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이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 정도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일곱 가지 대표적인 큰 죄악을 말할 때 게으름을 포함 시켰습니다. 본래 이 게으름이라는 원어는 영어의 laziness가 아니예요. 그게 아니고 히랍어에서 온 아케이디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Acedia. 이것은 '아' '키도스'라는 두개의 히랍어 단어를 결합 시킨 단어입니다. '아' 라는 말은 부정사인데 '아니다' 'no' 'not' '아니다' 키도스라는 말은 영어의 'caring' 돌본다. 그래서 합하면 돌보지 않음. 돌보지 않는다. 이것이 게으름의 본래의 뜻입니다. 돌보지 않음. 그래서 그것은 거의 무책임의 의미와 동일하게 쓰여질 수가 있는 말입니다. 타워스 어카이너스 라는 신학자는 게으름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고갈 되었거나 그것을 거의 상실한 상태 그것이 바로 게으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게으름의 죄악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문화적 특성으로 현대인 상을. 부정적인 현대인 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낙담한 사람, 절망속에 있는 사람, 권태로운 사람, 우울한 사람, 고독한 사람, 이런 사람의 밑바닥에는 바로 게으름이라는 죄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감격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의욕이 없습니다. 오늘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으른 사람의 한 전형적인 실례를 본문의 말씀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엘리라고 합니다. 제사장 엘리. 이 사람은 특별히 그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거의 포기한 상태로 자녀들을 보고만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나중에 그의 직업인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성경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게으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해서 이 게으름의 정체를 한번 규명해 보고자 합니다. 게으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게으름은 죄악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게으름은 죄악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요. 자 오늘 본문이 시작 되는 10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10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 이하의 내용은 엘리라는 사람과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것을 엘리에게 직접 경고하거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에게. 아직도 사무엘은 어린 소년인데 일종의 제사장 선지자 인턴 쉽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직접 엘리 제사장에게 야 네 집에 문제가 있다. 네 집에 경고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고 있단 말이죠. 이 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왜 그랬을까? 저는 아마도 이 대목에서 그 당시 이미 엘리 제사장과 하나님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더 이상 엘리는 듣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게으름의 한 단면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 입니다. 자 뭐라고 말씀 하십니까? 13절에 보셔요. 본문의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 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헌데 내버려 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게으름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을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잘못된 길로 가도 그것을 금하지 않고 버려 두었다. 그것은 게으름이고 죄악이다. 그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는 죄악이다. 그가 알고 있는 죄악을 인해서 내가 그 집을 심판 하겠다. 마지막 절에 이 무서운 경고를 보세요. 14절에 '그러므로 내가 엘리에 집에 대하여 맹세 하기를 엘리집에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이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뭐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 학자들은 여기서 난처해 합니다. 그러면 용서, 죄 가운데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도 있단 말인가. 한 구약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거의 이미 용서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까지 상실해 버린 엘리의 모습이다. 여기서도 게으름이 나타나요. 회개도 부지런해야 회개합니다. 내 삶을 자꾸만 돌아보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선 안되지 이것도 부지런해야 가능한데 게으른 사람은 포기해 버려요. 뭐 그냥 사는 거지 뭐. 모든 것을 포기 했어요. 따라서 거기서는 회개할 여지조차, 회개의 의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집을 영원히 심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얘깁니다. 여러분 신약 성경에도 이 게으름을 죄악으로 본 분명한 성경의 교훈이 나타나 있습니다. 저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 자 어떤 종이 다섯, 둘,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먼 시간이 흘러간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하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또 다섯,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칭찬을 받습니다. 누가 책망 받았어요?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 한 달라트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땅 속에 파묻어 두었어요. 변명은 있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잊어 버릴까봐. 잘 못 다루다가 이거 하나마저 잃어버릴까봐 땅 속에 꼭 파묻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이 종에 관해서 주인은 어떻게 책망 하십니까? 이 주인의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책망의 마음을 우리는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책망 했죠?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름과 악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십시오. 게으름은 죄인 것입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게으름은 습관이다라는 사실을 기억 하십시오. 엘리의 게으름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시간을 두고 형성 되어 나온 습관 이었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악화되어 온 습관 이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우리가 엘리의 삶의 모습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우선 사무엘 상에서 처음 볼 수 있는 그의 모습 사무엘 상 1장. 사무엘 상 1장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어요. 사무엘 상 1장 9절 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여기 엘리가 뭐하고 있어요? 앉아 있어요. 앉아 있다는거 가지고 우리가 너무 흥분하거나 이 사람을 정죄 할 필요는 없죠. 여러분도 지금 앉아 있는데. 피곤하면 앉을 수도 있고 그런거예요. 그러나 그 다음에 계속 보면 문제가 좀 있습니다. 자 그 다음절 이하에 보시면 한나 이야기가 나오죠. 한나가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자 성전에 와서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한나보고 엘리가 뭐라고 말 하는지 아세요? 14절 보세요. 1장 14절 시작.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아니 통곡하고 기도하고 있는 여자 보고 뭐라고 그래요. 너 술 취했구나 그래요. 누가 취한 것 같애요? 나는 엘리 제사장이 취한 것 같애요. 그러니까 지금 엘리 제사장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냥 앉아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단 말이예요. 분별력이 없어요. 판단력을 이미 상실 했어요. 이것은 습관화된 게으름이 이 사람의 삶을 변질 시키고 있는 한 모습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모습들을 통해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4장 한번 읽어 보십시오. 사무엘상 4장 13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여기서도 이 사람이 뭐하고 있어요? 여전히 앉아 있어요 이분은. 계속 앉아 있어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있어요. 그런데 이때가 어떤 상황입니까? 그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고 있었다. 우리가4장의 첫머리 부분에 보면 법궤를 빼앗깁니다. 자 법궤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법궤를 가지고 있다. 행진을 할 때 법궤를 모시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메시지였어요. 법궤 관리는 누구 책임입니까? 제사장 책임이죠. 그런데 법궤를 빼앗겼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알아서 떨고 있었어요. 떨기만 하면 뭐해요. 일어나서 뭘 해야지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앉아 있어요. 아니 무릎 꿇고 엎드려 통곡하고 회개하는 기도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계속 그냥 앉아 있는거예요. 그러다가 엘리는 최후를 맞이 합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최후의 모습을 한번 보세요. 18절 입니다. 18절. 4장 18절에 자 시작.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 이었더라' 그의 마지막 그 불행한 최후의 비극을 어떻게 조명합니까? 그 때도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네 그랬다가 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최후의 모습이예요. 근데 성경이 재미있는 것은 그가 비둔했기 때문이다. 앉아만 있어보세요 비둔해 지나 안 지나. 자, 그는 끝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죽어 갑니다. 그것은 거의 습관화된 그의 게으름을 우리에게 조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이 사람을 파멸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잠언서에 보면 게으름에 대한 많은 경고가 나와요. 그 중에는 아주 코믹한 풍자적인 레슨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잠언22장13절에 보면 '게으른 사람은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으니까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우리라 하리라' 이게 보통 재미난 얘기가 아니예요. 방안에 앉아 있는 자기의 이유를 합리화시키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밖에 나가면 사자가 있을 것이고 사자 만나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꼼짝 달싹 않고 여기 있다. 이런 말입니다. 자, 또 같은 잠언26장14절에 보시면 표현이 좀 옛날 표현이지만 아주 재미있는 얘깁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이, 우리 호텔 같은 데 가면 빙빙 도는 문 있잖아요, 히브리 사람들의 문 가운데는 이렇게 돌아 돌면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계속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 하루종일 굴러다닌다 말이죠. 요즈음 밖에 나가봤자 바캉스 괴롭다 방글라데시로 가자. 그래서 방에서 굴러다니시는 분 하루종일 굴러다니시는 분. 그러나 일년 내내 일하시다가 뭐 몇일 집에서 쉬는건 좋은 일이죠. 그게 아니라 노상 일년 내내 방글라데시에서 굴러다니면 곤란하죠 그건. 그건 정말 문젭니다. 더 재밌는 것은 잠언26장15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 이건 아주 게으름의 절정입니다. 자, 게으름이 습관으로 굳어졌을 때 한 사람을 파멸시켜 나가는 이 모습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게으름은 죄악입니다. 게으름은 습관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습관입니다.
세 번째로 게으름은 소명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자, 엘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소명의 결핍, 소명감이 잃어버려져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엘리가 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모습을 이 사무엘상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 이미 말씀 드렸지만. 제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직분, 책임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법궤 관리란 말이죠. 법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언약궤를 잘 관리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관리합니까? 우리가 4장에 보시면 그것을 자기 자녀들에게 다 위임해 버렸어요. 4장4절 보겠습니다. 4장4절 다같이 시작.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자식에게 맡겼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이 자식이 어떤 사람들 입니까? 엘리의 자식들이 문제란 말이죠. 자, 11절에 보면 사무엘상4장11절에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아니 엘리가 자기 아들을 몰라요? 아들들이 어떤 아들인데. 2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 사무엘상 2장입니다. 2장 우리가 이제 12절부터 보겠습니다. 우선 2장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네 그 아들들은 불량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13절 이하는 그들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아버지가 제사 드리는 곳에서 들락날락 하면서 그 제물을 짓밟고 좋은 고기는 빼 먹고 뭐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어요. 17절에 보면 2장17절에 그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아들의 죄악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2절 보세요. 2장 2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네, 이 성전 회막을 드나드는 여인들과 성적인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 장소 전체를 더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부모가 최선을 다해도 자식들이 잘못되는 경우는 더러 더러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걸 알아야죠. 거기까지는 우리가 그냥 넘어간다고 하십시다. 아니 그런 아들들에게 법궤를 맡겨요? 하나님의 궤를 맡길 수가 있습니까? 이거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예요. 자, 이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망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책임한 아들들에게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엘리라는 사람의 무책임 그의 게으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요.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모든 것에 다 게을러요. 결국 이 게으름이 전체를 망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모든 것에 게으르다고 하니까 제가 어디서 이 게으름에 대한 토의를 좀 한 일이 있는데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가정에서는 무척 불성실한데 직장에 나가면 우리 남편은 열심을 다합니다 이런 분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럴 수는 있어요. 외면적으로 보면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가정에서의 어떤 스트레스 혹은 가정에서의 자기의 죄책감 그 죄책감을 카바하기 위해서 다른 것에 열심을 하면서 자기를 숨기고 있는 포장한 위선에 불과해요. 그것은 도핍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못다한 것을 직장에서 다른 일로 도피하고 있는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인생 전체에 저는 게으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뭐 처음 어떤 분을 만났을 때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제가 경계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을 주로 주고 받을 때 보면 명함에 뭐가 많이 써 있는 사람 저는 이런 사람 안 믿어요. 뭐 이렇게 직분이 많은지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 여섯 가지 아니 한 열 개 써 놓은 사람 봤어요. 뒤엣장에다가 쫙 자기 이력서를 다 써 놨어요. 저는 즉각적으로 이런 질문이 생겨요. 아 이 사람은 캐리어가 화려하구나 이 사람은 자기의 화려한 커리어를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제 마음 속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반문은 이렇습니다. 이것 책임 다 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오히려 이 사람들의 포장된 불성실에 대한 표현이 아닌가 나는 그런 사람 별로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이 써 놓은 사람 제가 한 번 이상 만나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게으름이란 것은 종종 이 소명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뚜렷하게 뚜렷하게 해야 할 일 분명한 일이 없기 때문에 촛점이 없기 때문에 헤매고 다니는 것에 불과해요. 게으름은 소명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게으름의 죄악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게으름에서 해방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첫째로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중요한 것은 소명의 회복입니다. 소명의 결핍이, 소명의 상실이 게으름을 초래해 왔다면 그러면 소명이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나는 소명없이 살았다면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튜 폭스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제가 이 신학자의 에세이의 글을 읽어 보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게으름을 치유하는 처방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잘 들으세요 게으름을 치료하는 처방은 단순히 부지런해지자 라는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름에 가장 적절한 유일한 처방은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분의 표현이 그런 말을 썼어요.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Finding the fire with in. 우리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소명을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내 속에서 일어나는 불꽃, 소명이란 무엇입니까? 소명이란 하고 싶은 일이예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또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가 있는 일 그것이 바로 소명이예요. 사람이 소명을 발견하면 신바람이 납니다. 일할 수 밖에 없어요. 소명 없는 것이 문제죠. 제가 아들이 둘인데 큰 아들이 저희 식구들 가운데서는 저희 큰 아들 황이가 제일 행동이 느립니다. 하여간 어디 밖에 나갈 때 보면 제일 늦게까지 꾸물거리는 것이, 끝에서 두 번째가 저희 집사람이고 맨 끝이 큰 아들이예요. 들어 왔다 나갔다 화장실 한 번 더 갔다 뭐 그렇게 느린지 몰라요. 아침에도 제일 늦잠을 자고 저는 절대로 제 큰 아들의 모습이 저의 혈통과는 무관하다 이런 확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제가 저의 둘째 아들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같이 있거든요 같이 있는데 그래요 아빠 형이 달라졌어 그래서 뭐가 달라졌다는 말이야 형이 보통 부지런해진게 아니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니? 최근에 컴퓨터 특별교육을 받는데 너무너무 좋다는 거예요. 거기서 재미를 얻었어요. 어떤 보람을 얻은 거예요. 행여 우리 둘째가 하는 소리가 형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밤까지 컴퓨터에 아주 취해버렸다고 그래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어떤 해야 할 일을 발견하는 그 순간부터 라이프 패턴이 삶의 패턴이 바뀌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소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 그러면 목사에게나 이런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위대한 기여 가운데 하나는 만인제사장의 발견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제사장이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는 거예요. 목사만 부르신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에게도 소명이 있어요, 종류가 다를 뿐이지 나름대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이 있다. 엎드려 보세요. 기도해 보세요. 가만히 들어 보세요. 사무엘을 부르시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나 '사무엘아 사무엘아 내가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그게 소명이예요.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너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시고자 한 일, 그 일이 작아도 다른 사람과 달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그 소명을 발견한다면 그 순간부터 달라질 줄 믿습니다. 소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랑을 결단하는 것이예요. 사랑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단테는 유명한 단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다' 저는 동의해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엘리가 정말 자식을 사랑했더라면 어떻게 그대로 놓아 둘 수가 있습니까? 자식을 붙들고 울어야지요. 호소를 해야지요. 설득을 해야지요. 이 길로 나가면 쓰겠는가 네가 이런 행동을 하면 쓰겠는가 사랑하는 아들아 돌이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대로 놔 뒀단 말이예요. 왜 그래요?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가고 싶었던 시몬 베드로 그러나 디베리야의 바닷가에 시몬 베드로를 찾아 오신 부활하신 우리 주님, 그를 향해서 어떤 질문을 던지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 바꿔서 말할까요? '베드로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주님 아시잖아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 고백을 받으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래 그러면 내 어린 양을 먹여다오. 내가 사랑하는 어린 양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해 다오' 사랑하면 헌신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의 눈을 뜨면 이 세상은 할 일이 많아요. 내가 도울 사람이 많고 섬길 사람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은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결심하는 일입니다. 자, 오늘 우리는 54주년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어 버릴 때 나라를 잃어 버릴 때 왜 잃어 버렸어요? 누군가가 이 나라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게을렀기 때문에. 그러나 한 순간 우리 나라가 다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흐름만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우리의 선배들이 다시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사랑을 갖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예요? 민족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민족사의 과제는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해방이 아니죠.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평화로운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나라를 만들어 가느냐 그리고 크리스찬의 전망에서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우리 한국이 우리가 받은 축복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선교 한국으로 발돋움할 수가 있느냐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는 안목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안목으로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할 일 많은 세상인가를. 사랑을 결심하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소명을 발견하십시오. 사랑을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일을 결심하십시오. 일 하기로. 일터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 예수님이 일 중독자는 아니예요. 우리가 일하라고 그러면 또 일 중독자가 되기가 쉬워요. 그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 들에 핀 백합화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그 분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관찰해 보면 그에게는 낭비된 시간이 없어요. 시간 낭비가 없어요. 그는 시간을 잘 사용하신 분입니다. 때로는 식사할 시간 없이 그는 하루의 일과를 잘 나누어 사용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특별히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연구해 보면 그는 '때' 타임에 민감하십니다. 요한복음2장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부터 아직은 제 때가 되지 않았는데 그 '때'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는 때를 계산하며 때를 느끼면서 자기 인생의 남은 때를 계산하면서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자기의 일의 마무리의 마지막 순간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제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가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제가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들의 주님이라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라이프 스타일을 닮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그리스도가 내 마음 속에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주셨고 나를 부르셨고 소명을 가지고 나를 인도하신다면 이제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비전, 우리의 비전, 우리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을 사랑하기로 일터로 나가보십시오. 우리 세상에 할 일로 가득차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헌신만 하면 주님이 나를 쓰실 것입니다.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명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순종하는 그곳에, 그들이 땀을 흘리는 그 곳에서 우리 민족의 상처는 치유될 것입니다.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서 게으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기도하십시다. 최근의 우리의 삶이 너무나 무기력한 삶이라고 느끼는 분 계십니까? 매사에 의욕이 없고 따분하고 인생이 무겁고 힘들게만 하게 느껴지시는 분들 그러나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대로 주님 살아계시다면 놔두지 않을 거예요.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다가와 손을 내미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겠다. 일어나 너 걸어라 할 일이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인생이 아직도 힘들고 무겁기만 하신 분들 다가와 손 내미시고 나를 붙들어 일으켜 주시는 주님. 그 분이 함께 하실 때 그 분의 비전이 임할 때, 그 분의 능력이 임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임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에 있는 절망과 좌절을 쫓아내 주시옵소서. 나사렛 에수의 이름으로 모든 권태는 물러갈지어다. 모든 우울도 고독도 떨쳐 주시옵소서. 새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노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시옵소서. 일어나 다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도 주신 말씀 붙들고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평화가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본문스크랩] 7가지 죄악 5 - 게으름(사무엘상 3:10-14)|작성자 럭비공
Gluttony(탐식),
Greed(탐욕),
Sloth(나태),
Envy(시기),
Lust(정욕),
Pride(교만),
Wrath(분노)
http://blog.naver.com/dyd9999/70012825117
✞파멸의 7가지 죄악
인간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내적인 죄악을 크게 7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외적인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등은 아니지만 외부적인 죄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내적인 7가직 죄악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죄악을 저지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가장 심각한 죄악들이다.
1. 교만(Pride)
교만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행위로 ‘겸손’의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만을 죄의 근원이며 본질로 간주하였다. 또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다. 지나친 우월감으로 인한 교만은 이웃(교인)과 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죄악이다.
중세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루시퍼가 교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을 때 최초로 교만이 나타났다(사14:12-14)고 말했다. 즉 교만은 마귀가 타락한 원인이었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주요 수단이다.
잠언에서는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하고 있고(잠16:18), 예수님은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더럽게 하는 악덕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막7:22).
▲성경어원 : 교만(게아, 잠8:13), 거만(가아와), 장점을 뽑아내는 것(가온, 잠16:18)으로 신령한 지혜에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2. 탐욕(Greed)
탐욕, 탐심은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으로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성경은 탐욕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규정하고 있고(딤전6:10), 십계명에서는 10번째 계명으로 탐욕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히브리인들은 ‘욕망은 영혼을 충동질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에 미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으로 탐심을 금하고 있다(출20:17). 사도행전 20:33, 디모데전서 6:9, 로마서 7:7에서는 ‘강렬한 욕망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면 돈에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탐욕은 돈을 사랑하는 것(금전욕)과 동일시하였다(딤전6:10).
탐욕이란 단어는 종종 악한 것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비도덕성과 관련되며(엡4:19), 신약에서는 본질적으로 으뜸가는 우상숭배로 표현하고 있다(엡5:5, 골3:5). 또한 터무니없는 욕심(눅12:15),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출20:17),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을 가지려는 노력(딤전6:10) 등을 의미한다.
▲성경어원 :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하마드, 신5:21), 부당한 이득을 탐내는 것(베차, 잠28:16), 이기적인 욕심(아와, 잠21:26), 강렬한 욕망(에피뒤미아, 행20:33), 무지비한 자기 주장(플레오넥시아, 고후2:11).
▲대표적 인물 : 아간(수7:16-26), 발람(벧후2:15)
3. 분노(Wrath)
분노 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을 때는 범죄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분노자 가인은 제사문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격분해 동생을 살인하게 됐다. 가인의 상황을 예로 볼때 분노의 원인은 내 자신 속에서 발생하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인간관계를 경쟁관계로 인식케 만들며 항상 폭력을 유발하게 만든다.
구약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난폭한 주먹은 신적 권위를 주제넘게 사칭하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시37:8-9). 그래서 맹렬한 격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금지되고 거부되었다(창49:5-7). 신약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그 실행에 대해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잘 나타난다(마5:9,21,22).
분노는 본질적으로 성도를 성화(聖化)하지 못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榮化)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의 해소 방법으로 기도와 용서를 제안하고 있다.
▲성경어원 : 성나다, 화를 내다(카챂, 사8:21), 흔들리다, 격동하다(라가즈, 신2:25)
▲대표적 인물 : 가인(창4:3-16)
4. 음욕(Lust)
성경은 모든 음행과 정욕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무절제한 정욕(색욕)은 선한 생활을 파괴할 뿐 아니라 죄의 종이 되게 하며, 고난과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대표적 인물 : 느부갓네살(단4:30, 37),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잠6:32-33)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성경은 음행을 믿음으로 대항해 직접 싸워야 하는 죄악이기보다는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만큼 연약한 인간이 음행의 죄를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전6:18). 또한 음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도의 몸(성전)을 오염시키는 일과 같다.
방탕한 마음에서 생기는 음욕은 식을 줄 모르며 급격히 오염되는 특성이 있다. 성경에서 음행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했고(유7), 모압 여인과 음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임을 당했다(민25장). 한편 성경에서는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이 아닌 신앙적인 배교행위까지 영적 음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어원 : 음탕함과 부절제함, 외설스러움, 육욕(아셀게이아, 갈5:19). 아셀게이아는 육욕과 관계되는 의미로 공공의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범하는 호색스러움을 의미한다.
▲대표적 인물 :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19장)
5. 탐식(Gluttony)
인간을 죄악으로 유혹하는 3대 욕구를 물욕, 성욕, 식욕이라고 한다. 식욕은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으로 에서는 식탐으로 인해 장자권을 팔았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모습으로 성경에서는 책망되고 있는 악습으로 지적하고 있다(잠23:21).
고대 히브리인들은 배나 육체는 열정이나 탐욕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보았다. 그래서 배를 의미하는 ‘베텐’(욥20:20)이 탐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탐식이라는 것은 우리를 순간적인 유혹에 굴복시켜 버리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죄악이며,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악이다. 성경은 탐식이 탐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지닌 특성(롬1:29, 잠21: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절제하지 못하는 식욕은 육체를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서서히 육체를 파괴시켜 나가는 죄악이다.
또한 탐식은 육체만 파괴하는 것만 아니라 영성을 파괴하는 죄악이기도 하다. 히브리 기자는 탐식으로 장자권을 판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기록하였다(히12:16-17).
▲성경어원 : 탐식을 뜻하는 파고스(마11:19, 딛1:12)는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 ‘나태한 배’, ‘태만한 탐식가’ 등으로 사용됐다.
▲대표적 인물 : 에서(창25:29-34, 히12:16-17)
6. 질투(Envy)
질투, 시기는 자기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며,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는 죄악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질투가 죄악된 행동의 동기가 되어 분쟁과 분열, 미움, 살인까지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고후12:20, 갈5:21). 질투는 사랑의 반대행위로 이웃이나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겨난다(고전13:4).
질투는 타인에 대한 불순한 내적 감정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죄이다. 질투는 타인에 대한 시기로 증오로 발전하게 되고, 대립하게 됨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고전13:4). 그래서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가 따르지 않더라도 생각과 태도만으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5:21-31).
질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키나)와 헬라어(젤로오, 행7:9)는 감정이 오로지 한 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말한다. 지나친 질투는 결국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은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성경어원 : 검붉게 된다(키나, 민5:14), 이기주의, 야망, 경쟁(에리디아, 롬1:29)
▲대표적 인물 : 요셉의 형들(창37:34), 사울(삼상18:6-9)
7. 나태(Sloth)
일반적으로 나태라는 말을 행동이나 노동을 싫어하는 것, 태만한 것, 게으른 것, 느린 것, 부지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행동이나 정신적인 사물(事物)에 대한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의 활동에 대해 냉담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의미한다.
나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만의 죄로 단테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잠언은 나태한 자를 한없이 게을러 늘 잠자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나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그 소명을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행동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 반응치 못하고 어떤 목적도 없는 말을 분주히 분에 넘치게 말한다.
또한 나태는 일상생활과 함께 신앙생활을 파괴시키는 죄악이다. 사단은 성도를 죄의 그림자에 머물게 하기 위해 성경 보기 싫은 나태, 기도하기 싫은 나태, 전도하며 봉사하기 싫은 나태 등 영적 태만을 주입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성경어원 : 비생산적, 무익한, 비효과적인, 텅빈(알고스, 마12:36),
▲대표적 인물 : 미련한 다섯 처녀(마25장)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와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살펴보면 ‘과녁을 쏘아 맞출 수 있는데 맞추지 않는 오만한 행위’를 뜻한다. 즉 ①표적을 쏘아 빗나가다(이탈) ②표적을 지나쳐가다(과도) ③표적에 못 미치다(미달) 등으로, 죄는 알고 있는 의무의 태만을 의미한다(약4:17).
Kolleen Selects CD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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