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늙어왔는가?
운전 중 라디오에서 시보(時報)를 듣는다. “애니콜이 12시를 알려드립니다.” 문득 배가 출출해진 느낌이 들어 고속도로 휴게소로 향한다. 밤 9시 뉴스 시간인데도 식사를 못했다면 몹시 허기가 져야 한다. 밤 10시인데도 아직 퇴근을 못했다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야 한다. 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다가 시계를 쳐다보니 새벽 3시. “큰일 났다, 출근해야 하는데.”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잠복근무하던 피로가 시간이 되면 튀어나오는 건가? 우리 자신이 ‘사회적 시계’에 맞춰 피로를 불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니콜’이 우리에게 물리적인 시간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시계는 우리에게 이 시간이 되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시그널을 보내온다. 사회적 시계가 24시간 단위가 아니라 10년 단위로 옮겨 가면 사태가 좀 심각해진다. 30세가 되었다. 사회적 시계는 “결혼할 때가 되었습니다. 서둘러서 집을 장만해야 합니다.”하고 알려준다. 이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 슬슬 골프를 시작해야 합니다.” → “펀드에 가입할 때가 되었군요.” → “지금 암 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 “은퇴 후를 설계해야 할 시기예요.” → “물 좋은 전원주택을 알아봐야 합니다.” … 친절하게 마지막 시보도 잊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묘 자리를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회적 시계가 지시하는 대로 충실히 따르다가 때가 되면 소리도 없이 관 속으로 들어간다.
솔직히, 더 살고 싶지 않은가. 실컷 즐기면서 오래 오래 살고 싶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회적 시계가 일러주는 대로만 살려고 하는가. 왜 40이 넘어가면 흰머리가 나야 하고, 40대 중반이 되면 노안이 시작되어야 하며, 50줄에 접어들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라가야 하는가. 왜 50대 중반이 되면 관절이 말을 안 들어야 하고, 60을 넘기면 얼굴이 쭈글쭈글 해져야 하는가. 왜 기력이 쇠해져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이런저런 욕망까지 다 사라져야 하는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만 생각하는가. 우리는 저절로 늙어가는 게 아니라 늙는 것을 배우고 연습까지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한참 양보해서 생물학적 변화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왜 우리는 40대 중반이 되면 너나할 것 없이 골프를 시작해야 하고, 50대가 되면 은퇴설계를 해야 하며 전원주택을 알아보러 다녀야 하는가. 왜 록을 즐기던 청년이 아저씨가 되면 뽕짝으로 갈아타고, 프랑스문화원에 예술영화 보러 다니던 아가씨가 아줌마가 되면 아침 드라마에 빠져 시간을 죽이고 있는가. 학교 다닐 때 영화광이었던 친구는 지금도 그렇게 영화를 즐기고 있는가.
우리는 늙는 것을 배운다
인생의 모든 것이 나이에 맞게 착착 세팅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미덕으로 받아들인다. “아이고,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흔히 하는 이런 말,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가. 30대에도 그런 소리 하면서 살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본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젊고 싱싱한 어휘를 구사했었다. 그런데 30대 과장 시절에 50대 이사를 보고 “무슨 저런 말을 하지”하면서 비웃었던 그 말들을 지금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그대로 따라서 한다. 나이에 맞게 말을 배운 것이다.
도서관엔 가끔 가는가, 캠핑을 해본 적 있는가, 주말마다 여행을 가거나 영화 보러 다니는가, 가끔 클럽에도 가는가, 지금도 전공을 공부하고 있는가. 이 나이에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 한다. 사람을 시켜서 하는 일이라야 나이와 직분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일선 실무를 맡으면 수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 직업 자체에서 추방될 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이다. 나이에 맞는 옷, 나이에 어울리는 말, 나이에 맞는 처신, 나이에 맞는 스포츠, 나이에 맞는 식당과 술집, 나이에 맞는 인간관계, 나이에 맞는 계급과 역할을 찾는다. 건강관리에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생각은 제발 빨리 늙어달라고 곡을 하는 셈인데 늙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어떻게 늙어 가는가? 여러 이유가 있고 설(說)이 분분하다. 그중, ‘우리는 늙는 것을 배운다’는 ‘노화학습설’은 강력한 노화학설의 하나이다. 누군가 물었다. 빨리 늙는 좋은 방법이 있냐고. 여기 비결이 있다. “자기 나이에 맞게 사세요.” 그러면 십중팔구, 못해도 자기 나이만큼은 늙는다. 우리는 저절로 노화되는 게 아니라 노화를 배우고 있다. 이 말을 최소한 70%는 믿어보자.
은퇴 후 5년, ‘크레바스 구간’
‘크레바스(crevasse).’ 빙하가 양쪽으로 갈라져 만들어낸 틈을 말한다. 보통 폭이 20m, 깊이 45m, 길이는 수백m에 달한다. 크레바스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얼음에 의해 갈라진 틈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눈에 덮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파놓은 이 함정에 한번 발을 잘 못 디디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히말라야의 조난사고는 대부분 크레바스에 의해 일어난다고 한다.
흔히 은퇴 후 5년을 ‘크레바스 구간’이라고 한다. 이때 남자들의 사망률이 급증한다. 통계에 따르면 사망률이 그 전보다 1.5배 늘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요 사망원인은 자살, 암, 심혈관계 질환 등이다. 이 구간을 건너가면 다시 사망률은 줄어든다. 왜 하필 이 시기에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목숨을 잃는가.
주위에서 이런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할 만큼 했지 뭐. 애들 다 가르쳤고 출가도 시켰고…” 그래서 어쩌겠단 말인가. 그 나이에 벌써부터 갈 준비 하겠다는 뜻인가. 은퇴 후에 사람들은 그런 부정적인 맥락의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 나이가 되면 무심코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은연중에 배워왔다. 그렇게 직장에서의 은퇴를 계기로 아예 인생의 무대에서 은퇴하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자기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정력적인 삶을 살아야 할 뭐가 없다. 슬슬 공이나 치러 다니고 술집에서 친구들 좀 만나고,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크레바스에 빠진다.
인생의 무대에서 은퇴하기로 맘먹은 사람들이 많으니 그만큼 사망률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 고비를 넘긴 사람들도 대개 이 시기에 팍 늙는다. 재테크 전문가, 금융권 관계자들은 은퇴 후 크레바스 기간에 대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며 각종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50 문턱에 들어서면 그런 상품을 알아보고 다닌다. 금융업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진정 미래에 대한 대책인지 의심스럽다. 젊었을 때 은퇴설계가 안 된 사람들이 아무 대책 없이 어느 날 은퇴를 맞으면 크레바스에 빠지게 된다고, 그쪽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생각도 해봐야 한다. 은퇴설계 같은 것에 신경을 바짝 쓰는 사람들은 은퇴 후에 닥칠지 모르는 ‘치명적 사태’를 우려한다. 그 우려가 자기예언이 되어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너무 사회적 시계가 가르치는 대로만 따라서 하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시카고 대학 심리학과 버니스 뉴가튼(Bernice Neugarten) 교수가 명쾌하게 정의했다. “사람들은 사회적인 시계의 영향을 받아 그 나이에 해야 할 행동이 따로 있고 그 나이에 가져야 할 생각이나 태도가 따로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암묵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당신은 사회적인 시계의 영향을 안 받고 사는가?
우리도 20대, 30대처럼 살 수 있다.
상단 사진에서 노래 부르는 이는 록 그룹 롤링스톤스의 보컬리스트인 믹 재거이다. 올해 70세인 그는 파리 센강변의 고급 맨션에 살면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그에 관한 가십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잠자리를 함께 한 여성이 4,500명이 넘는다고 누군가 실토했다. 배우 안젤리나 졸리,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영부인 브루니도 그의 잠자리 파트너였다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 나이 70 넘었다고 ‘어르신’ 어쩌고 하는 말이 통하겠는가. 소일거리로 체스를 두고 동네 친구들 만나 노닥이는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위에도 그렇게 젊게 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그들이 표준이 안 되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다. 더 이상 사회적 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생물학적 시계에도 연연하지 않고 내 마음의 시계를 갖고 살기로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다.
2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미국 심리학의 총본산, 하버드대 심리학과의 엘렌 랭어(Ellen J. Langer) 교수는 70대 후반~80대 초반 남자들의 시계를 20년 전으로 돌리는 기발한 실험에 착수했다. 1979년 9월 어느 날, 하버드대 심리학과가 자리한 윌리엄 제임스홀 주차장. 70대 후반~80대 초반의 남자 8명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버스에 오르고 있다. 이들은 잠시 후 2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주인공들이다. 엘렌 랭어 교수와 대학원생들 그리고 8명의 시간 여행자들을 태우고 버스는 출발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버스에서는 냇 킹 콜의 ‘모나리자(Mona Lisa)’를 비롯해 195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20년 전의 느낌을 갖고 그들은 뉴햄프셔주의 한 수도원에 도착했다. 연구팀은 사전에 이 건물을 1959년의 ‘복제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들이 일주일을 지낼 이 건물의 흑백TV에서는 1959년에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 발사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실내는 당시의 신문, 책, 음반들로 가득 채워졌다.
8명의 남자들은 각자 자유롭게 생활하되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었다. 랭어 교수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자. “지금부터 우리는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1959년을 회고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1959년을 살고 있는 것처럼 연기하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1959년 당시의 자신의 모습 그대로 돌아가 달라는 겁니다.” 이 공간에서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1959년의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또 한 가지는 모든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가 부축해주지도 않고 밥을 대신해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도착해서 짐을 옮기는 것부터가 힘들었다. 하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참가자들은 큰 여행용 가방을 혼자서 조금씩 옮겨 방에 들여놨다. 그들은 1959년 쿠바 카스트로의 아바나 함락을 놓고 현재 시제로 토론을 벌였고 1959년의 노래를 들었으며 1959년에 보던 책들을 봤다. 그렇게 일주일을 1959년이라는 규칙에 따라 생활했다.
일주일의 시간여행이 끝난 뒤 이들을 상대로 종합검사에 들어갔다. 참가자들은 청력과 기억력이 좋아졌고 악력(쥐는 힘)은 현저히 증가했으며 관절유연성이 개선되었다. 단 일주일 만에 8명의 남자들은 실제로 “젊어졌다!”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걷지 못했던 한 남자는 지팡이를 던지고 꼿꼿하게 걷기 시작했다. 미식축구에 참가한 남자도 나타났다. 일주일 전의 사진과 후의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모두 일주일 뒤의 사진이 더 젊었을 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5년 뒤에 비교한 사망률은 이렇게 나타났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14%, 참가 안한 사람들(비교집단) 47%.
실험이 끝난 뒤 참가자들만 변한 게 아니었다. 실험을 주관한 랭어 교수도 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울타리에 가두는 것은 우리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 몸의 한계를 믿는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나는 우리가 흔히 믿는 의학지식들 중 그 어떤 것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신줄을 ‘이 늙은’ 나의 오늘에 맞추지 말 것
그가 고안한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의 목적은 명확하다. 사회적 시계가 심어놓은 모든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우리가 은연중에 배워온 노화에 관한 모든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방법은 ‘의식집중(Mindfulness)’이다. 이것을 명상가들은 ‘전념(全念)’이라고도 부른다. 의식집중이란 우선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이다. 정신줄을 ‘이 늙은’ 나의 오늘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싱싱했던 시절에 맞추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인가? 자신의 창작물인가, 깨달음인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본래 자기 것이 아니다. 배운 것에 불과하다. 사회적 시계가 가르친 고정관념이다. 그 고정관념은 우리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데, 그 고정관념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고정관념은 본래 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나이 들면서 록에서 뽕짝으로 갈아탔듯이 지금도 얼마든지 다시 록으로 갈아탈 수 있다.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법적인 제약을 받는 것도 아니다. 생각을 어디에 고정시킬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 선택에 따라 당연히 삶도 달라질 것이다.
어디에 의식을 집중시킬 것인지, 랭어 교수의 매력적인 제안을 다시 들어보자. “당신이 활기차게 살던 순간들을 느껴보세요.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마음을 어디에 두던지 몸도 그곳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다양한 일들이 나타나지요.”
지금까지 알고 있거나 믿어 왔던 것 말고 새로운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의식을 집중시키면, 우리 몸에서 신체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젊은 것에 의식을 집중시키면 실제로 젊어지는 생리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의식을 집중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 가슴 속의 그 청년을 만나러 가라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대학생이면 원 없이 공부 좀 더 해보고 싶다. 진지하게 예술 활동에 빠져 보고 싶다.” 그 공부 지금 하면 된다. 예술 활동에 나이의 제약이란 없다. 오늘 시작하면 된다.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더 늙으면 진짜 못한다. 돈도 시간도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이에 맞춰진 고정관념만이 장애가 될 뿐이다.
청바지 입고 기타를 치며 무전여행을 떠나던 청년은 어디로 갔는가. 철학책을 끼고 다니던 청년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전공에 몰두하고, 조국의 앞날을 논하며,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삶을 설계하던 청년은 어디로 갔는가. 싱싱하게 펄펄 뛰던 그 청년은 어디로 갔는가. 다행히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 가슴 깊은 곳에 살아 있다. 지금 그 멋진 청년을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 인생의 가장 황홀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라. 생명 에너지가 가장 뜨겁게 분출했던 시절을 상기하라. 그때의 모든 것들을 꺼내 놓으라. 완벽하게 그 시절 그 상태로 의식을 집중시켜라. 나이에 맞는 사고방식을 거부하라. 우리가 늙어온 만큼 젊어질 것이다.
※지난 5월 EBS의 ‘다큐 프라임’ 제작팀은 엘렌 랭어 교수의 ‘시계 거꾸로 돌리기’의 한국판 심리실험에 착수했다. 코미디언 남성남, 노란 샤쓰의 사나이 한명숙, 성우 오승룡 씨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70대 후반~80대 초반의 사람들이 30년 전인 1983년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에 참가했다. 실험의 준비부터 실제진행, 실험 이후 참가자들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이 3부작으로 제작, 방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음 호에 이 한국판 실험과 함께 고정관념을 깨고 의식을 집중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지금까지 듣고 보고 실행해 온 효과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 통 크게 30년 쯤 전으로 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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