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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중생의 눈물의 글

bthong 2010. 10. 9. 08:17

 

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아빠의 실직 이유를 난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

가끔 주무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던 모습은, 마치 활동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실직하신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새로 입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 화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나 봅니다.

입사하신지 1개월이 조금 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출장 근무를 자원하셨고,

회사의 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그 이후 늘 출장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삼사 일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2 주로 늘어났고, 요즘 와서는 한 달에 한 번씩만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빠는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 걸어 다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마나 그 구두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원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굽이 다 닳고, 앞은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그 낡은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수선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가장 값싼 운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운동화 역시 한 번 출장을 다녀오시자 금방 낡은 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의 생신 때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 오갈 때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세 2천원이 모아졌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소복이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향해 가던 중, 저 앞에 웬 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중학교 1학년인 남동생이었습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 다니면 피곤해져 성적 떨어지니까 반드시 버스 타고 다니라고 했잖아?"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이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랬잖아."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면서 물었습니다. "누나, 누나는 얼마나 모았어?"


7,500원이란 대답을 들은 동생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것과 합하면 웬만한 구두는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동안 2천원 모았어! 나 잘했지?"

나는 동생이 대견스러워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그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만 원짜리 구두를 샀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며칠 남지 않은 아빠의 생신을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그날만큼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아빠의 생신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먼저 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빠가 오늘 못 오신대, 그러니까 구두를 드릴 수가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 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길 위엔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새 내 눈에서도 뜨거운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에게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