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로록(戒老錄)Ⅰ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소노 아야코)-
나는 이제 노인이다. 나 스스로도 나를 보는 남도 그렇게 본다.
물론 인생은 60부터이다. 또 노령화시대에 노인으로 보다는
젊게 살아야한다는 말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늙음이란 급류에 떠밀리다가 후미진 난간 하나 붙들고 휘청거리는
안간힘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다 쓰러지고, 다 떠나가고, 후줄근히 껍질만 남아
갈 숲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종종걸음은 목마름으로 더욱 바쁘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던 중 소노 아야꼬의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읽게 되었다.
그리고 늙음도 결코 그냥 늙어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년이란 말을 숙년(熟年)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만년(晩年)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서문이 참 마음에 든다. 그리고 만년(晩年)이란 나이에 관계없이 가능하며,
일종의 시적인 정적과 우아함을 풍겨서 좋다는 작가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한다.
인간은 최후까지 불완전한 것이다라는 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작가의 서문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이 계로록(戒老錄)에 나온 그야말로 노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은 너무 많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 잘 해 오고 있는 것도 있지만, 전혀 생각도 못 한 일들도 무척 많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도 있지만 부정적인 요소를 지닌 것도 많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공감한 것들을 몇 개 옮겨보려고 한다.
작가가 첫째주제로 삼은 ‘엄중한 자기구제’에서
‘노인이라는 것은 지위도, 자격도 아니다’
노인이라는 것을 일종의 자격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몇 일 전 학교 식당에서 젊은 교수들과 점심을 먹는데,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노인 어쩌구 하기에 내가 무심코
‘노인 앞에서 노인 노인하지 말지, 듣는 노인 불쌍하게..’하 하 하
물론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였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이다.
스스로 노인임을 자위하는 말이다. 나는 지금 거의가 나보다 젊은 사람들과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늙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오늘처럼 엉뚱한 말을 할 때가 때론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좌석에 앉은 젊은이들 앞에 서서
자리를 양보하기를 바라는 노인들은... 자리를 양보 받을 자격이 있다는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노인들, 바로 노인이라는 것을 지위로 자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른지....
<명랑 할 것>
나이가 들면서 인내심이 약해진다. 몸이 쇠약해지고 능력이 줄어들고
친구가 세상을 뜨고, 마음은 당연히 어두워지고 슬퍼진다.
외형만이라도 좋다 마음속에서 부터 명랑할 수는 없지만 외형만이라도 명랑하게 보이자
명랑하게 행동하는 것은 세상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젊음을 시기하지 않을 것, 젊은 사람을 대접할 것>
인간에게는 두 번의 시기가 있다. 양육되는 시대와 양육하는 시대,
우리들은 음식물과 지식을 부여받아 한 인간으로 자라난다.
그리고는 서서히 타인을 양육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노인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은 그보다 고령인 사람들에게 예우하고 싶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차차 젊은이들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행위를 해야 한다.
노인이 되어서도 매사에 자신이 전면에 나서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진취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어른답지 못하다.
노인이 제일 먼저 잃는 것은 ‘어른다움’이다.
노인은 언뜻 보기에 누구나 쉽게 단념하는 듯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어른다움’이란 스스로는 뒷전으로 물러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타인에게 이득이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을 어느 정도 희생하며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한 번은 젊고 한 번은 늙는다. 이만큼 공평한 흐름을 시기하는 것은 탐욕이다.
<생활의 외로움은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
외로움은 노인에게는 공통의 운명이자 최대의 고통이다.
누군가 말상대를 해주거나, 어딘가 데리고 거주거나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해서는 안 된다. 매일 함께 놀아주거나, 말동무를 해줄 사람을
늘 곁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노인이든 스스로
목표를 설정해야만 한다. 살아가는 즐거움이란 스스로가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같은 연배끼리 사귀는 것이 노후를 충실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노인은 왠지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에게 친구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타인을 향한 진정한 관심이 없거나,
둘째로 다소 허세를 부리는 끼가 있어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이지 못하거나,
셋째로 관용심이 없는 것으로 들 수 있다.
노인들에게 이 세 가지 모두 서투른 일들인지도 모른다.
무턱대고 방문하거나, 불러내거나, 일을 부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배려는 결코 밖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어야한다.
이것은 바로 노인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노인에 있어서 정말로 상대가 되어 줄 수 있는 상대는 노인뿐이다.
노인끼리라면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상대해주는 일 없이 대등하게 사귈 수 있다.
자연스럽게 주어진 온화한 인간관계를 최대한 잘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공격적이지 말 것.>
나이가 들면서 유순해 지는 사람도 많으나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인격이 황폐해지고
툭하면 금새 남의 험담을 늘어놓거나 비난하는 노인이 의외로 많다.
공격적이지 않으려면 남이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남의 행동을 고쳐주려는 생각은 갖지 말아야한다.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마구잡이
화풀이라고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 연장자가 되어도 자신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노년의 아름다움이란 양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일 것이다.
설사 주위 사람들이 늘 상석에 앉혀주고, 최고 연장자라며 추켜세우더라도,
결정은 장년기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노년은 앞으로 무한정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 세대가 항상 결정권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계획대로 된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계획하고 노인이 될 수 있을까? 다만 늙음을 자각할 수 있고
주관적으로 괴로워 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 밖에
그 어느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2편에 계속)
13
<서문> 중
나는 극도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입장에서, 노인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중증 치매에 대해서는 거의 공포감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그렇게 되면 이미 나는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가 이 점에 있어서 힘들다 해도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게 싫다면 내가 어딘가에 공공연하게 버려질 수도 있겠지만, 정신이 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별로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이므로 태연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일 때다. 늙음을 자각할 수 있고 주관적으로 괴로워할 입장에 놓여진 상태가 두려운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불가능에 가까운 자기 구제를 시도하는 것, 이렇게 내면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늙음에 대한 것이다.
33
남이 '주는 것',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주겠지' 하고 기대하는 정신 상태는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포기하는 증거이다.
36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일단 포기할 것
'어렵더라도 어떻게 좀'이라는 말은 어떻게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안 됐을 때의 불편함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다.
117
고정관념을 버릴 것
노인이 과거의 경험만을 믿고 직감력으로 쇠퇴한 기능을 보충하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될 수 있는 한 유연한 관찰과 논리 구성을 반복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젊은이는 주간지 등과 같은 것을 별로 읽은 필요도 없지만 오히려 노인에게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180
허둥대거나 서두르지 않고 뛰지 않는다
이제는 발 빠르게 무엇인가를 할 때는 아니다. 서두르는 일은 노년에 아무런 좋은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중략) 전철이 이미 와 있다고 해도 뛰어갈 필요는 없다. 전철은 다음 것을 타면 그만이다. 전철 한 대를 기다리는 동안에 세상을, 젊은 아가씨를, 재미나는 광경을, 그 밖의 여러 가지를 볼 수가 있다. 서두르는 것보다 기다리는 편이 훨씬 좋은 것이다.
ㅡ
일본의 소설가 소노 아야코가 1972년에 발표했던 책으로 무려 세 번이나 개정되어 출간되었다. 책이 시작하기에 앞서 서문이 세개나 있는데 서문부터 명필이라 본문을 읽기도 전에 작가의 통찰력에 감동을 받는다.
이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젊은 나이부터 이런 생각을 했는지.. 놀랍기도 하고, 이런 괜찮은 책을 내가 노년이 되기 전에 발견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소노 아야코가 말하길, 이 책은 젊었을 때부터 '이런 노인은 되지 말자'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적어놓았던 메모를 단지 엮은 것 뿐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에휴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하야지' 하고 노인들의 철 없는(?)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이를 먹는다면 저 분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따뜻한 관찰자 시선과 또 자기 반성을 통해 쓰여진 느낌이 많이 든다.
물론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경계하고 싶은 모습에 대한 묘사가 매우 날카로운데, 그 중에서도 어떤 상태가 '노인'인가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땐 특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장 많이 느끼고 있고 또 피하고 싶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이란, 나이에 관계없이 '받는 것'을 요구하게 된 사람을 말한다. 그럼 몸이 불편해서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생활할 수 없덨던 사람들도 다 노인이냐? 그건 아니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받을 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노인은 아니라고 한다. '받는 것'을 쉽게 요구하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 그것이 불행한 노년의 모습이다.
고령화 사회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같은 시대에는 잘 늙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또 어려운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물론 이 불안하고 변화무쌍한 젊은 날을 잘 보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에도 벅차지만.. 이제 슬슬 나도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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