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참고자료

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 작가) [Dostoyevsky, Fyodor Mikhaylovich]

bthong 2010. 11. 11. 07:22

 

 

Dostoevsky라고도 씀.
1821. 11. 11(구력 10. 30) 러시아 모스크바~1881. 2. 9(구력 1. 28)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소설가·언론인.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백치 Idiot〉·〈악령 Besy〉·〈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Bratya Karamazovy〉 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

모스크바 출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 점이 바로 러시아 도시문학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위치를 굳히게 하는 한편, 훗날의 토양주의(土壤主義:러시아 메시아니즘)의 주장에서 엿보이는 바와 같은 농민이상화의 경향마저 그에게서 싹트게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특히 W.스콧의 환상적이며 낭만적인 전기와 역사소설에 흥미를 느꼈다.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다음에는 공병국에 근무했으나, 싫증을 느껴 1년 남짓 있다가 퇴직했는데, 때마침 번역 출간된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가 호평을 받은 데 힘을 얻어, 직업작가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은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중편으로서,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을 기치로 하였던 당시 비평계의 거물인 V.G.벨린스키에게 인정되어, 24세의 무명작가는 일약 ‘새로운 고골’이라는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곧 이어 발표한《분신(分身)》(1846)과 《주부》(1847) 등은 벨린스키로부터 심리주의로의 병적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어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무렵부터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백야(白夜)》(1848) 《네트치카 네즈바노바》(1849) 등의 가작을 씀으로써, 인간의 정열의 여러 모습을 탐구하는 한편, F.M.C.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M.V.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로 접근해 갔다. 이 시기의 혁명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창작활동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1849년 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좌되어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그가 인도주의자 ·공상적 혁명가에서 변모하여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 ·인종사상(忍從思想)의 제창자로 사상적 전신(轉身)을 하게 되는 시기였다. 출옥 후 5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는 동안 M.이사에바와 결혼하고, 1859년 말 10년 만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이 허락되었다. 귀환 후 농노해방을 눈앞에 두고 고조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형인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를 창간, 시사문제를 집필하는 한편, 시베리아 옥중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하고 참신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과, 그의 전기(前期) 창작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대받은 사람들》(1861)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으로의 복귀를 확고하게 하였다.

그 다음의 수년간은 농노해방 뒤에 야기된 정치적 반동과 사회적 환멸의 한 시대로서, 또한 그의 개인생활에도 중대한 사건이 겹친 시기였다. 즉, 1862년의 그의 첫 서유럽 여행, 애인 스슬로바와의 이상한 연애체험, 1864년의 그의 아내와 형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의 문학상의 전기(轉機)가 되었으며, 후기의 대작들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일반에게 인정되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864년 잡지 《에포하》를 발행했으나 완전히 실패하여 그는 거액의 빚만 짊어지게 되어 생활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1867년 중편 《노름꾼》(1866)의 구술(口述)이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된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와 재혼한 뒤로는, 빚쟁이의 추궁을 피해 4년이나 해외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그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남기게 되는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그리고 중편 《영원한 남편》(1870) 등을 발표했다.

외유에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그의 만년의 10년간은 장편 《미성년》(1875)과 그의 생애를 통한 사색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79∼1880) 이외에도, 1873년 이후 시사적 수상(隨想)과 문예평론 ·단편 등을 포함한 자유형식의 문집 《작가의 일기》를 썼다. 그가 죽기 반 년쯤 전 푸시킨의 동상제막식에서 행한 기념강연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불우했던 그의 만년을 장식해 주었다.

《죄와 벌》로 시작되는 그의 후기의 대작은 시대의 첨단적인 사회적 ·사상적 ·정치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점에 그의 특색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론적 살인자 라스콜니코프에 있어서의 인간을 추구한 《죄와 벌》, 조화와 화해를 초래할 아름다운 인간 미슈킨 공작(公爵)의 패배를 묘사한 《백치》, 네차예프 사건에서 소재를 얻어 혁명의 조직과 사상의 병리를 묘사한 《악령》, 청년의 야심적 생태를 다룬 《미성년》, 존속살해범을 주제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결시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각 작품에서 다룬 소재가 다르면서도 총체적으로는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의 양극적(兩極的)인 인물상(人物像)인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각기 《백치》의 미슈킨 공작, 《악령》의 스타브로긴으로 계승되며, 나아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조시마 장로와 이반의 대결로 발전하는 것 등이 한 예로서, 그의 작품세계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긍정과 부정’의 상극을 작가 자신과 더불어 체현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상극의 생생함을 ‘폴리포닉한 로망’ 형식 속에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었던 점에서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학과 사상에 끼친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지만, 특히 현저한 것으로는 F.W.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자에 이르는 사상의 계보를 들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온갖 적극성을 부정하는 수난의 철학을 신봉하는 자로서 도스토옙스키를 반동작가로 규정하여 왔으나, 근자에 이런 견해는 다소 약화되어 그의 저작집 등도 새로 출판이 허용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1980년 도스토옙스키전집(전7권)이 정음사에서 간행되었다.
-네이버백과사전

 

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시인, 소설가

 

           톨스토이(Толсто́й, Tolstoy/Tolstoi)는 러시아의 성씨이다.

 

Tolstoy는 Tolstoi라고도 씀.
1828. 9. 9(구력 8. 28) 러시아 툴라 야스나야폴랴나~1910. 11. 20(구력 11. 7) 랴잔 아스타포보.

러시아의 작가·개혁가·도덕사상가.

세계적인 소설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를 남겼다. 자신의 대립되는 성향 때문에 깊이 갈등했던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만년에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개인주의적 성향의 귀족으로서, 감각주의자로 시작해 엄격한 청교도로 삶을 마감했으며 보기 드물게 정력적인 사람이었지만 항상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와 같은 유별난 이중적 성격으로 그는 중년에 작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과격한 그리스도교도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후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교훈적인 단편소설, 희곡 등을 통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정부, 교회 등의 제도와 재산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톨스토이/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초기생애와 결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툴라 현에 있는 톨스토이 가문의 영지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6세 되던 해에 카잔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형식적인 수업에 실망한 나머지 영지를 관리하며 독학할 목적으로 1847년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골의 삶보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떠들썩한 생활을 더 좋아해 이 2가지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인 죄악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이무렵 써내려간 항목들은 자신의 행동을 억압하는 동기를 사실적으로 탐구하는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준다.
무절제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톨스토이는 군인이었던 형 니콜라이를 따라 1851년 카프카스로 갔고 이듬해 자신도 군에 입대해 산악부족과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는 여가의 대부분을 글을 쓰면서 보냈는데, 잡지 〈소브레멘니크 Sovremennik〉에 발표한 첫번째 작품 〈유년시절 Detstvo〉은 이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유년시절〉의 소재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다루어졌으며, 이무렵 그 자신이 일부를 번역한 영국의 소설가 로렌스 스턴의 〈센티멘털 저니 Sentimental Journey〉식의 서정성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씌어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자서전적이지만 특히 중요한 세부사항에 대한 신선하고 정확한 묘사와 향수 어린 매력을 자아내며, 잊혀진 어린시절의 추억을 재현하는 데 뛰어나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유년시절〉의 속편인 〈소년시절 Otrochestvo〉·〈청년시절 Yunost〉에서는 이 특별한 매력을 찾아볼 수 없는데, 아마도 청소년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카프카스에서 겪은 경험을 전쟁에 관한 첫번째 단편소설인 〈습격 Nabeg〉·〈산림 채벌 Rubka lesa〉에 투영했다. 이들 작품의 주제는 젊은이 특유의 기백으로 다루어져 있으나 군사적인 행동에 관한 정확한 묘사는 잘못된 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훗날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skiye rasskazy〉(1855~56)의 주요특징으로 나타난다.
1854년 도나우 전선으로 배속되어 크림 전쟁중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참여했고, 이때의 경험을 〈세바스토폴 이야기〉에 서술하면서 일반 병사의 진정한 영웅적인 행위와 왜곡되고 과장된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대비시켰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제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그는 자신의 지지를 구하던 사회적·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경쟁 문학 그룹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던 그는 이들 그룹의 합류 요청을 거절하고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갔다. 1857년 그는 프랑스·스위스·독일을 여행했다. 이때의 여행을 바탕으로 쓴 〈뤼체른 Lyutsern〉 등의 작품에 가해진 혹독한 비평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을 잃었으나 창작활동은 계속했다. 1855~63년에는 도덕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당구점수 기록원의 수기 Zapiski markera〉·〈두 경기병 Dva gusara〉·〈알베르트 Albert〉·〈세 죽음 Tri smerti〉·〈가정의 행복 Semeynoye schastye〉·〈폴리쿠슈카 Polikushka〉·〈홀스토메르 Kholstomer〉(1886 출판) 등 일련의 단편들을 썼다. 이들 작품은 훗날 그의 관심사가 된 유물론적 사회가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에 미치는 해독에 관한 문제를 예시하고 있지만, 초기 작품보다 예술적으로 향상된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주관적인 도덕을 강조한 점이 흠으로 남는다. 오로지 〈두 경기병〉에서만 이같은 주관적 논법을 자제하고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작중인물의 한 사람에게 미치는 사회의 나쁜 영향을 교훈적으로 역설하기보다는 예술적으로 시사하고 있다.또 한 예외인 〈홀스토메르〉는 말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을 풍자했는데, 혈통 있는 말의 자연스러운 삶이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러운 인간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용을 통해 독자를 납득시키고 있다. 복잡해진 사회의 오염된 산물과 자연인의 대립에 큰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카자크인들 Kazaki〉에서 뛰어난 솜씨로 이를 다루었다. 이 작품에서 문명인인 주인공은 자신이 사는 마을의 자유분방한 카자크인들과는 반대로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카자크인 중 몇몇은 톨스토이가 창조한 가장 인상적인 인물에 속한다.
1850년대 후반 톨스토이는 농민의 열악한 교육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외국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야스나야폴랴나에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을 예견한 그의 독특한 교육방법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점차 교육연구에 빠져들었다. 1860~61년에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나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벨기에를 돌아보며 교육이론과 실상을 연구·탐사했다. 이 문제에 열중한 끝에 자신이 개발한 교육이론을 수록한 교육잡지를 발간하고, 간단하고 참신한 접근방식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교과서들을 펴냈다. 1862년 톨스토이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지닌 중산층 가정의 소냐(소피아의 애칭)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교육활동을 그만두고 15년간 가정생활에만 전념했다. 이 기간은 대체로 바쁘면서도 행복한 나날이었고 13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는 영지를 훌륭히 관리하면서 창작활동을 다시 시작해 자신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를 탄생시켰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소설들
톨스토이가 7년에 걸쳐 쓴 대서사시 〈전쟁과 평화〉는 일반적으로 세계문학에서 2~3번째로 꼽히는 대소설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온 정열을 쏟아 이전 작품을 훨씬 능가하는 범주와 기법을 구사했다. 여기에서는 인생의 모든 소재가 짜여져 거대한 직물을 만들어내며, 풍부한 자료와 수많은 인물들이 탁월하게 객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그 어떤 소설도 이 작품처럼 사실적인 세부묘사의 능숙함과 상상을 초월하는 정교함, 그리고 다양한 심리분석으로 인생의 전체적인 인상을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시간적인 배경은 1805~14년으로 설정되어 러시아의 5개 귀족가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들 가문의 구성원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생생한 배경 위에 묘사되고 있다. 이 웅대한 파노라마에는 귀족과 농민, 프랑스 황제, 외교관, 궁중신하, 도시생활, 농촌생활, 사실적인 전쟁의 묘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테마는 가문의 이야기에 부속되며 가족의 이야기는 출생·어린시절·성숙기·사랑·결혼·출산·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자연적 단계에 대한 당시 톨스토이의 긍정적인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두 가문의 모델로 자신의 친족을 채택했는데, 불멸의 여주인공 나타샤의 모델로는 처제인 타냐 베르스를 선정했다. 출판된 타냐의 일기를 읽기만 해도 가히 요술이라 부름직한 톨스토이의 예술이 어떻게 타냐를 생명력 넘치고 시적이며 또 '자연스러운' 여인으로 변형시켰는지 알 수 있다. 무능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한 피에르, 세련되고 지적으로 오만한 안드레이, 이 두 주인공의 도덕적인 갈등은 톨스토이 자신의 갈등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한다는 안드레이의 신념은 타인에 대한 봉사를 궁극적으로 믿는 피에르의 입장과 상반된다. 톨스토이는 묘사된 인간 유형에 따라 등장인물의 특징을 부여하는 사실적인 기술법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천박한 사교계의 미인에게는 유려한 외형 묘사를,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은 듯한 복잡한 정서를 가진 여자에게는 심층적인 심리분석을 사용하며, 러시아 민중의 소박함과 진실함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농부 플라톤 카라타예프에게는 예리한 상징주의 수법을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 비평가들이 자주 이의를 제기한 부분은 톨스토이가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하고 전쟁 및 전쟁 구조를 이론화한 부분이다(→ 역사철학). 톨스토이는 이에 대비해 1868년 한 기사를 통해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행동에는 2가지 유형이 있는데, 인간의 의지로 되는 일이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최소한의 자유의지가 있으며, 이른바 역사를 만드는 이들과 군지휘관들의 행동은 수많은 보통사람의 행동에 종속되어 있고 따라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역사가들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을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에게 돌리고 이를 영웅적인 선행이나 악행으로 규정하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라고 규정되어온 정의의 원칙, 형식적인 법과는 무관한 자연법이 자연 자체의 진행과정과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모든 것은 냉혹한 역사적 결정론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전쟁과 평화〉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예술적으로 흠을 남겼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술기법과 문체에서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예술적인 통일성에서는 훨씬 돋보이는 작품이다. 톨스토이의 인생철학은 이 두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변화했다.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인 소설이며 주요등장인물은 도덕적으로 굳건하고 자기 내부의 갈등을 제어하는 데 능숙하다. 반면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안나 카레니나〉는 비관적이며, 그 주인공들은 흔히 내부갈등을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때로 인간적 파멸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라는 작품의 제사(題詞)는 전체 줄거리의 라이트 모티프이기도 하다. 안나가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도덕률을 깨뜨렸다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위선적인 상류사회가 불륜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관습적인 예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론스키를 향한 안나의 사랑은 깊고 지속적인 열정이다. 안나는 위선을 취할 수 없었기에 서슴지 않고 진실된 사랑으로 상류사회에 맞서지만, 상류사회의 독선적인 비난은 사건의 비극적인 결말을 의미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로맨스는 톨스토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바탕으로 기술한 키티와 레빈의 행복한 사랑과 결혼에 대비된다. 또한 삶의 의미에 대한 레빈의 고통스러운 의문,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자살 생각, 농부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등은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이 뚜렷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개혁가로서 톨스토이의 만년
톨스토이는 행복한 결혼생활과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지만 〈안나 카레니나〉 집필을 마칠 무렵에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삶의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그는 정신적인 위기를 겪기에 이르렀다. 그는 〈참회록 Ispoved〉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추구하며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통과 도덕적인 고통을 통렬하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위기는 1879년에 절정에 올랐고 자살을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그는 체계적으로 섭렵했던 철학·신학·과학 서적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으나 평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던 농부들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농부들은 그에게 인간은 신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마침내 톨스토이는 〈신약성서〉에서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야말로 삶의 의미에 관한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담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 모두에게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인간은 이 힘을 느끼고 있다고 선언했다(→ 선과 악).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이 힘에서 유래하며 지각 있는 삶의 목적은 이 힘의 의지를 실천하는 일, 즉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가 한 말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그 말을 정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5계명으로 제시했다. 이는 화내지 말 것, 색정을 품지 말 것, 맹세로써 자신을 구속하지 말 것, 악에 저항하지 말 것, 정의나 불의 모두를 잘 대할 것 등이다. 이 계율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훗날 그 자신의 행동과 가르침의 근간을 이루었다. 톨스토이는 새로운 확신에 기초해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영생설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결과 1901년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또한 강압으로 체제를 유지한다 하여 조직화된 정부 형태에 반대했으며, 소유는 힘에 의해 확보된 것이라고 보고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가족의 요구에 굴복해 법적으로 자신의 영지를 가족에게 양도했다.
정신적인 위기를 거친 톨스토이는 1880년 이후 자신의 종교관·사회관·도덕관·예술관의 여러 측면을 책과 소책자 및 기사로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이들 저술은 〈참회록〉처럼 개인적 경험에 대한 큰 관심이 결여되어 있으나 마찬가지로 명료한 산문체로 씌어 있으며, 많은 부분이 톨스토이 특유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뛰어난 논법을 보여준다. 이처럼 수없이 다양한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러시아 정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교조신학 비판 Issledovaniye dogmaticheskogo bogoslaviya〉, 자신의 종교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쓴 〈나의 신앙 V chyom moya vera〉, 작가 자신의 모스크바 빈민가 체험기이자 빈곤의 원인을 분석한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Tak chto zhe nam delat?〉,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를 종합적으로 기술한 〈신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다 Tsarstvo bozhiye vnutri vas〉를 들 수 있다. 이 마지막 작품에서 그는 악에 대한 무저항 신념을 발전시켰고, 정부는 부유층과 권력층을 위해 존재하며 무력을 사용해 대중을 박해하고 전쟁을 통해 이들을 살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에세이는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관행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왜 인간은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가? Dlya chego lyudi odurmanivayutsya?〉에서는 술과 담배의 사용을, 〈나는 침묵할 수 없다! Ne mogu molchat!〉에서는 혁명가들의 처형을 공박하고 있다. 그밖에 개혁을 요구하는 저술이나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제안한 토지세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헨리 조지에게 보내는 편지 Pisma o genre dzhorzhe〉가 있다. 1897년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Chto takoye iskusstvo?〉의 저술을 끝냈다. 이는 자신의 종교관·도덕관·사회관을 바탕으로 미학체계를 전개하려는 시도였다(→ 예술철학). 그는 한 작품이 예술가의 영혼으로써 독자·청중·관중을 '감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술이라 할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만일 예술가와 청중 사이에 '감화'를 통한 결합이 없다면, 즉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예술로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가 인정한 예술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종교예술'로서, 이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통해 인간을 감화시킨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나 바그너의 몇몇 작품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겸손의 징표만큼 긍지의 표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극단적인 일관된 신념에 따라 톨스토이는 자신의 대작들을 '저급예술'의 범주로 분류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이론의 도덕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 뒤 톨스토이는 수많은 논픽션과는 별도로 도덕적인 목적을 지닌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이전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풍부한 세부묘사 없이 건조한 문체로 씌어졌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Chem lyudi zhivy〉·〈두 노인 Dva starika〉·〈악은 유혹하나 선은 인내한다 Vrazhye lepko, a bozhye krepko〉·〈많은 땅이 인간에게는 필요한가? Mnogo li cheloveku zemli nuzhno?〉·〈3가지 질문 Tri voprosa〉 등은 이같은 새로운 문체로 씌어진 작품들이다. 농부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들은 구성이 훌륭한 작은 걸작으로 '우수한 세계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이들 작품에는 도덕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줄거리의 예술적 통일성까지 침해하지는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쓴 일련의 작품들은 교육받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예전의 소설문체에 훨씬 가깝다.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은 삶의 실패에 직면해 좌절한 인간을 신비롭게 치료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광인일기 Zapiski sumasshedshego〉와 상징적인 평범한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내면에 있는 믿음과 사랑의 불빛을 발견한다는 내용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Smert Ivana Ilicha〉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Kreytserova Sonata〉에서는 성(性)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진다. 사회의 청소년 성교육과 질투에 대한 성급한 논쟁을 설득력 있게 예술적으로 연구한 이 작품은 인간의 도덕적 건강은 순결이라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작가의 새로운 믿음을 기반으로 씌어졌다. 성문제는 톨스토이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일화를 소재로 한 〈악마 Dyavol〉의 중심 테마이다. 사랑하는 젊은 아내가 있지만 남자는 아름다운 농부 처녀에 대한 욕정을 억제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욕정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남편의 모습을 특유의 뛰어난 심리묘사로 그려냈다.
톨스토이가 71세에 쓴 장편소설 〈부활 Voskreseniye〉은 그가 '개종'한 이후에 나온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한 소녀의 정조를 유린한 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녀가 매춘부가 된 뒤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범인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주인공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따라 시베리아로 간다. 여인은 그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지만 끝내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작품에는 매혹적인 시적 분위기로 묘사되는 첫부분을 비롯해 뛰어난 부분이 많으며 재판장면 또한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부활〉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의 예술적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증오의 형적을 담고 있으며 도덕 설교와 사법 및 수형 제도, 교회의 종교의식에 대한 신랄한 공격으로 작가보다는 논객 톨스토이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개종' 이후 톨스토이는 완벽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일상생활을 새로운 견해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술·담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농부처럼 옷을 입었다. 그 누구도 타인의 노동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으면서 직접 자신의 방을 청소하거나 밭일을 하고 자신의 장화를 손수 짓는 등 가능한 한 자급자족하는 삶을 영위하려 했다. 또한 순결이라는 이상에 한층 가까워지고자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육체적인 욕망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또 기아구호조직 같은 박애주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도덕과 종교 저술에서 보여준 능변과 아울러 그의 명성, 생명력 넘치는 인격은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제자들은 그의 계율에 따라 공동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집단거주지를 조성했으나 톨스토이 자신은 그러한 조직적인 노력을 불신했다. 그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진리는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인간들에 의해서만 도달된다고 선언했다. 톨스토이의 명성이 높아져 러시아 전역은 물론 외국으로까지 그의 견해가 알려지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백 명이 야스나야폴랴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아내와 장성한 아들들은 톨스토이의 견해와 변화한 생활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톨스토이의 아내가 '속을 알 수 없는 이들'이라 부른 이 '개종자들'의 끊임없는 방문과 그들 중 한 사람인 V. G. 체르트코프의 집안문제 참견으로 톨스토이 부부는 자주 말다툼을 했다. 그의 희망과는 반대로 아내는 자신의 소유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금욕적인 그의 생활방식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가족의 안락한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남편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1880년 이전에 출판된 작품의 저작권을 얻어냈고, 이들 작품을 직접 출판함으로써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 톨스토이가 말년에 여러 작품의 출판을 보류한 것은 스스로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고, 또 저작권 소유문제로 아내와 다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1911년에 발견된 이러한 작품들은 그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 가운데 길지 않은 장편소설 〈하지 무라트 KhadzhiMurat〉는 러시아군에 투항한 용감한 카프카스 전사가 비밀리에 아들을 만나보려 했다가 죽음을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생생한 서술방법과 서로간의 오해를 심리적으로 파헤친 점은 이 작품을 그의 걸작으로 손꼽게 만들었다. 이보다 짧기는 하나 마찬가지로 뛰어난 작품으로는 욕정과 오만을 극복하고 수도승이 되는 귀족의 이야기인 〈세르게이 신부 Otets Sergy〉, 악을 낳는 악의 힘에 비해 선은 어떻게 선행에 영향을 주는지 가상적인 예를 들어 연구한 〈위조지폐 Falshivy kupon〉, 온갖 불행을 말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한 젊은 농부의 이야기인 〈알료샤 고르쇼크 Alyosha Gorshok〉 등이 있다.
톨스토이가 죽은 후 처음 나온 유고집에는 몇 편의 희곡작품도 실려 있다. 톨스토이는 연극을 '아마도 가장 영향력이 큰 예술분야'라고 믿었고 여러 번 희곡 창작에 매달렸다. 그러나 극작가로서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으며, 그의 희곡이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소설에 견주어 예술적으로 뒤떨어진다. 그의 희곡 중 가장 우수한 〈어둠의 힘 Vlast tmy〉은 1888년 처음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발톱만 붙들려도 새는 끝장 난다'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톨스토이가 만년에 즐겨 다루었던 주제인 농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비극이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유혹함으로써 처음 죄를 짓기 시작해 또다른 죄를 짓고 결국에는 살인까지 하고 만다. 이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계몽의 열매 Plody prosveshcheniya〉는 귀족사회의 결함을 유쾌하게 풍자한 희극이다. 미완성의 〈빛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I svet vo tme svetit〉는 주인공이 가족에게 자기 믿음의 현명함을 확신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다룬 점에서 자서전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살아있는 시체 Zhivoy trup〉(1902 집필)는 한 술꾼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해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죽은 체하나 경찰이 그가 살아 있음을 밝히자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희곡에서는 노년기 작품에 나타나는 도덕 설교를 찾아볼 수 없으며, 대신 온화함과 인간의 실수에 대한 동정,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누리는 편안한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즉 속세의 소유물로부터 해방되고 타인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은둔생활 사이의 괴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느꼈다. 그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자신이 공연한 우스갯거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가정 상황이 악화되자 그는 어느날 밤 몰래 집을 떠났다. 주치의와 막내 딸 알렉산드라만을 데리고 더욱 가까이서 신을 섬기며 조용히 살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나섰으나, 며칠 후인 1910년 11월 20일 랴잔 역의 한 외딴 마을 아스타포보의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톨스토이에 대한 평가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탁월함이 비평가들에게 진지하게 의심받은 적은 없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세계적 작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톨스토이는 앞세대 러시아 작가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외국 작가들, 이를테면 장 자크 루소, 스턴, 스탕달, 그리고 나중에는 윌리엄 새커리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의 명성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오늘날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는 그의 도덕적인 발전과 정신적인 발전의 이중성이 보다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진리를 탐구하면서, 불완전한 지식과 불완전한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려는 강박관념 같은 의무감 때문에 그의 이론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비폭력·교육·예술관을 논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모든 체계적인 연구는 한결같이 그의 사상이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톨스토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정부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믿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했고,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인 경제결정론이나 폭력적 계급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했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컸던 19세기 도덕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물랭루주

영화 물랭루주는 19세기 파리의 한 댄스홀인 물랭루주를 배경으로 뮤지컬 가수이자 창녀인 샤틴과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영화다. '붉은 풍차'라는 뜻을 지닌 물랭루주는 1889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번화가에 세워진 후 파리지앵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렌치 캉캉'이란 춤을 대유행시켰고, 잔 아브릴 같은 세계적인 무용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한 때 불에 탔다가 영화관이 되기도 했던 물랭루주는 지금도 몽마르트르에서 가장 유명한 댄스클럽이자 관광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물랭루주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된 데에는 영화보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의 공이 더 크다. 영화 물랭루주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을 하는 예술가로 잠깐 등장하는 툴루즈 로트레크는 영화와는 달리 댄스홀 물랭루주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1864년 대부호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14세 때 사고로 왼쪽 허벅지가 부러지고 2년 후 정원을 산책하다가 다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후 성장이 멈추고 말았다.
당시 그의 키는 148㎝. 이를 비관해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13년 동안 물랭루주와 그 주변의 술집과 매음굴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가 그린 물랭루주 포스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물랭루주를 세계적인 명소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로트레크는 유전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화가로 더욱 유명하다. 로트레크가 걸렸던 왜소발육증은 유전적인 영향이 뚜렷한 질병이다. 기형이나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서로 한 쌍을 이루어야 발현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친척일수록 유해한 유전자를 함께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 자식이 유해 유전자를 한 쌍으로 물려받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그의 부모는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로트레크의 왜소발육증은 근친혼의 위험 사례로 자주 인용돼 왔다.
왜소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로트레크의 장애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1962년 프랑스 의사 라미 박사는 로트레크가 '피크노디소스토시스'에 걸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놨다.이 병은 성장기에 조골세포에서 골격을 형성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카테스핀 K에 결함이 생긴 경우 걸리게 되는데, 쉽게 다리가 부러지고 이마가 툭 튀어나오며 머리가 아주 크고 치아가 좋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로트레크 역시 이마가 튀어나왔고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으며 평생 치통으로 고통받았다.
로트레크의 왜소증 유전요인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그의 여동생의 후손들에게 혈액 샘플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후손들은 검사 받기를 꺼렸다. 로트레크의 유해를 꺼내 뼈조각에서 DNA를 채취해 분석하는 것도 단번에 거절했다. 로트레크의 후손들은 그것이 명백히 사생활 침해며, 로트레크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체 장애와 알코올 중독, 조울증으로 점철된 로트레크는 37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유화 7백37점, 판화와 포스터 3백68점, 스케치 5천84점을 남겼다. 물랭루주에서 황폐한 삶을 보냈던 그가 '육체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는 데는 과학자들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생텍쥐페리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는 1900년 6월 29일, 프랑스의 리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Jean-Marie de Saint-Exupery는 보험회사에 근무하였고,

 

 어머니 Marie Boyer de Fonscolombe는 프로방스 지방 출신이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어린왕자」의 주인공과 너무나 흡사하다. 굽슬굽슬한 갈색 머리털을 가진 이 소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소한 일들을 경이와 찬탄으로 바라보았고, 유난히 법석을 떨고 잔꾀가 많은 반면, 항상 생기가 넘치고 영리했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시(詩)를 쓰기도 했고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엉뚱하게도 돛달린 자전거를 고안해 내는 등 그의 창의적 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였고 어떤 하찮은 것도 꼭 기억하는 버릇이 있었다. 무엇이나 새로 시작하는 일이면 정신없이 몰두해 버리고, 감정이 풍부하며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느껴야만 직성이 풀리는 다정다감한 소년이기도 했다.
1913년 스위스의 후리부르에 있는 마르시스트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신과 종교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찬미자였던 그는 형이상학적인 고민과 존재의 허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감지하는데 그쳤을 뿐, 당시 젊은이들이 쉽게 빠졌던 회의주의자는 결코 되지 않았다.
청년 생텍쥐페리의 모습은 자신감에 넘치는 뛰어난 인물이기보다는 매사에 깊이 사고하고, 무슨 일에든 정열적이었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많은 것들을 꿈꾸는,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친절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1917년 6월,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한 후 10월 파리로 건너가 보쉬에 대학에 들어가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으나 구술 시험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1919년 10월 파리 예술 대학에 들어가 15개월간 건축학을 공부했다. 그가 「어린왕자」에 직접 삽화를 그리게 된 것도 이때의 덕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4월 2일, 그는 마침내 군복무를 위해 떠나게 되고, 가르드 지휘관하의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제2항공부대에 편입되었는데, 그가 맡은 임무는 비행기를 수리하는 작업이었다. 전시 조종사가 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그는 6천 프랑의 계약으로 「파르망」에 관한 개인 지도를 받았고 겨우 1시간 20분의 연습만에 「소프위드」라는 비행기를 몬 후, 불길에 싸인 마룻바닥에 기적적으로 착륙하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자격증을 따낸 생텍쥐페리에게 37부대 업무 명령이 내린다.
1923년 1월, 부르제에서 그의 생애 최초로 큰 비행기 사고를 당하여 두개골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 그는 바레스 장군의 호의에 힘입어 직업 공군이 되려고 하였으나 약혼녀의 반대로 3월, 소위로 제대를 하게 된다.
1924년 쏘레 공장의 외무원으로 몽류쏭 지방을 순회하며 18개월 동안 겨우 트럭 한 대만을 파는 반면, 문학에 온 정열을 기울인다
1926년 4월 1일, 쟝 프레보는 「은주(銀舟):Navire d'Argent」이라는 잡지에다 쎙 떽 쥐뻬리의 단편 하나를 게재한다. (「쟉끄 베르니의 탈주」라는 제목의 그 작품은 현재 원고의 행방을 모른다.) 봄에 그는 자동차 회사 외무원직을 그만두고 민간 항공 회사에 취업하여 처녀 비행을 시도한다.
같은 해 10월 11일, 에르 프랑스의 전신인 라떼꼬에르 항공 회사에 입사하여 「야간 비행」의 주인공인 리비에르로 알려진 디디에도라를 알게 되고, 1927년에는 다카르-카사블랑카 사이의 우편 비행을 하면서 밤에는 「남방 우편기」를 집필한다.
1929년 3월, 생텍쥐페리는 프랑스로 돌아온다. 「남방 우편기」를 탈고하여 갈리마르 출판사에 선보인 후 계속 일곱 편의 소설을 쓰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한다. 그해 10월 12일, 그는 아르헨티나 항공 회사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의 임무는 코모도로 리봐다비아와 푼타아레나스의 노선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조종사로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하던 시기이다. 자신이 직접 탐방 비행을 해보는가 하면, 트레레브와 바이아 브랑카 기지도 마련한다. 「야간 비행」을 집필하다.
1930년에는 「남방 우편기」가 출간되었고, 4월 7일에는 민간 항공 업무에 봉사한 대가로 레지옹도눼르훈장을 받는다. 그해 6월 13일에서 20일 사이 생텍쥐페리는 안데스 산맥을 무착륙 비행하며 실종된 친구 기요메를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기요메가 구조되었음을 알고, 그를 비행기에 태우고 멘도자를 거쳐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데려온다. 이 기적과 같은 이야기는 「인간의 대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931년, 우편 항공 회사의 복잡한 사내 사정으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온다. 그해 12월, 「야간 비행」이 페미나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이제 그는 작가로서 공히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야간 비행」은 곧 영어로 번역되고 미국인들에 의하여 영화화되기까지 하나 그의 재정적 궁핍은 여전하기만 했다.
1932년 2월, 더 이상 금전상의 궁핍을 견딜 수가 없어 항공 회사에 다시 취직한다. 겹쳐 오는 재정적 난관과 거기에 따른 정신적 불안으로 생텍쥐페리는 그의 생애 중 가장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1935년 4월 29일 , 일간지 「파리 쓰와르」지의 특파원으로 모스코바를 방문하여 한 달 남짓 머무르면서 그는 에르 프랑스를 위한 강연회도 갖는다.
같은 해 12월 29일, 그는 기관사 프레보를 동반하고 「시문」을 타고 부르제 공항을 떠난다. 이 비행은 1936년 1월 1일까지 앙드레 쟈피의 기록을 깨는 사람에게는 1만 5천 프랑의 보상금을 주겠다는 제의 때문에 시도된 비행이었다. 그는 파리와 사이공간을 47시간 이내에 비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비행 4시간 15분만에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는 리비아 사막에 추락한다. 기관사와 닷새 동안을 걸어 갈증으로 사경을 헤매게되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베두인 대상에게 발견되어 구원이 되는데, 이 사건도 「인간의 대지」에 감명깊게 소개되어 있다.
1937년 6월에는 「파리 쓰와르」지의 특파원으로 내란이 한창인 에스파니아의 카라바쎌과 마드리드 전선에 가서 전투에 관한 기사를 쓴다.
같은 해 9월에는 「시문」기로 뉴욕 - 띠에라 델 푸에고간 장거리 비행에 대한 공군성의 허가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가, 1938년 2월 15일에 출발하여 과테말라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이륙할 때에 속력이 떨어져 추락, 중상을 입는다.
1938년 3월 28일에 뉴욕으로 돌아가 정양을 한 뒤 프랑스로 귀국할 때 그는 몇 해 동안 조종사로 일하며 틈틈이 써 놓은 원고를 가지고 왔는데 그의 대표작인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대지」는 1939년 2월에 출판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이 작품이 「바람과 모래와 별들」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어 「이 달의 양서」로 선정될 만큼 인기를 얻었다.
1939년 「인간의 대지」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받는다.
그해 9월 4일, 예편되었던 생텍쥐페리 대위는 다시 동원되어 공군 지도자 양성 책임을 맡는다. 그는 정보부에서 일해 달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11월 3일, 정찰 임무를 맡고 있는 2-33중대에 들어간다.
1940년 8월 5일,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난 후 다시 「성채(Citadelle)」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1941년 뉴욕으로 돌아와서 「전투 조종사(Pilote de Guerre)」의 집필에 전념, 다음 해 2월 뉴욕에서 「전투 조종사」가 출판되고 최고의 찬양을 받는다.
1943년 2월, 「어느 불모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a un otage)」이 발간되고 4월에는 「어린왕자」가 출판된다.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생텍쥐페리는 알제리에 있는 2-33대 정찰 비행단에 재편입을 위한 교섭을 하여 미국인 지휘관하에 들어가 우즈다에 주둔하고 있는 본대에 1943년 5월에 편입된다.7월 21일, 론느 계곡과 프로방스 지방, 아게이 상공을 날며 정탐하는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다가 대수롭지 않은 사고를 일으켰는데, 이것을 기회로 미국 정부 당국은 그를 예편시킨다.
1944년 5월, 그 당시 폭격 중대를 이끌고 있던 샤쎈 대령은 생텍쥐페리가 그의 중대에 편입되어도 좋다는 상부의 허가를 받는다. 생텍쥐페리는 2-33대 정찰 비행단에 복귀할 희망으로 그 기지로 가서 훈련 비행을 하였고, 지중해 연안 항공 대장인 이카르 장군과의 면담 끝에 5회 이상을 비행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2-33대 정찰 비행단 복귀를 승낙받는다.
그러나 그는 5회의 출격 약속을 어기고 이미 8회의 출격을 마치고도 계속 출격을 고집했기 때문에, 비행 대장은 생텍쥐페리를 8월 1일 남부 지역 공격에 참가시킨 후 더 이상 비행기에 타지 못하도록 결정을 내린다. 마침내 1944년 7월 31일 8시 30분, 그르노블 - 안스씨 지구에 마지막 출격 허락 명령을 받고 이륙했으나 그 길로 그는 영영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코스시카의 바스띠아 북쪽 1백 킬로미터쯤 되는 지역에서 독일군 정찰기에 의하여 격추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11월 3일, 이렇게 하여 조종사이며 위대한 한 사람의 행동주의 작가였던 생텍쥐페리는 군대 명부에 사망자로 기입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44세였다.

 

베토벤-
본 출생.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 《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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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Pop 과 Saxo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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