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日帝가 만든 대륙침략기지 제주 알뜨르 비행장

bthong 2008. 1. 20. 08:51

제주도의 모진 겨울바람이 모슬포의 알뜨르 비행장을 엄습한다. 황량한 활주로의 마른 잔디가 미친 듯 춤을 추고 격납고를 뒤덮은 갈색 억새풀은 연신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성산 일출봉에서 해가 솟았나보다. 바람에 실려 온 구름 덩어리가 화염처럼 붉게 물들다 이내 잿빛으로 스러진다. 폭격을 맞은 듯 앙상한 시멘트 골조를 드러낸 섯알오름 고사포 진지가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 그날의 무모함을 고한다. 60여 년 세월이 구름처럼 흘렀건만 알뜨르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깊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답지 않은 낯선 풍경이 하나 있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에 가랑잎처럼 떠있는 가파도와 마라도를 비롯해 한라산 설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서귀포시 서남단의 모슬봉과 산방산, 그리고 송악산을 꼭짓점으로 트라이앵글 안에 위치한 알뜨르는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문 너른 들판이다. 알뜨르는 모슬봉 보다 낮은 지대에 위치한 들판으로 '알'은 아래라는 뜻이고 '뜨르'는 들을 말하는 제주도 방언.

한겨울에도 유채밭과 마늘밭이 초록색을 자랑하는 알뜨르를 더욱 생경하게 만드는 주범은 드넓은 잔디활주로와 수많은 격납고, 지하벙커 등 상상도 못할 군사시설.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 건설한 해군항공대의 기지로 제주사람들은 이 기지를 '알뜨르 비행장'으로 부른다. 대륙 침략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중일전쟁을 앞둔 1930년, 지대가 낮아 방어에 유리한 이곳에 서울 여의도공원 3배 크기의 비행장을 완공한다.

1937년 8월. 나가사키의 오무라 해군 항공기지를 발진한 폭격기들이 알뜨르 비행장에서 연료를 공급받은 후 700㎞ 떨어진 중국 난징으로 날아가 세계항공전 사상 미증유의 대공습을 감행한다. 알뜨르에서 출격한 횟수는 모두 36회. 연 600대의 폭격기들이 3000t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폭탄을 쏟아 부은 것이다. 그 후 알뜨르 비행장은 두 차례 확장공사를 거쳐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던 1945년에 여의도 크기로 늘어났다.

지금도 공군 수송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알뜨르 비행장의 활주로는 1.4㎞. 잔디활주로 한쪽에는 관제탑으로 이용됐던 시멘트 골조와 둔덕처럼 위장한 지하벙커 등이 흉물스럽게 남아 일제 침략사를 증거하고 있다. 1938년 오무라 항공대가 중국 상하이 인근으로 옮겨가자 알뜨르 비행장은 잠자리비행기라고 불리는 아카톰보 비행기의 연습비행장으로 활용된다. 이어 1944년 사이판이 함락되고 모슬포 해안 일대가 미군 상륙 예상지점으로 꼽히자 일본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송악산과 알뜨르 일대에 대규모 지하 군사시설을 구축하게 된다.

알뜨르 일대에 산재한 20개 격납고는 이때 만들어졌다. 모슬봉과 산방산을 배경으로 들판 중간 중간에 나지막한 둔덕처럼 보이는 격납고는 아카톰보를 감추기 위한 시설. 지금도 녹슨 포탄이 심심찮게 발끝에 차이는 격납고는 1m 두께의 콘크리트 지붕에 흙을 덮어 둔덕처럼 위장했다. 격납고는 만들어진 지 60년이 넘었지만 보존상태가 좋아 일부는 농기계 창고로 이용될 정도. 이 중 10개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이외에도 활주로와 격납고 주변에는 막사, 탄약고, 정비소, 지하벙커, 통신소 등 50여 개의 콘크리트 시설물과 잔해가 남아 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군은 제주도의 120개 오름에 진지를 구축했다. 미군 공격에 대비해 정상에는 고사포 진지, 지하에는 거미줄 같은 갱도를 설치한 것이다. 평화박물관으로 개장해 일반에 공개 중인 가마오름 지하요새가 대표적 지하 갱도. 가마오름 지하요새는 3층 구조로 길이가 2㎞에 이른다. 통로를 따라 수십 개의 방이 미로처럼 연결돼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제주도민은 물론 육지의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돼 일일이 삽과 곡괭이로 판 것이다.

갱도와 함께 일본군이 최후의 보루로 만든 시설이 자살 특공 어뢰정 기지. 마라도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크고 작은 인공동굴 15개가 파도마저 삼킬 듯 검은 입을 벌리고 있다. 일오동굴로 불리는 기지는 일본군이 미군 함정을 격침시키려고 자살 특공 어뢰정인 '카이텐(回天)'을 숨겨놓기 위해 판 굴이다. 카이텐은 폭약을 가득 실은 어뢰정으로 바다의 카미가제인 셈. 카이텐 기지는 송악산을 비롯해 수월봉 일출봉 등 5곳에 만들어졌다.

알뜨르의 셋알오름 정상에는 아직도 견고한 고사포 진지가 그대로 남아있다. 만약 일본의 항복이 조금 늦었더라면 이곳 고사포가 불을 뿜었을 것이고 제주도 비경은 잿더미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종전 직후 제주도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무장해제에 들어갔다. 알뜨르 비행장 옆 섯알오름에 있던 일제의 탄약고가 폭파되면서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모슬포 관내에 구금돼 있던 예비검속자 357명 중 251명이 그 해 8월20일 섯알오름의 구덩이에서 집단 학살됐다. 현재 성역화 공사가 한창인 구덩이 주변에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포탄과 총알, 그리고 인골이 수습돼 전시되고 있다.

아름답지만 낯설기만 한 알뜨르 들녘. 제주도의 이국적 풍경 속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제주도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알뜨르 비행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제주시나 서귀포시에서 12번 국도를 타고 모슬포항까지 간 다음 이정표를 따라 농로를 달리면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가 보인다. 내비게이션이 장착된 렌터카를 이용할 경우 '알뜨르 비행장'을 입력하면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송악산과 알뜨르 비행장 등 제주도의 태평양전쟁 유적지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정봉섭 복합관광개발사업단장은 "알뜨르 비행장 일대는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군사시설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라며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진입로를 정비하고 다양한 일정의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깎아지른 해안절벽에 자살 특공 어뢰정을 숨겨놓은 카이텐 기지가 있는 송악산은 완만한 평원 형태의 화산. 분화구 안에는 아직도 검붉은 화산재가 남아있다. 전망대에 서면 한국 최남단의 섬인 마라도는 물론 알뜨르 비행장, 산방산, 한라산, 용머리 해안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송악산 입구의 마라도 유람선 선착장에서 사계리의 용머리해안에 이르는 5㎞ 길이의 해안도로는 매혹적인 드라이브 코스. 웅장한 자태의 산방산과 서정미 넘치는 사계리마을, 그리고 쪽빛바다와 검은 갯바위가 영화 속 풍경과 다름없다. 사계리 해안의 갯바위에서 보는 형제섬의 해돋이도 명물.

제주도 서귀포시 호근동에 자리한 석부작테마공원(064-739-3331)이 지난 연말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석부작테마공원은 통나무 펜션 '귤림성' 뒤편에 조성됐다. 용암석(현무암)에 풍란이나 야생초류를 착근시켜 만든 창작분재 5만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공원 내 귤밭에서는 감귤따기 체험도 가능하다.

서귀포시 동홍동의 대영일식(064-763-4325)은 다금바리와 돌돔 전문 횟집으로 잠수부인 주인이 직접 잡은 자연산만 내놓는다. 자연산 다금바리를 취급하는 횟집은 제주도에 대영일식을 비롯해 2∼3곳뿐. 특히 대영일식은 5㎏ 이상 크기의 다금바리만 잡기 때문에 맛이 좋기로 이름났다.

제주=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