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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숭례문..’을 42년만에 부르게 된 사연 / 이석

bthong 2009. 2. 24. 09:25

 

 

CBS탐사보도팀 문영기 선임기자

"낙선재에 계시던 순종 왕후께서 어머니와 나를 부르셨다. 내 손을 붙잡고는 “나라가 망하더니 왕손이 광대가 됐구나..”하시며 통곡을 하셨다. TV에 나온 내 모습을 보신 모양이다.."

왕손으로 태어나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가수 이석씨가 42년만에 새 앨범을 내놨다. ‘아! 숭례문’이라는 제목의 탄식같은 새 노래는 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일까? 7순이 가까운 나이에 발표한 이 노래로, 그는 ‘앙코르’를 받는 인생의 화려한 피날레를 연출할 수 있을까. 문영기의 독(獨)한 인터뷰에서 이석씨를 만났다.


 

 

 

◈ 왕위계승 1순위의 왕자 이석



그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부르는 호칭은 ‘할아버지’였다. 그는 줄곧 “이성계 할아버지께서..”라며 가문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석씨는 현재 왕위계승 1순위의 직계 왕자다.

그의 아버지는 의친왕,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둘째 동생이다. 순종은 후사가 없었고, 큰 동생 영친왕의 이진, 이구 왕자는 모두 세상을 떴다. 그리고 둘째 동생 의친왕은 12명의 아들을 뒀는데, 이들 가운데 현재 4명이 생존해 있고, 이석씨를 제외한 3명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왕실이 복원된다면, 그는 엄연한 ‘임금님’이시다.



◈ ‘아, 숭례문..’을 42년만에 부르게 된 사연

“작년 7,8월쯤 인가.. 심수천이라는 작곡가가 나를 찾아왔다. 불탄 숭례문을 소재로 노래를 작곡했다는 것이다. 가사를 보니 의미가 좋았다. 하지만, 육십이 넘은 내가 노래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는데.. 막상 녹음실에서 테스트를 해보니, 녹음 기사들이 3,4십대 목소리가 난다고 해서, 맥주 한 병 들이키고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녹음은 끝났다. 42년동안 기다려온 음반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 숭례문’을 부르겠다는 용기를 낸 것은 당연히 숭례문 화재 사건이 계기가 됐다. 홍천의 한 콘도에서 숭례문이 불타는 광경을 TV로 본 이석씨는 그날 5시간을 통곡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그렇게 서럽게 울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전주 승광재에서 설날 3천명에게 세배를 받았더니, 허리가 너무 아파 견딜 수 가 없었다. 아는 후배에게 부탁해, 콘도를 얻었다. 그날 쉬고 있는데 숭례문에 불이 난 거다. 국보 1호가 이 지경을 당했구나..설움이 밀려왔다” 꼭 불타는 남대문의 처참한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름진 한평생의 한(恨)과 설움도 같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 ‘비둘기 집’ 같이 순탄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 유전(流轉)

이석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바로 ‘비둘기 집’을 떠올린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 70년대만해도 이 노래는 결혼식 축가 1순위의 노래였다. 그리고 사실상 이석씨의 처음이자 마지막 히트곡이다. 하지만, 이석씨의 인생은 그의 노래처럼 평탄하지 않았다.

이석씨가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혁명(5.16 군사혁명)이 나고 나서, 누가 창덕궁에 있는 구황실 사무총국에 방화를 했다. 황실의 자료가 모두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한달에 한번씩 내가 직접 생활비를 타러 가던 곳이다. 그 뒤에는 지원금이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60년 미 8군무대였다. 부산,오산,군산,전곡,판문점등 미 8군이 있는 곳은 어디든 다녔다. TV가 생기면서 활동영역도 점점 넓어졌다. KBS,MBC,TBC등 공중파를 넘나들며, 쇼 사회를 보기도 했고, 밤 무대에도 섰다.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보다 군사정권의 탄압이 더 무서웠다.

79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그나마 살고 있던 궁에서도 쫒겨났다.




◈ “경복궁 대문으로 차를 몰아...”

궁에서 쫓겨난 이석은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연히 불법이민이다.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그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위장결혼까지 감행했다. 이석씨는 시민권을 갖고 있는 한국 여성에게 만 5천달러를 건네고, 영주권을 얻었다. 하지만 결국 10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돌아온 고국에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밤무대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이미 나이 들어버린 추억의 가수를 써주는 업소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오대산 월정사로 무작정 찾아 갔다. 하지만, 그의 팬이었던 주지스님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가서 노래하시고, 국민을 즐겁게 하시면 그게 부처 아닙니까..”

거처할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이석은 결국 찜질방에서 유서를 썼다. “내가 타던 지프를 몰고, 경복궁 대문(광화문을 의미하는 듯)에 부딪치고 죽겠다고, 유언장을 써놨다.” 하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써내려간 그 유서는 하필이면 찜질방에 와 있던 어떤 기자의 눈에 띄었다.

“왕손 형님, 이거 국민에게 알려야겠습니다. 그래서 알리지 말라고, 우리나라 국민이 건망증이 많아서 대구 지하철 참사, 성수대교 무너진 거 다 잊어버렸다. 그거 신문에 나봐야 그 다음날 잊어버리니까 관두자 그랬다.” 하지만 그 다음날 그의 사연은 어떤 주간잡지에 실렸고, 그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 MB와의 인연, “뱀이 용이 됩시다”

그는 전주 승광재에서 5년째 살고 있다. 자살 시도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전주시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했다. 이제 비교적 안정을 찾았다. 현재 그의 직함은 황실문화재단 총재다. 황실복원을 위해 전국을 다니며 홍보, 강연활동을 하고 있고, 대학에도 출강한다. 황실복원은 이제 그의 마지막 인생의 목표다.

이석씨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소개했다. 이석씨와 이대통령은 41년생 뱀띠 동갑이다. “이대통령은 재작년 대통령 되기 전에 만났다. 대권 꿈을 가지고 있던 MB에게 대통령이 되시면 뱀띠가 용(龍)이 됩니다. 그리고 나라 잘 다스리시고 직계 왕손이 있으니까, 품위를 좀 유지시켜 주십시오 했어요.. 그랬더니, 알겠습니다. 그러셨는데..”

이석씨는 대통령과의 독대를 요청했는데, 한 차례 연락이 와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만남이 성사돼도 그의 바람대로 황실복원작업이 쉽사리 이뤄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석씨는 스페인을 예로 들었다. 스페인은 프랑코 총통의 철권통치시절 없어졌던 왕실을 민주화이후 다시 복원했다. 이석씨는 41년만에 복위된 스페인의 까를로스 국왕처럼 한국에도 황실이 복원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석씨는 이번 음반을 계기로 황실복원을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할 계획이다. 전국적인 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그의 바람대로, 그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만조백관을 거느린 위엄있는 ‘임금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을까.


돌아가시고 두 시간 뒤에 벌떡 일어나신 아버지 의친왕
일제의 교활한 탄압으로 조선 황족들은 하루 하루를 비장한 각오로 살아야했다. 이석씨의 증언에 따르면, 커피를 즐겨했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커피에 타 놓은 아편 때문에 생식기능이 마비됐고, 결국 후사를 얻지 못했다.

순종의 첫째 동생 영친왕은 수태를 못할 것이라는 일본 여인 이방자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이방자 여사는 두 아들을 생산했다. 이석씨의 아버지인 의친왕은 왕비만 열분, 낳은 자손만 21명에 이를 정도로 왕손으로서는 가장 많은 자손을 거느린 분이다. 이석씨는 의친왕이 나이 예순둘에 얻은 아들이다. 사실상 손자 나이에 가깝다. 이석씨가 기억하는 의친왕은 힘이 대단히 좋았다. 7순이 넘은 나이에도 동전을 한손으로 구부리기도 했다. 일제의 암살에 대비해 길러놓은 차력 덕분이라고 했다.

의친왕은 그의 나이 16살에 돌아가셨는데, 의사가 사망을 확인하고 이불을 덮어 놓은 지 두시간이 지나서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장례 준비를 위해 모여 있던 2백명 가까운 문중식구들이 시체가 일어났다며, 혼비백산해 도망가는 소동이 빚어졌다. 이석씨는 이 사건에 대해 일제의 독살에 대비해 의친왕이 매일 조금씩 복용했던 비상(砒霜)의 약 기운 때문이 아니었는지 추측했다.

돌아가시기 직전 영세를 받은 일도 극적이다. 의친왕이 돌아가시기 직전 오른쪽에는 조계사에서 온 승려들이 있었고, 왼쪽에는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가 와 있었다는 것. 왕실은 사실 불교에 가까운 편인데, 의친왕은 눈을 크게 뜨면서 노기남 대주교의 손을 덥석 잡았다고 했다. 결국 의친왕은 영세를 받았고, 장례는 명동성당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의친왕의 대부는 장면박사가 맡았다. 이석씨는 "대원군이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학살했던 잘못때문에 그랬던 것 아닌가 한다" 며, 천주교와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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