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진은 그저 꿈일뿐, 우선 파는게 꿈” | |||
“정말 밑지고 파는 겁니다.” 엄살 부리며 하는 얘기가 아니다. 불황의 그늘이 짙은 2009년 대한민국 유통업계는 살아남기 위한 제 살 깎기가 한창이다. 70% 이상 몸값을 깎고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5년 전’ ‘10년 전’ 가격표를 붙였다. 정상가는 의미가 없다.
숫자는 무의미해졌다. 고객이 비로소 손을 뻗어 잡을 때만이 의미가 있다. 바야흐로 ‘가격 몰락의 시대’다. 파격가 상품엔 눈물이 배어 있다. 마진을 포기한 지도 오래다. 음식, 의류에서 여행사, 대형마트까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기는 똑같다.
애경백화점에서는 11일까지 정상가가 80만원인 남성정장을 단돈 2만9000원에 팔았다. 판매가 뚝 끊긴 남성정장을 팔기 위해 내놓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당연히 남는 마진은 0%. 한 업체 관계자는 “이렇게라도 해야 다음 시즌을 준비할 수 있다”면서 “마진을 아까워했다간 장사 못해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철을 맞은 스키용품이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다. 겨울스포츠용품 업계도 80%에 가까운 초특가 세일에 동참했다. 지난 8일 찾은 명동 ‘A1 아웃렛’ 스키, 보드복 매장에서는 최대 80%까지 스키용품을 할인판매하고 있었다. 성수기임에도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애꿎은 가격표만 덕지덕지 붙었다.
14만원이라고 적혀 있던 재킷의 가격표는 몇 겹의 스티커가 더 붙어 5만원으로 바뀌었고, 23만6000원짜리 스키복 바지는 3만5000원으로 수정돼 있었다. 전가풍 아웃렛 관계자는 “그나마 파격할인 행사 후 매출이 늘었다”면서 “마진 생각하면 씁쓸하지만 재고가 쌓이는 것보다는 낫다. 창고비용이 더 든다”고 덧붙였다.
추운 겨울이 비수기인 아이스크림 전문점들은 1000원대의 커피를 판매하며 고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레드망고와 구스띠노 명동점에서는 아메리카노 커피를 각각 1900원, 1000원에 판매한다. 신용진 구스띠노 명동점 매니저는 “커피 판매만으로는 수익이 나지 않지만 고객들이 더불어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기 때문에 고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 대형마트의 전유물이었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가격표’는 이젠 업종을 불문하고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던킨도너츠에서는 던킨 오리지널 커피를 5년 전 가격인 1900원에 판매한다. 정상가는 2200원. 고객 유치를 위해선 300원의 손해쯤은 감수한다는 각오다. 8일 찾은 강남본점에서는 행사 첫날임에도 방문고객이 30% 정도 증가했다.
엔고로 힘든 한 해를 보냈던 여행사도 눈물의 결단을 내렸다. 에프아이투어에서는 15만원가량의 마진을 포기하고 11년 전 가격인 ‘100만원으로 가는 일본 신혼여행 3박4일’ 상품을 내놨다. 정상적으로 하면 150만원 이상 되는 상품 구성이다.
정희연 에프아이투어 팀장은 “손님이 안 온다고 앉아만 있으면 진짜 죽는다”며 “손해를 보더라도 떠나간 고객을 다시 잡아오기 위해서는 제 살 깎기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마트 등 대형마트에서도 지난해 경기침체가 본격화되자 앞다퉈 ‘15년 전’ ‘20년 전’ 가격으로 생필품을 판매했다. 밑지더라도 하나라도 더 팔아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현실이다.
황혜진ㆍ박세준(인턴) 기자/hhj6386@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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