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제정신
허태균 지음|쌤앤파커스|286쪽|1만4000원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아온 둘째 아들과 아내가 서로 다투고 있다. "너희 반 1등은 누구니?" "아무개는 몇점이니?" 성적표를 본 엄마의 질문은 대개 이런 식이다. 하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이나 동문서답(東問西答)처럼 아이의 대답은 엉뚱하기만 하다. "우리 반 꼴등은 요번에 아무개야." "이번 시험이 모두 이상하대. 문제가 거지 같아."
이들 모자(母子)의 대화는 '사오정 놀이'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다가 심리적 분석을 곁들인다. 어머니의 질문은 아이가 무언가를 더 잘했으면 하는 '향상(向上)의 동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상향적 비교를 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자기 고양(高揚)의 동기'를 갖고 있기에 하향 비교를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언제나 못난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다고 아이를 혼내고 싶겠지만, 아이는 그 순간만큼이라도 자신보다 성적이 좋은 친구는 잊고 싶은 마음일지 모른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얼굴도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예능에도 탁월하다는 '엄친아'와 '엄친딸' 현상에 우리는 열광한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의 20대 가운데 이런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엄친아의 숫자는 자살하는 20대나 암투병 중인 20대, 정신분열증에 걸린 20대에 비교해도 한참이나 못 미친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극소수의 돌연변이 수준"으로 실제 숫자가 적은데도 우리 사회가 '엄친아'에 열광하는 것은 대부분의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만은 평범하지 않으며 특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부모의 잔소리나 '엄친아 현상'이 보여주듯이 저자의 이 책은 '착각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학문적 이론을 소리높여 강변하기보다는 우리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사례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를 출발한다. 실제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벼락에 두번 맞아서 죽을 확률보다 낮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복권을 사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비현실적 낙관성'으로 설명한다. 자신에게 좋은 일은 사건이 실제 일어날 객관적 확률보다 더 자주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만, 나쁜 일은 훨씬 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비단 개인뿐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곧잘 일어난다. 피파(FIFA) 랭킹 30위권인 한국 축구팀이 4~8강에 다시 진출하는 건, 우리 대표팀이 세계 60~70위권의 팀에게 패하는 것만큼이나 일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앞의 '기적'이 뒤의 '이변'보다는 자주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후(事後) 예견 편향'이다.
저자는 다양한 착각의 사례를 그저 열거하거나 분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걸음 나가서 일종의 심리적 위안과 격려까지 보낸다. 복권 당첨 확률이 지극히 희박한데도 여전히 우리가 복권을 사는 건, 그만큼 살기 어렵고 곤란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심리적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착각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곳에서 나온다"는 저자의 말처럼 착각은 어쩌면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일지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사례와 이론에 구체적이고 따스한 조언까지 곁들이고 있어 심리학 교재와 자기계발서를 함께 읽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착각할 수 있다는 진실만 인정한다면 우리와 다른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무조건 비판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대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착각의 상대주의'나 '착각의 낙관론'이라고 볼 수 있다. 나만이 착각하거나 잘못 판단해서 후회나 낭패감을 겪는 건 아니라는 묘한 위안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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