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출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 점이 바로 러시아 도시문학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위치를 굳히게 하는 한편, 훗날의 토양주의(土壤主義:러시아 메시아니즘)의 주장에서 엿보이는 바와 같은 농민이상화의 경향마저 그에게서 싹트게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특히 W.스콧의 환상적이며 낭만적인 전기와 역사소설에 흥미를 느꼈다.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다음에는 공병국에 근무했으나, 싫증을 느껴 1년 남짓 있다가 퇴직했는데, 때마침 번역 출간된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가 호평을 받은 데 힘을 얻어, 직업작가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은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중편으로서,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을 기치로 하였던 당시 비평계의 거물인 V.G.벨린스키에게 인정되어, 24세의 무명작가는 일약 ‘새로운 고골’이라는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곧 이어 발표한《분신(分身)》(1846)과 《주부》(1847) 등은 벨린스키로부터 심리주의로의 병적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어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무렵부터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백야(白夜)》(1848) 《네트치카 네즈바노바》(1849) 등의 가작을 씀으로써, 인간의 정열의 여러 모습을 탐구하는 한편, F.M.C.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M.V.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로 접근해 갔다. 이 시기의 혁명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창작활동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1849년 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좌되어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그가 인도주의자 ·공상적 혁명가에서 변모하여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 ·인종사상(忍從思想)의 제창자로 사상적 전신(轉身)을 하게 되는 시기였다. 출옥 후 5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는 동안 M.이사에바와 결혼하고, 1859년 말 10년 만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이 허락되었다. 귀환 후 농노해방을 눈앞에 두고 고조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형인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를 창간, 시사문제를 집필하는 한편, 시베리아 옥중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하고 참신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과, 그의 전기(前期) 창작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대받은 사람들》(1861)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으로의 복귀를 확고하게 하였다.
그 다음의 수년간은 농노해방 뒤에 야기된 정치적 반동과 사회적 환멸의 한 시대로서, 또한 그의 개인생활에도 중대한 사건이 겹친 시기였다. 즉, 1862년의 그의 첫 서유럽 여행, 애인 스슬로바와의 이상한 연애체험, 1864년의 그의 아내와 형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의 문학상의 전기(轉機)가 되었으며, 후기의 대작들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일반에게 인정되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864년 잡지 《에포하》를 발행했으나 완전히 실패하여 그는 거액의 빚만 짊어지게 되어 생활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1867년 중편 《노름꾼》(1866)의 구술(口述)이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된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와 재혼한 뒤로는, 빚쟁이의 추궁을 피해 4년이나 해외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그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남기게 되는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그리고 중편 《영원한 남편》(1870) 등을 발표했다.
외유에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그의 만년의 10년간은 장편 《미성년》(1875)과 그의 생애를 통한 사색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79∼1880) 이외에도, 1873년 이후 시사적 수상(隨想)과 문예평론 ·단편 등을 포함한 자유형식의 문집 《작가의 일기》를 썼다. 그가 죽기 반 년쯤 전 푸시킨의 동상제막식에서 행한 기념강연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불우했던 그의 만년을 장식해 주었다.
《죄와 벌》로 시작되는 그의 후기의 대작은 시대의 첨단적인 사회적 ·사상적 ·정치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점에 그의 특색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론적 살인자 라스콜니코프에 있어서의 인간을 추구한 《죄와 벌》, 조화와 화해를 초래할 아름다운 인간 미슈킨 공작(公爵)의 패배를 묘사한 《백치》, 네차예프 사건에서 소재를 얻어 혁명의 조직과 사상의 병리를 묘사한 《악령》, 청년의 야심적 생태를 다룬 《미성년》, 존속살해범을 주제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결시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각 작품에서 다룬 소재가 다르면서도 총체적으로는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의 양극적(兩極的)인 인물상(人物像)인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각기 《백치》의 미슈킨 공작, 《악령》의 스타브로긴으로 계승되며, 나아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조시마 장로와 이반의 대결로 발전하는 것 등이 한 예로서, 그의 작품세계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긍정과 부정’의 상극을 작가 자신과 더불어 체현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상극의 생생함을 ‘폴리포닉한 로망’ 형식 속에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었던 점에서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학과 사상에 끼친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지만, 특히 현저한 것으로는 F.W.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자에 이르는 사상의 계보를 들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온갖 적극성을 부정하는 수난의 철학을 신봉하는 자로서 도스토옙스키를 반동작가로 규정하여 왔으나, 근자에 이런 견해는 다소 약화되어 그의 저작집 등도 새로 출판이 허용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1980년 도스토옙스키전집(전7권)이 정음사에서 간행되었다.
-네이버백과사전
톨스토이(Толсто́й, Tolstoy/Tolstoi)는 러시아의 성씨이다.
-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1817 - 1875) - 러시아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 표트르 톨스토이(1645 - 1729) - 러시아의 외교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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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톨스토이(1823 - 1889) - 러시아의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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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1828 - 1910) - 러시아의 작가,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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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83 - 1945) - 러시아의 소설가
러시아의 작가·개혁가·도덕사상가.
세계적인 소설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를 남겼다. 자신의 대립되는 성향 때문에 깊이 갈등했던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만년에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개인주의적 성향의 귀족으로서, 감각주의자로 시작해 엄격한 청교도로 삶을 마감했으며 보기 드물게 정력적인 사람이었지만 항상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와 같은 유별난 이중적 성격으로 그는 중년에 작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과격한 그리스도교도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후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교훈적인 단편소설, 희곡 등을 통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정부, 교회 등의 제도와 재산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톨스토이/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초기생애와 결혼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
물랭루주
영화 물랭루주는 19세기 파리의 한 댄스홀인 물랭루주를 배경으로 뮤지컬 가수이자 창녀인 샤틴과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영화다. '붉은 풍차'라는 뜻을 지닌 물랭루주는 1889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번화가에 세워진 후 파리지앵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렌치 캉캉'이란 춤을 대유행시켰고, 잔 아브릴 같은 세계적인 무용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한 때 불에 탔다가 영화관이 되기도 했던 물랭루주는 지금도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유명한 댄스클럽이자 관광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물랭루주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된 데에는 영화보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의 공이 더 크다. 영화 물랭루주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을 하는 예술가로 잠깐 등장하는 툴루즈 로트레크는 영화와는 달리 댄스홀 물랭루주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1864년 대부호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14세 때 사고로 왼쪽 허벅지가 부러지고 2년 후 정원을 산책하다가 다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후 성장이 멈추고 말았다.
당시 그의 키는 148㎝. 이를 비관해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13년 동안 물랭루주와 그 주변의 술집과 매음굴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가 그린 물랭루주 포스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물랭루주를 세계적인 명소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로트레크는 유전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화가로 더욱 유명하다. 로트레크가 걸렸던 왜소발육증은 유전적인 영향이 뚜렷한 질병이다. 기형이나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서로 한 쌍을 이루어야 발현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친척일수록 유해한 유전자를 함께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 자식이 유해 유전자를 한 쌍으로 물려받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그의 부모는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로트레크의 왜소발육증은 근친혼의 위험 사례로 자주 인용돼 왔다.
왜소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로트레크의 장애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1962년 프랑스 의사 라미 박사는 로트레크가 '피크노디소스토시스'에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놨다.이 병은 성장기에 조골세포에서 골격을 형성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카테스핀 K에 결함이 생긴 경우 걸리게 되는데, 쉽게 다리가 부러지고 이마가 툭 튀어나오며 머리가 아주 크고 치아가 좋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로트레크 역시 이마가 튀어나왔고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으며 평생 치통으로 고통받았다.
로트레크의 왜소증 유전요인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그의 여동생의 후손들에게 혈액 샘플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후손들은 검사 받기를 꺼렸다. 로트레크의 유해를 꺼내 뼈조각에서 DNA를 채취해 분석하는 것도 단번에 거절했다. 로트레크의 후손들은 그것이 명백히 사생활 침해며, 로트레크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체 장애와 알코올 중독, 조울증으로 점철된 로트레크는 37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유화 7백37점, 판화와 포스터 3백68점, 스케치 5천84점을 남겼다. 물랭루주에서 황폐한 삶을 보냈던 그가 '육체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는 데는 과학자들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생텍쥐페리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는 1900년 6월 29일, 프랑스의 리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Jean-Marie de Saint-Exupery는 보험회사에 근무하였고,
어머니 Marie Boyer de Fonscolombe는 프로방스 지방 출신이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어린왕자」의 주인공과 너무나 흡사하다. 굽슬굽슬한 갈색 머리털을 가진 이 소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소한 일들을 경이와 찬탄으로 바라보았고, 유난히 법석을 떨고 잔꾀가 많은 반면, 항상 생기가 넘치고 영리했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시(詩)를 쓰기도 했고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엉뚱하게도 돛달린 자전거를 고안해 내는 등 그의 창의적 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였고 어떤 하찮은 것도 꼭 기억하는 버릇이 있었다. 무엇이나 새로 시작하는 일이면 정신없이 몰두해 버리고, 감정이 풍부하며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느껴야만 직성이 풀리는 다정다감한 소년이기도 했다.
1913년 스위스의 후리부르에 있는 마르시스트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신과 종교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찬미자였던 그는 형이상학적인 고민과 존재의 허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감지하는데 그쳤을 뿐, 당시 젊은이들이 쉽게 빠졌던 회의주의자는 결코 되지 않았다.
청년 생텍쥐페리의 모습은 자신감에 넘치는 뛰어난 인물이기보다는 매사에 깊이 사고하고, 무슨 일에든 정열적이었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많은 것들을 꿈꾸는,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친절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1917년 6월,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한 후 10월 파리로 건너가 보쉬에 대학에 들어가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으나 구술 시험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1919년 10월 파리 예술 대학에 들어가 15개월간 건축학을 공부했다. 그가 「어린왕자」에 직접 삽화를 그리게 된 것도 이때의 덕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4월 2일, 그는 마침내 군복무를 위해 떠나게 되고, 가르드 지휘관하의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제2항공부대에 편입되었는데, 그가 맡은 임무는 비행기를 수리하는 작업이었다. 전시 조종사가 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그는 6천 프랑의 계약으로 「파르망」에 관한 개인 지도를 받았고 겨우 1시간 20분의 연습만에 「소프위드」라는 비행기를 몬 후, 불길에 싸인 마룻바닥에 기적적으로 착륙하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자격증을 따낸 생텍쥐페리에게 37부대 업무 명령이 내린다.
1923년 1월, 부르제에서 그의 생애 최초로 큰 비행기 사고를 당하여 두개골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 그는 바레스 장군의 호의에 힘입어 직업 공군이 되려고 하였으나 약혼녀의 반대로 3월, 소위로 제대를 하게 된다.
1924년 쏘레 공장의 외무원으로 몽류쏭 지방을 순회하며 18개월 동안 겨우 트럭 한 대만을 파는 반면, 문학에 온 정열을 기울인다
1926년 4월 1일, 쟝 프레보는 「은주(銀舟):Navire d'Argent」이라는 잡지에다 쎙 떽 쥐뻬리의 단편 하나를 게재한다. (「쟉끄 베르니의 탈주」라는 제목의 그 작품은 현재 원고의 행방을 모른다.) 봄에 그는 자동차 회사 외무원직을 그만두고 민간 항공 회사에 취업하여 처녀 비행을 시도한다.
같은 해 10월 11일, 에르 프랑스의 전신인 라떼꼬에르 항공 회사에 입사하여 「야간 비행」의 주인공인 리비에르로 알려진 디디에도라를 알게 되고, 1927년에는 다카르-카사블랑카 사이의 우편 비행을 하면서 밤에는 「남방 우편기」를 집필한다.
1929년 3월, 생텍쥐페리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남방 우편기」를 탈고하여 갈리마르 출판사에 선보인 후 계속 일곱 편의 소설을 쓰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한다. 그해 10월 12일, 그는 아르헨티나 항공 회사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의 임무는 코모도로 리봐다비아와 푼타아레나스의 노선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조종사로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하던 시기이다. 자신이 직접 탐방 비행을 해보는가 하면, 트레레브와 바이아 브랑카 기지도 마련한다. 「야간 비행」을 집필하다.
1930년에는 「남방 우편기」가 출간되었고, 4월 7일에는 민간 항공 업무에 봉사한 대가로 레지옹도눼르훈장을 받는다. 그해 6월 13일에서 20일 사이 생텍쥐페리는 안데스 산맥을 무착륙 비행하며 실종된 친구 기요메를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기요메가 구조되었음을 알고, 그를 비행기에 태우고 멘도자를 거쳐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데려온다. 이 기적과 같은 이야기는 「인간의 대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931년, 우편 항공 회사의 복잡한 사내 사정으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온다. 그해 12월, 「야간 비행」이 페미나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이제 그는 작가로서 공히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야간 비행」은 곧 영어로 번역되고 미국인들에 의하여 영화화되기까지 하나 그의 재정적 궁핍은 여전하기만 했다.
1932년 2월, 더 이상 금전상의 궁핍을 견딜 수가 없어 항공 회사에 다시 취직한다. 겹쳐 오는 재정적 난관과 거기에 따른 정신적 불안으로 생텍쥐페리는 그의 생애 중 가장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1935년 4월 29일 , 일간지 「파리 쓰와르」지의 특파원으로 모스코바를 방문하여 한 달 남짓 머무르면서 그는 에르 프랑스를 위한 강연회도 갖는다.
같은 해 12월 29일, 그는 기관사 프레보를 동반하고 「시문」을 타고 부르제 공항을 떠난다. 이 비행은 1936년 1월 1일까지 앙드레 쟈피의 기록을 깨는 사람에게는 1만 5천 프랑의 보상금을 주겠다는 제의 때문에 시도된 비행이었다. 그는 파리와 사이공간을 47시간 이내에 비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비행 4시간 15분만에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는 리비아 사막에 추락한다. 기관사와 닷새 동안을 걸어 갈증으로 사경을 헤매게되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베두인 대상에게 발견되어 구원이 되는데, 이 사건도 「인간의 대지」에 감명깊게 소개되어 있다.
1937년 6월에는 「파리 쓰와르」지의 특파원으로 내란이 한창인 에스파니아의 카라바쎌과 마드리드 전선에 가서 전투에 관한 기사를 쓴다.
같은 해 9월에는 「시문」기로 뉴욕 - 띠에라 델 푸에고간 장거리 비행에 대한 공군성의 허가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가, 1938년 2월 15일에 출발하여 과테말라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이륙할 때에 속력이 떨어져 추락, 중상을 입는다.
1938년 3월 28일에 뉴욕으로 돌아가 정양을 한 뒤 프랑스로 귀국할 때 그는 몇 해 동안 조종사로 일하며 틈틈이 써 놓은 원고를 가지고 왔는데 그의 대표작인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대지」는 1939년 2월에 출판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이 작품이 「바람과 모래와 별들」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어 「이 달의 양서」로 선정될 만큼 인기를 얻었다.
1939년 「인간의 대지」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받는다.
그해 9월 4일, 예편되었던 생텍쥐페리 대위는 다시 동원되어 공군 지도자 양성 책임을 맡는다. 그는 정보부에서 일해 달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11월 3일, 정찰 임무를 맡고 있는 2-33중대에 들어간다.
1940년 8월 5일,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난 후 다시 「성채(Citadelle)」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1941년 뉴욕으로 돌아와서 「전투 조종사(Pilote de Guerre)」의 집필에 전념, 다음 해 2월 뉴욕에서 「전투 조종사」가 출판되고 최고의 찬양을 받는다.
1943년 2월, 「어느 불모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a un otage)」이 발간되고 4월에는 「어린왕자」가 출판된다.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생텍쥐페리는 알제리에 있는 2-33대 정찰 비행단에 재편입을 위한 교섭을 하여 미국인 지휘관하에 들어가 우즈다에 주둔하고 있는 본대에 1943년 5월에 편입된다.7월 21일, 론느 계곡과 프로방스 지방, 아게이 상공을 날며 정탐하는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다가 대수롭지 않은 사고를 일으켰는데, 이것을 기회로 미국 정부 당국은 그를 예편시킨다.
1944년 5월, 그 당시 폭격 중대를 이끌고 있던 샤쎈 대령은 생텍쥐페리가 그의 중대에 편입되어도 좋다는 상부의 허가를 받는다. 생텍쥐페리는 2-33대 정찰 비행단에 복귀할 희망으로 그 기지로 가서 훈련 비행을 하였고, 지중해 연안 항공 대장인 이카르 장군과의 면담 끝에 5회 이상을 비행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2-33대 정찰 비행단 복귀를 승낙받는다.
그러나 그는 5회의 출격 약속을 어기고 이미 8회의 출격을 마치고도 계속 출격을 고집했기 때문에, 비행 대장은 생텍쥐페리를 8월 1일 남부 지역 공격에 참가시킨 후 더 이상 비행기에 타지 못하도록 결정을 내린다. 마침내 1944년 7월 31일 8시 30분, 그르노블 - 안스씨 지구에 마지막 출격 허락 명령을 받고 이륙했으나 그 길로 그는 영영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코스시카의 바스띠아 북쪽 1백 킬로미터쯤 되는 지역에서 독일군 정찰기에 의하여 격추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11월 3일, 이렇게 하여 조종사이며 위대한 한 사람의 행동주의 작가였던 생텍쥐페리는 군대 명부에 사망자로 기입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44세였다.
베토벤-
본 출생.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 《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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