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테고리

"상상 속에서 난 하루 종일 너와 사랑을 나눠"

bthong 2014. 5. 1. 05:24

 

속죄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여자- 이언 매큐언 '속죄'의 브리오니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러면서 비밀스럽고, 늘 몽상 속에서 사는 열세 살 소녀. 브리오니다. 고위공무원인 아빠,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엄마와 온화한 오빠, 브리오니에게 찬사를 바치는 언니와 유서 깊은 저택과 잘 관리된 정원을 가진 소녀다. 그녀는 평생 속죄 하게 된다.

소녀 시절부터 노년이 될 때까지. 왜? 그녀의 거짓말 때문에. 물론, 그녀가 그 ‘결정적인 말’을 할 때 브리오니는 그것이 거짓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토록 여러 사람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 왜? 어렸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직관이 있으며, 그 힘이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다. 브리오니는 남다른 아이였다. 그 남다름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게 했다.(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던 남자, 그래서 자신마저 속일 수밖에 없던 남자로는 개츠비가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그 개츠비다.)
'속죄'는 '어톤먼트'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다. 비밀을 사랑하는 소녀 브리오니는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다.
'속죄'는 '어톤먼트'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다. 비밀을 사랑하는 소녀 브리오니는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다.
1935년의 영국이다. 탈리스가(家)에는 친척 아이들이 놀러온다. 쌍둥이 형제와 그들의 누나인 롤라. 성폭행이 일어난다. 브리오니는 어떤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떠나는 현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봤어. 내가 봤어.” 롤라에게 묻는다. “그 사람이었어. 그렇지?” 브리오니가 지목한 사람은 로비. 탈리스가 가정부의 아들이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혼내서 옷을 벗게 하는 장면을 목격했으며,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보낸 편지를 훔쳐봤다. 음탕한 편지에 브리오니는 충격을 받는다. “상상 속에서 난 하루 종일 너와 사랑을 나눠.”와 함께 여성의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말이 편지에 있었으므로. 또 브리오니는 자신의 언니와 로비가 서재에서 섹스하는 장면도 목격한다. 사랑하는 언니 세실리아를 로비가 강제로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열세 살의 브리오니다. 이 연속적인 일들로 브리오니에게 ‘로비=위험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브리오니는 경찰관에게 이렇게 진술한다. “네, 내가 그를 봤어요. 내가 그를 봤어요.”라고.

로비는 감옥에 간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전쟁에 나간다. 1940년이다.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당연히 세실리아와는 만날 수 없다. 로비는 브리오니에게 복수를 꿈꾼다. 브리오니는, 수련 간호사가 되어 있다. 문학은 잠시 접은 채 전쟁터에 있는 로비를 생각하면서. “그녀만의 비밀스런 고통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격변은 항상 서로 다른 세계의 일처럼 보였는데, 전쟁이 그녀의 범죄를 얼마나 더 무겁게 만들 수 있는지” 브리오니는 깨닫는다. 그러다 진짜 범인을 알게 된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증언이 거짓이었음을 사람들에게 밝히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세실리아에게 보낸다. 답장이 없는 언니를 찾아갔다가 로비와 마주친다. 로비는 브리오니에게 묻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지?” 브리오니는 답한다. “철이 들고 있으니까요.”
서재에서 세실리아와 로비 사이에 '그 일'이 일어나기 전. 브리오니는 그 둘을 목격한다.
서재에서 세실리아와 로비 사이에 '그 일'이 일어나기 전. 브리오니는 그 둘을 목격한다.

전쟁은 끝난다. 브리오니는 작가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한 거짓말에 대해 여러 번 되풀이해 쓴다. 첫 원고는 1940년 1월에, 마지막 원고는 1999년 3월에 완성된다. 그 사이에 여섯 개의 원고가 더 있다. 마침내 나는 알게 된다. 브리오니는 세실리아와 로비를 만난 적이 없음을. 로비는 1940년 6월에 패혈증으로, 세실리아는 같은 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고 작가는 적는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라고도. “연인들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 할까?”라고도.

작가가 된 브리오니는, 자신 때문에 헤어진 죽은 연인들을 만나게 했던 것이다. 그게 브리오니가 할 수 있는 속죄의 하나였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적는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이렇게 적을 수 있다니, 소설가란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