름
저기 저 구름을 잡아 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
밤이면 새카만 저 구름을.
잡아 타고 내몸은 저 멀리로
구만리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그대여, 들으라 비가 되어
저 구름이 그대한테로 내리거든
생각하라, 밤 저녁, 내 눈물을.
그를 꿈꾼 밤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들리는듯 마는듯
발자국 소리,
스러져가는 발자국 소리.
아무리 혼자 누워 몸을 뒤재도
잃어버린 잠은 다시 안와라.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그리워
봄이 다 가깆 전,
이 꽃이 다 흩기 전
그린 님 오실까구
뜨는 해 지기 전에.
엷게 흰 안개 새에
바람은 무겁거니,
밤샌 달 지는 양자,
어제와 그리 같이.
붙일 길 없는 맘세,
그린 님 언제 뵐련,
우는 새 다음 소랜,
늘 함께 듣사오면.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길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짐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오.
오늘은
또 몇 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짐도
정주 곽산(定州 郭山)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오.
갈래 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오.
깊고 깊은 언약
몹쓸 꿈을 깨어 돌아누울 때,
봄이 와서 멧나물 돋아 나올 때,
아름다운 젊은이 앞을 지날 때,
잊어버렸던듯이 저도 모르게,
얼결에 생각나는 "깊고 깊은 언약"
꽃촉불 켜는 밤
꽃촉불 켜는 밤, 깊은 골방에 만나라.
아직 젊어 모를 몸, 그래도 그들은
"해 달 같이 밝은 맘, 저저마다 있노라"
그러나 사랑은 한두번만 아니라, 그들은 모르고.
꽃촉불 켜는 밤, 어스러한 창 아래 만나라.
아직 앞길 몸를 몸, 그래도 그들은
"솔 대 같이 굳은 맘, 저저마다 있노라"
그러나 세상은, 눈물날 일 많아라, 그들은 모르고.
꿈길
물구슬의 봄새벽 아늑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불긋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나는 걸어가노라 이러한 길
밤저녁의 그늘진 그대의 꿈
흔들리는 다리 위 무지개 길
바람조차 가을 봄 거츠는 꿈
꿈꾼 그 옛날
밖에는 눈, 눈이 와라.
고요히 창 아래로는 달빛이 들어라.
어스름 타고서 오신 그 여자는
내 꿈의 품속으로 들어와 안겨라.
나의 베개는 눈물로 함뿍이 젖었어라.
그만 그 여자는 가고 말았느냐.
다만 고요한 새벽, 별그림자 하나가
창틈을 엿보아라.
꿈으로 오는 한 사람
나이 차려지면서 가지게 되었노라
숨어있던 한 사람이, 언제나 나의
다시 깊은 잠 속의 꿈으로 와라
불그렷한 얼굴에 가늣한 손가락의
모르는듯한 거동도 전날의 모양대로
그는 야즈시 나의 팔 위에 누워라
그러나, 그래도 그러나!
말할 아무 것이 다시 없는가!
그냥 먹먹할 뿐, 그대로
그는 일어라. 닭의 홰치는 소리.
깨어서도 늘, 길거리엣 사람을
밝은 대낮에 빗보고는 하노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울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좀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울 알았으랴.
제석산(啼昔山) 붙은 불은
예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의 풀이라도 태웠으면!
널
성촌(城村)의 아가씨들
널 뛰누나
초파일 날이라고
널을 뛰지요.
바람 불어요
바람이 분다고!
담 안에는 수양(垂楊)의 버드나무
채색(彩色)줄 층층그네 매지를 말아요
담 밖에는 수양의 늘어진 가지
늘어진 가지는
오오 누나!
휘젓이 늘어져서 그늘이 깊소.
좋다 봄날은
몸에 겹지
널뛰는 성촌의 아가씨네들
널은 사랑의 버릇이라오.
님과 벗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를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님에게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 모를 딴 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 들에 헤매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 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축업은 베갯가에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무도록 귀에 들려요
밤 들고 잠드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 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잊고 말아요
님의 말씀
세월이 물과 같이 흐른 두 달은
길어 둔 독엣 물도 찌었지마는
가면서 함께 가자 하던 말씀은
살아서 살을 맞는 표적이외다
봄풀은 봄이 되면 돋아나지만
나무는 밑그루를 꺽은 셈이라
내 몸에 꽃필 날은 다시 없구나
밤마다 닭소리라 날이 첫시(時)면
당신의 넋맞이로 나가 볼 때요
그믐에 지는 달이 산에 걸리면
당신의 길신가리 차릴 때외다
세월은 물과 같이 흘러 가지만
가면서 함께 가자 하던 말씀은
당신을 아주 잊은 말씀이지만
죽기 전 또 못잊을 말씀이외다
닭 소리
그대만 없게 되면
가슴 뛰노는 닭소리 늘 들어라.
밤은 아주 새어올 때
잠은 아주 달아날 때
꿈은 이루기 어려워라.
저리고 아픔이여
살기가 왜 이리 고달프냐.
새벽 그림자 산란한 들풀 위를
혼자서 거닐어라.
두사람
흰 눈은 한 잎
또 한잎
영(嶺) 기슭을 덮을 때.
짚신에 감발하고 길심 매고
우뚝 일어나면서 돌아서도......
다시금 또 보이는,
다시금 또 보이는,
마른 강 두덕에서
서리 맞은 잎들만 쌔울지라도
그 밑이야 강물의 자취 아니랴
잎새 위에 밤마다 우는 달빛이
흘러가던 강물의 자취 아니랴
빨래소래 물소래 선녀의 노래
물 스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라
물때 묻은 조약돌 마른 갈숲이
이제라고 강물의 터야 아니랴
빨래소래 물소래 선녀의 노래
물 스치던 돌 위엔 물때 뿐이랴
만나려는 심사
저녁해는 지고서 어스름의 길,
저 먼 산엔 어두워 잃어진 구름,
만나려는 심사는 웬 셈일까요.
그 사람이야 올 길 바이없는데,
발길은 누 마중을 가잔 말이냐.
하늘엔 달 오르며 우는 기러기.
만리성(萬里城)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 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
맘 켱기는 날
오실 날
아니 오시는 사람!
오시는 것 같게도
맘 켱기는 날!
어느덧 해도 지고 날이 저무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하소연하며 한숨을 지으며
세상을 괴로와하는 사람들이여!
말을 나쁘지 않도록 좋이 꾸밈은
닳아진 이 세상의 버릇이라고, 오오 그대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두세번 생각하라, 우선 그것이
저부터 밑지고 들어가는 장사일진댄.
사는 법이 근심은 못 가른다고,
남의 설움을 남은 몰라라.
말마라, 세상, 세상 사람은
세상에 좋은 이름 좋은 말로써
한 사람을 속옷마저 벗긴 뒤에는
그를 네 길거리에 세워 놓아라, 장승도 마치 한가지,
이 무슨 일이냐, 그날로부터
세상 사람들은 제가끔 제 비위의 헐한 값으로
그의 몸값을 매마자고 덤벼들어라.
오오 그러면, 그대들은 이후에라도
하늘을 우러르라, 그저 혼자, 섧거나 괴롭거나.
먼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못잊어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묵념(默念)
이슥한 밤, 밤기운 서늘할제
홀로 창턱에 걸어앉아 두 다리 늘이우고
첫 머구리 소리를 들어라.
애처롭게도, 그대는 먼첨 혼자서 잠드누나.
내 몸은 생각에 잠잠할 때, 희미한 수풀로서
촌가(村家)의 액(厄)맥이 제(祭) 지내는 불빛은 새여오며
이윽고, 비난수도 머구리소리와 함께 잦아져라.
가득히 차오는 내 심령(心靈)은......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무심히 일어 걸어 그대의 잠든 몸위에 기대여라
움직임 다시 없어, 만(萬)뢰는 구적(俱寂)한데,
희요(熙耀)히 나려 비추는 별빛들이
내 몸을 이끌어라, 무한히 더 가깝게.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걷잡지 못할만한 나의 이 설움
저무는 봄저녁에 저가는 꽃잎
저가는 꽃잎들은 나부끼어라.
예로부터 일러오며 하는 말에도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
그러하다, 아름다운 청춘의 때에
있다던 온갖 것은 눈에 설고
다시금 낯 모르게 되나니,
보아라, 그대려, 서럽지 않은가.
봄에도 삼월의 져가는 날에
붉은 피 같이도 쏟아져 내리는
저기 저 꽃잎들을, 저기 저 꽃잎들을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풀 그늘 어두운데
뒷짐지고 땅 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반딧불 꾀어드는 수풀 속에서
"간다 잘 살아라"하며 노래 불러라.
반달
희멀끔하여 떠돈다, 하늘 위에,
빛죽은 반달이 언제 올랐나!
바람은 나온다, 저녁은 칩구나,
흰물가엔 뚜렷이 해가 드누나.
어두컴컴한 풀없는 들은
찬 안개 위으로 떠흐른다.
아, 겨울은 깊었다, 내 몸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앉는 이 설움아!
가는 님은 가슴엣 사랑까지 없애고 가고
젊음은 늙음으로 바뀌어든다.
들가시나무의 밤드는 검은 가지
잎새들만 저녁빛에 희끄무레이 꽃지듯 한다.
밤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와요
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워와요
이리도 무던히
아주 얼굴조차 잊힐듯해요.
벌써 해가 지고 어둡는데요.
이곳은 인천의 제물포, 이름난 곳,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바다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다만 고요히 누워 들으면
하이얗기 밀어드는 봄 밀물이
눈앞을 가로 막고 흐느낄 뿐이야요.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
일을 필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때.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내려쪼이며
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 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어서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새로운 환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 한번 활기있게 웃고나서, 우리 두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즈런히 가즈런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여, 오오 생명의 향상이여.
봄밤
실버드나무의 거무스렷한 머리결인 낡은 가지에
제비의 넓은 깃나래의 감색(紺色) 치마에
술집의 창 옆에, 보아라, 봄이 앉았지 않는가.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며, 울며 한숨지어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설고 그리운 새카만 봄밤
보드라운 습기는 떠돌며 땅을 덮어라.
봄비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늣으니 으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부모(父母)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부부(夫婦)
오오 안해여, 나의 사랑!
하늘이 묶어준 짝이라고
믿고 살음이 마땅치 아니한가.
아직 다시 그러랴, 안 그러랴?
이상하고 별납은 사람의 맘,
저 몰라라, 참인지 거짓인지?
정분(情分)으로 얽은 딴 두 몸이라면,
서로 어그점인들 또 있으랴.
한평생(限平生)이라도 반백년(半百年)
못 사는 이 인생에!
연분의 긴 실이 그 무엇이랴?
나는 말하려노라, 아무러나,
죽어서도 한 곳에 묻히더라.
부엉새
간밤에
뒷창 밖에
부엉새가 와서 울더니
하루를 바다 위에 구름이 캄캄.
오늘도 해 못보고 날이 저무네.
분(粉) 얼굴
불빛에 떠오르는 샛보얀 얼굴,
그 얼굴이 보내는 호젓한 냄새,
오고가는 입술의 주고받는 잔,
가느스름한 손길은 아르대여라.
거무스레하면서도 불그스레한
어렴풋하면서도 다시 분명한
줄그늘 우에 그대의 목소리,
달빛이 수풀 위를 떠 흐르는가.
그대하고 나하고 또는 그 계집
밤에 노는 세 사람, 밤의 세 사람,
다시금 술잔 위의 긴 봄밤은
소리도 없이 창 밖으로 새여 빠져라.
붉은 조수(潮水)
바람에 밀려드는 저붉은 조수.
저 붉은 조수가 밀어들 때마다
나는 저 바람 우에 올라 서서
푸릇한 구름의 옷을 입고
불같은 저 해를 품에 안고
저 붉은 조수와 나는 함께
뛰놀고 싶구나, 저 붉은 조수와.
비단 안개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요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마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못할 무엇에 취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요
영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루라도 몇번씩 내 생각은
내가 무엇하려고 살려는지?
모르고 살았노라, 그럴 말로
그러나 흐르는 저 냇물이
흘러가서 바다로 든댈진댄.
일로 쫓아 그러면, 이내 몸은
애쓴다고는 말부터 잊으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것을
그러나 다시 내 몸,
봄빛이 불붙는 사태흙에
집짓는 저 개아미
나도 살려 하노라, 그와같이
사는 날 그날까지
살음에 줄거워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뜻이면
오오 그러면 내 몸에는
다시는 애쓸 일도 더없어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삭주구성(朔州龜城)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리요
물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텐고
삭주구성은 산넘어
먼 육천리
산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로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산위에
산 위에 올라서서 바라다보면
가로막힌 바다를 마주 건너서
님 계시는 마을이 내 눈 앞으로
꿈 하늘 하늘 같이 떠오릅니다.
흰모래 모래 빗긴 선창 가에는
한가한 뱃노래가 멀리 잦으며
날 저물고 안개는 깊이 덮여서
흩어지는 물꽃 뿐 안득입니다.
이윽고 밤 어둡는 물새가 울면
물결 좇아 하나 둘 배는 떠나서
저 멀리 한바다로 아주 바다로
마치 가랑잎 같이 떠나갑니다.
나는 혼자 산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해 붉은 볕에 몸을 씻으며
귀 기울고 솔곳이 엿듣노라면
님 계신 창 아래로 가는 물노래
흔들어 깨우치는 물노래에는
내 님이 놀라 일어 찾으신대도
내 몸은 산 위에서 그 산 위에서
고이 깊이 잠들어 다 모릅니다
산유화(山有花)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지네
상쾌한 아침
무연한 벌 위에 들어다 놓은드산 이 집
또는 밤새에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지 못할 이 비.
신개지(新開地)에도 봄은 와서 가냘픈 빗줄은
뚝 가의 어슴푸레한 개버들 어린 엄도 추기고,
난벌에 파릇한 뉘집 파밭에도 뿌린다.
뒷 가시나무밭에 깃들인 까치떼 좋아 지껄이고
개울 가에서 오리와 닭이 마주 앉아 깃을 다듬는다.
무연한 이 벌 심거서 자라는 꽃도 없고 메꽃도 없고
이비에 장차 이름 모를 들꽃이나 필는지?
장쾌한 바닷물결, 또는 구릉(丘陵)의 미묘한 기복(起伏)도 없이
다만 되는대로 되고 있는대로 있는 무연한 벌!
그러나 나는 내버리지 않는다, 이 땅이 지금 쓸쓸타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금 시원한 빗발이 얼굴을 칠때,
예서뿐 있을 앞날의많은 변전(變轉)의 후에
이 땅이 우리의 손에서 아름다와질 것을! 아름다와질 것을!
생(生)과 사(死)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서 늙어서야 죽나니,
그러하면 그역시 그럴 듯도 한 일을,
하필코 내 몸이라 그 무엇이 어째서
오늘도 산마루에 올라서서 우느냐.
설움의 덩이
꿇어앉아 올리는 향로의 향불.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초닷새 달그늘에 빗물이 운다.
내 가슴에 조그만 설움의 덩이.
아내몸
들고나는 밀물에
배 떠나간 자리야 있으랴.
어지른 아내의 남의 몸인 그대요
"아주, 엄마 엄마라고 불리우기 전에"
굴뚝이기에 연기가 나고
돌바위 아니기에 좀이 들어라.
젊으나 젊으신 청하늘인 그대요
"착한 일 하신 분네는 천당 가옵시리라"
애모(愛慕)
왜 아니 오시나요.
영창에는 달빛, 매화꽃이
그림자는 산란히 휘졌는데,
아이, 눈 깍 감고 요대로 잠을 들자.
저 멀리 들리는 것!
봄철의 밀물 소리
물나라의 영롱한 구중궁궐 궁궐의 오요한 곳,
잠 못 드는 용녀의 춤과 노래, 봄철의 밀물 소리.
어두운 가슴 속의 구석 구석......
환연한 거울 속에, 봄구름 잠긴 곳에,
소슬비 내리며, 달무리 둘려라.
이대도록 왜 아니 오시나요. 왜 아니 오시나요.
어버이
잘살며 못살며 할 일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나니,
바이 죽지 못할 것도 아니지마는
금년에 열네살 아들딸이 있어서
순복에 아버님은 못 하노란다.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뜨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숙
나는 혼자 뫼 위에 올랐어라.
솟아 퍼지는 아침 햇빛에
풀잎도 번쩍이며
바람은 속삭여라.
그러나
아아 내 몸의 상처 받은 맘이여
맘은 오히려 저리고 아픔에 고요히 떨려라
또 다시금 이 한때에
사람에게 있는 엄숙을 모두 느끼면서.
여수(여수)Ⅰ
저 오늘도 그리운 바다,
건너다보자니 눈물겨워라!
조그마한 보드라운 그 옛적 심정의
분결같은 그대의 손의
사시나무보다도 더한 아픔이
내 몸을 에워싸고 휘떨며 찔러라.
나서 자란 고향의 해돋는 바다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옛 이야기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오며는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이 눈물에 저는 움니다
제 한몸도 녜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읍니다
그때는 지난 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읍니다
그런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 이야기 뿐만은 남았읍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 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 줍니다
옛날
생각의 끝에는 졸음이 오고
그리움의 끝에는 잊음이 오나니,
그대여, 말을 말아라, 이후부터,
우리는 옛낯 없는 설움을 무르리.
오는봄
봄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쓸쓸한 긴 겨울을 지내 보내라.
오늘 보니 백양의 벋은 가지에
전에 없이 흰새가 앉아 울어라.
그러나 눈이 깔린 두던 밑에는
그늘이냐 안개냐 아지랑이냐.
마을들은 곳곳이 움직임 없이
저편 하늘 아래서 평화롭건만.
새들게 지껄이는 까치의 무리.
바다를 바라보며 우는 까마귀.
어디에서 오는지 종경소리는
젊은 아기 나가는 조곡일러라.
보라, 때의 길손도 머뭇거리며
지향없이 갈 발이 곳을 몰라라.
사무치는 눈물은 끝이 없어도
하늘을 쳐다보는 삶의 기쁨.
저마다 외로움의 깊은 근심이
오도가도 못하는 망상거림에
오늘은 사람마다 님을 여의고
곳을 잡지 못하는 설움일러라.
오기를 기다리는 봄의 소리는
때로 여윈 손끝을 울릴지라도
수풀 밑에 서리운 머릿길들은
걸음걸음 괴로이 발에 감겨라.
오시는 눈
땅위에 새하얗게 오시는 눈.
기다리는 날에는 오시는 눈.
오늘도 저 안온날 오시는 눈.
저녁불 켤 때마다 오시는 눈.
왕십리(往十里)
비가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우리집
이 바루
외따로 와 지나는 사람 없으니
"밤 자고 가자"하며 나는 앉아라.
저 멀리 하늘편에
배는 떠나 나가는
노래 들리며
눈물은
흘러 내려라
스르르 내려감는 눈에.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
또 저 산 넘어 넘어
구름은 가라.
원앙침(鴛鴦枕)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창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눈물은 새우잠의
팔굽베개요
봄꿩은 잠이 없어
밤에 와 운다.
두동달이 베개는
어디 갔는고
언제는 둘이 자던 베갯머리에
"죽자 사자" 언약도 하여 보았지.
봄메의 멧기슭에
우는 접동도
내 사랑 내 사랑
좋이 울것다.
두동달이 베개는
어디 갔는고
창 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춘다.
월색(月色)
달빛은 밝고 귀뚜라미 울때는
우둑키 ㅅ멋없이 잡고섰던 그대를
생각한는 밤이여, 오오 오늘밤
그대 찾아 데리고 서울로 가나?
잊었던 맘
집을 떠나 먼 저곳에
외로이도 다니던 내 심사를!
바람 불어 봄꼿이 필 때에는
어찌타 그대는 또 왔는가.
저도 잊고 나니 저 모르던 그대
어찌하여 옛날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 가는맘.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읍니까!
오늘은 또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 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그려.
허수한 맘, 둘 곳 없는 심사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자주(紫朱) 구름
물 고운 자주 구름,
하늘은 개여 오네.
밤중에 몰래 온눈
솔숲에 꽃피었네.
아침볕 빛나는데
알알이 뛰노는 눈
밤새에 지난 일은.....
다 잊고 바라보네.
움직어리는 자주구름.
장별리(將別里)
연분홍 저고리, 빨간 불붙은
평양에도 이름 높은 장별리
금실 은실의 가는 비는
비스듬히도 내리네 뿌리네.
털털한 배암무늬 돋은 양산(洋傘)에
내리는 가는 비는
위에나 아래나 내리네, 뿌리네.
흐르는 대동강, 한복판에
울며 돌던 벌새의 떼무리,
당신과 이별(離別)하던 한복판에
비는 쉴틈도 없이 내리네, 뿌리네.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읍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제비
하늘로 날아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
일정한 깃을 두고 돌아오거든!
어찌 설지 않으랴, 집도 없는 몸이야!
J.M.S
평양(平壤)서 나신 인격의 그 당신님, J.M.S
덕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재조있던 나를 사랑하셨다.
오산 계시던 J.M.S
십년 봄만에 오늘아침 생각난다.
근년 처음 꿈없이 자고 일어나며.
얽은 얼굴에 자그만 키와 여윈 몸매는
달은 쇠끝같은 지조가 튀어날듯
타듯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
만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님,
소박한 풍채, 인자하신 옛날의 그 모양대로,
그러나, 아 - 술과 계집과 이욕(利慾)에 헝클어져
십오년에 허주한 나를
웬일로 그 당신님
맘속으로 찾으시오? 오늘 아침.
아름답다. 큰 사랑은 죽는 법 없어,
기억되어 항상 내 가슴속에 숨어있어,
미쳐 거츠르는 내 양심을 잠 재우리,
내가 괴로운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나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집생각
산에나 올라서서
바다를 보라
사면에 백열리, 창파 중에
객선만 둥둥......떠나간다
명산 대찰이 그 어디메냐
향안(香案), 향탑(香榻), 대 그릇에,
석양이 산머리 넘어가고
사면에 백열리, 물소리라
"젊어서 꽃같은 오늘날로
금의로 환고향하옵소사"
객선만 둥둥......떠나간다.
사면에 백열리, 나 어찌 갈까
까투리도 산속에 새끼치고
타관만리(他關萬里)에 와 있노라고
산중(山中)만 바라보며 목메인다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고
들에나 내려오면
치어다보라
햇님과 달님이 넘나든 고개
구름만 첩첩......떠돌아간다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
삼수갑산 내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나니 기험타 아하 물도 많고 산 첩첩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루 가자 내 고향을 내 못가네
삼수갑산 멀더라 아하 촉도지난(蜀道之難)이 녜로구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가네
불귀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가네 내 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벗어난다 아하하
천리 만리
말리지 못할만치 몸부림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여 볼까.
한줄기 쏜살같이 뻗은 이 길로
줄곧 치달아 올라가면
불붙는 산의, 불붙는 산의
연기는 한두 줄기 피어올라라.
첫치마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꽃은 지나니 저문 봄에,
속 없이 우나니 지는 꽃을,
속 없이 느끼나니 가는 봄을.
꽃지고 잎진 가지를 잠고
미친듯 우나니, 집난이는
해 다 지고 저문 봄에
허리에다 감은 첫치마를
눈물로 함빡히 쥐어짜며
속없이 우노나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노나, 가는 봄을.
초혼(招魂)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추회(追悔)
나쁜 일까지라도 생(生)의 노력(努力),
그 사람은 선사(善事)도 하였어라
그러나 그것도 허사(虛事)라고!
나 역시 알지마는, 우리들은
끝끝내 고개를 넘고 넘어
짐 싣고 닫던 말도 순막집의
허청(虛廳)가 석양(夕陽) 손에
고요히 조으는 한때는 다 있나니,
고요히 조으는 한때는 다 있나니.
춘강(春崗)
속잎 푸른 고울 잔디
소래라도 내려는 듯,
쟁쟁하신 고운 햇볕
눈 뜨기에 바드랍네.
자주 들인 적은 꽃과
노란 물든 산국화엔,
달고 옅은 인새 흘러
나비 벌이 잠재우네.
복사나무 살구나무,
불그스레 취하였고,
개창버들 파란 가지
길게 늘여 어리이네.
일에 갔던 파린 소는
서룬 듯이 길게 울고,
모를 시름 조던 개는
다리 뻗고 하품하네.
청초(靑草) 청초 우거진 곳,
송이송이 붉은 꽃숨,
꿈같이 그 우리 님과
손목 잡고 놀던 델세.
춘향과 이도령
평양에 대동강은
우리나라에
곱기로 으뜸가는 가람이지요
삼천리 가다가다 한가운데는
우뚝한 삼각산이
솟기도 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과 이도령도 살았다지요
이편에는 함양(咸陽), 저편에 담양(潭陽),
꿈에는 가끔가끔 산을 넘어
오작교 찾아찾아 가기도 했소.
그래 옳소 누이님, 오오 내누님.
해돋고 달 돋아 남원 땅에는
성춘향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풀따기
우리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없는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하늘끝
불현듯
집을 나서 산을 치달아
바다를 내다보는 나의 신세여!
배는 떠나 하늘 끝을 가누나.
하다못해 죽어달래가 옳나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빛이랴 허공이랴,
소리만 남은 내 노래를
바람에나 띄워서 보낼 밖에.
하다못해 죽어달래가 옳나
좀더 높은 데서나 보았으면!
한세산 다 살아도
살은 뒤 없을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지금까지
살아서 이만큼 자랐으니.
예전에 지내본 모든 일을
살았다고 이를 수 있을진댄!
물가에 닳아져 널린 굴껍질에
붉은 가시덤불 벋어 늙고
어둑어둑 저문 날을
비바람에 울지는 돌무더기
하다못해 죽어달래가 옳나
밤의 고요한 때라도 지켰으면
합장(合掌)
나들이, 단 두 몸이랴. 밤빛은 배여와라.
아, 이거 봐, 우거진 나무 아래로 달 들어라.
우리는 말하며 걸었어라, 바람 부는대로.
등불 빛에 거리는 헤적여라, 희미한 하늬 편에
고이 밟은 그림자 아득이고
퍽도 가까이 풀밭에서 이슬이 번쩍여라.
밤은 막 깊어 사방은 고요한데,
이마즉, 말도 안하고, 더 안가고,
길가에 우두커니 눈 감고 마주 서서,
먼 먼 산, 산절의 절 종소리.
달빛은 지새어라.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해가 산마루에 올라와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밝은 아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내게 두고는 끝까지 모두다 당신 때문에 있읍니다.
다시는, 나의 이러한 맘뿐은, 때가 되면
그림자같이 당신한테로 가오리다.
오오, 나의 애인이었던 당신이여.
황촉불
황촉불 그저도 까맣게
스러져가는 푸른 창을 기대고
소리조차 없는 흰 밤에,
나는 혼자 거울에 얼굴을 묻고
뜻없이 생각없이 들여다보노라.
나는 이르노니, "우리 사람들
첫날밤은 꿈속으로 보내고
죽음은 조는 동안에 와서,
별 좋은 일도 없이 스러지고 말아라"
후살이
홀로된 그 여자
근일에 와서는 후살이 간다 하여라.
그렇지 않으랴, 그 사람 떠나서
이제 십년 저혼자 더살은 오늘날에 와서야.....
모두다 그럴듯한 사람사는 일레요.
훗길
어버이님네들 외우는 말이
"딸과 아들을 기르기는
훗길을 보자는 심정이로다"
그러하다, 분명히그네들도
두 어버이 틈에서 생겼어라.
그러나 그 무엇이냐, 우리 사람!
손들어 가르치던 먼 훗날에
그네들이 또다시 자라 커서
한결같이 외우는 말이
"훗길을 두고 가자는 심성으로
아들 딸을 ㄴ도록 기르노라"
희망
날은 저물고 눈이 내려라
낯설은 물가으로 내가 왔을 때.
산속의 올빼미 울고 울며
떨어진 잎들은 눈 아래로 깔려라.
아아 소쇄(蕭殺) 스러운 풍경이여.
지혜의 눈길을 내가 얻을때!
이제금 알기는 알았건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갓 아름다운 눈어림의
그림자뿐인 줄을.
이울어 향기깊은 가을 밤에
우무주러진 나무 그림자
바람과 비가 우는 낙엽 위에.
출처 : 잊혀진 책들의 도시
글쓴이 : 아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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