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에서 만난 71세 남상범씨
"50대 중반 은퇴후 시작 10번 일주하는 게 목표
전국 여러 곳 돌다보니 사귄 사람만 700명 넘어"
백발노인은 쭉 뻗은 해안도로를 마다하고 파도가 철썩거리는 백사장과 울퉁불퉁한 바윗길만 골라서 갔다. 개나리색 반팔셔츠와 하늘색 반바지 밖으로 늠름한 팔뚝, 탄탄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는 옷가지와 지도, 간식 등을 담은 15㎏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다가 헉헉거리며 따라오는 기자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뛰어! 고생할 각오 안 했으면 왜 쫓아온다고 했어!"
남상범(71)씨는 2005년 11월부터 일곱 번 전국을 걸어서 일주했다. 서울을 출발해 서해, 남해, 동해 바닷물에 차례로 발을 적신 뒤, 휴전선을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약 2500㎞)다. 하루 30~40㎞씩 걸어서 석 달 걸린다. 2010년 11월까지 열 번 돌아서 2만5000㎞를 채우는 게 그의 꿈이다.
지난 3월 7일 여덟 번째 일주를 시작한 남씨는 일주 시작 66일째인 11일, 경북 포항 월포해수욕장을 지나 영덕 해맞이공원을 향해 북상(北上)하고 있었다. 해녀들이 나타나면 "뭐 잡았소?" 하고 묻고, 그물 손질하는 어부를 만나면 "이 동네 영감들 어디 갔소?" 하고 알은척했다. "아시는 분이냐"고 물으면, "이제부터 알면 되지!" 했다.
남씨는 "전국 일주를 하면서 길에서 사귄 친구들이 700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이들을 만난 사연과 연락처를 적은 수첩 2개를 비닐봉지에 이중으로 싸서 가방에 넣고 다닌다. 이들이 남씨를 다시 만나면 하룻밤 잠자리도 제공하고 따뜻한 밥을 지어주기도 한다. 포털 사이트에 팬카페를 만들어준 젊은이도 있다. 전날 밤 남씨에게 저녁밥과 잠자리를 준 부부도 세 번째 전국 일주 때 만났던 사람들이다.
- ▲ 대한민국 국토 10바퀴 걷기에 도전하고 있는 남상범씨가 지난 11일 오전 경북 영덕 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을 지나고 있다. 남씨는 지난 3월 7일 8바퀴째 도전을 시작했 다./이재우 기자 jw-lee@chosun.com
남씨는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 강남에 살면서 중소기업을 했다. 골프와 외식을 즐겼다. 그는 1992년 건강검진에서 "직장(直腸)에 궤양이 있는데 암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나이 쉰넷. 남씨는 "부자는 아니지만 당장 은퇴해도 밥 굶지 않을 정도는 됐다"며 "사업을 정리하고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2005년 8월 건강검진에서 "직장이 멀쩡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그를 보고 "체력이 30대"라고 했다.
"사업을 그만두고 등산을 다니면서 독일 문호 괴테가 쓴 '이탈리아 기행', 프랑스 기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쓴 '나는 걷는다' 같은 책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체력이 30대라는데, 나도 이들처럼 여행도 하고 책도 쓰자고 결심했지요."
부인(68)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하고 중얼거렸다. 남씨는 "내 성격이 불같은 걸 아니까 아내가 내놓고 반대하진 않았다"고 했다. 부인은 현재 미국에 사는 아들 집에 머물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한 번만 돌고 책을 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지. 그랬더니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데 제대로 답을 못했어요. '아, 내가 제대로 보고 온 게 아니구나' 싶었어. 그래서 두 번째 일주에 나섰는데 처음에 돌 때 못 봤던 지역 풍광하고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재미가 붙어 계속 돌게 됐지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로 해변 마을을 걷는 남씨의 얼굴은 잔주름 없이 팽팽했다. 키 172㎝에 몸무게 83㎏. 종아리가 웬만한 젊은이 허벅지만큼 굵었다. 그는 "초기엔 밤에 숙소에 누워 있으면 발가락이 안 움직여지고, 무릎이 안 구부러질 만큼 힘들었는데 이젠 적응이 됐다"고 했다.
"늪에 허리까지 빠져 본 적도 있고, 불량한 시골 젊은이와 싸움이 붙을 뻔한 적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멀쩡합니다. 한눈 팔지 않고 똑바로 가고, 한 번에 많이 갈 생각 말고 한 걸음씩 가면 탈이 없어요.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남씨는 장사해수욕장을 지나다 남정중학교에 들렀다.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다. 교사가 "누구십니까?" 묻자 "걷는 사람이오. 중3 학생들 좀 만나고 싶소" 했다. 사연을 들은 교사들이 쉬는 시간 10분 동안 면담을 허락했다. 남씨는 호기심에 찬 학생들 앞에서 '웅변'을 했다. "내가 이 나이에 전국을 돌듯 '불가능'이란 없다. 꿈을 가져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필기 잘해라…."
그는 바닷가에 앉아 가래떡과 오이, 방울토마토, 삶은 달걀로 점심을 먹었다. 이틀 전 만난 지인이 싸준 음식이다. 남씨는 "이 땅의 '엄마들' 덕분에 내가 국토를 돈다"고 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남씨의 숨소리도 거칠어져 있었다. 남씨는 "초기엔 일주일에서 열흘쯤 내리 걷고 하루 이틀 쉬었는데, 다섯 번째 돌면서부터는 쉬는 날이 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곱 번째 일주 도중 전남 보성을 지나다 체력이 떨어져 보름쯤 쉰 적도 있다.
"그래도 기왕 시작했는데 계속 걸어야지요. 비가 온다고 눈이 온다고, 춥다고, 덥다고, 아프다고, 쉬는 날이라고 멈추면 되겠어요? 돈, 그까짓 거 좀 부족하다고 주저앉으면 어떡하나? 언덕을 오르면 더 좋은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바람 좀 분다고 멈추면 끝이에요."
남씨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래도 정말 무서운 바닷가 광풍이 불 땐 일단 피해야 한다"고 했다.
오후 6시20분쯤 이날 최종 목적지인 해맞이공원에 도착한 남씨는 배낭에서 6만분의 1 지도를 꺼내 걸은 경로를 빨간색 유성사인펜으로 표시했다. 30㎞ 거리가 5㎝ 조금 안 됐다.
남씨는 강원도를 돌아 다음 달 6일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다. 마지막 날은 지인들과 파주시 보광사에서 만나서 서울 광화문까지 함께 걷기로 했다. '환영만찬'도 갖기로 했다. 남씨는 "열 번째 일주를 할 때는 하루 15㎞씩만 느긋하게 걸을 생각"이라며 "어때? 그때는 처음부터 같이 걸어 볼 텐가?" 했다. 발바닥이 얼얼한 기자는 "그건 그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
- ▲ 대한민국 국토 10바퀴 걷기에 도전하고 있는 남상범씨가 지난 11일 오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을 지나고 있다. 남씨는 지난 3월 7일 8바퀴째 도전을 시작했다. /이재우 기자
-
▲
대한민국 국토 10바퀴 걷기에 도전하고 있는 남상범씨가 지난1일 오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을 지나고 있다. 남씨는
지난 3월 7일 8바퀴째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걷는 고통을
통해 민 족이 하나되는 의식을 전환시키는 책을 준비하기 위해
대한민국 10바퀴 약 2만5000km를 목표로 걷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우 기자
'취미 >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사도 안 무서운 집에서 즐기는 피톤치드 (0) | 2010.06.07 |
---|---|
피톤치드의 편백 숲 장성 축령산 (0) | 2010.06.07 |
피톤치드 phytoncide (0) | 2010.06.07 |
전남 장성 축령산 휴양림 (0) | 2010.01.14 |
산림욕과 피톤치트 (0) | 2010.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