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에는 꽃무릇이 한창입니다.
사람들이 '100m 미인'이란 말들 쓰더군요.
개인적으로 꽃무릇이 그런 류 아닌가 생각합니다.
햇살 좋은 날, 멀리서 보면 연녹의 쭉쭉 뻗은 꽃대들 위에서
선홍의 비단결처럼 잘게 빛나는 것이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에, 참 강렬하게 곱다는 느낌을 갖지만,
막상 가까이 서면, 곱다는 인상도 안들고
사진발도 별로 안받는, 몸만 날씬한 꽃 입니다.
저는 이렇게 군식한 꽃무릇의 무리들에서, 밑부분이 좋습니다.
초록 잔디밭에서 힘있게, 단 하나의 줄기로 올라와 다섯개의 꽃대로 갈라지는 이 지점까지,
그리고 연녹의 도열과 그 빛들---
언젠가, 우주 어디선가 들려오는 메시지를 받는,
교신의 느낌을 갖는 꽃모양을 소개 했었는데
꽃무릇이야말로 으뜸의 형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후박나무 언덕에 붉은 물 들었습니다.
수목원 탐방객들은 천리포의 이 언덕에 들어서면,
이 풍경에 감탄을 하곤 하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언덕이 간직한 많은 풍경들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한번의 방문으로 정원을 이해할 수 없듯이.
후박나무 언덕은 '정원은 이래야 한다'를 보여주는,
설명없이는 알 수 없는, 천리포의 비밀의 언덕입니다.
이제 그 언덕을 천천히 거닐어 보겠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 가면, 본원의 큰연못과 조구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습니다.
나무터널같은 길을 약 10m 정도 지나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시야가 훤히 뚫리며 왼편의 바다에 연한 모래동산과 오른편 동산 사이에
살짝 웨이브진 언덕길이 나타납니다.
이곳이 후박나무 언덕입니다.
제가 명명한 언덕이지요.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오동나무, 차나무, 가래나무, 동백, 비버늄, 당느릅나무, 산수유, Schimia,
목련, 소사나무 등등이 있지만 언덕의 정점에 후박나무가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이 큰 나무들 밑으로 작은 관목들이 각종 구근들과 사이좋게 자리를 잡고 있어,
조금 비워 보이는 듯 하지만 전혀 틈이 없는 화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언덕은 남향으로 경사져 내려가고 있고, 좌우측의 조그만 동산으로 보호받고 있어
해풍의 직접적인 영향은 덜 받는 반면, 해양성 기후의 특혜를 누리고 있어,
겨울에도 얼지않는 수목원 내에서 가장 따뜻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봄을 가장 먼저 맞고, 가을을 가장 늦게 보내는,
그러면서 온도의 변화가 심하지 않는 이상적인 정원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겨울에도 상록 활엽수의 초록으로 눈이 심심하지 않는 푸른 언덕입니다.
돌아가신 민원장님은, 푸른 언덕에 그림같은 한옥집을 지어
노래가사에나 나올 법한 이상향의 게스트하우스를 지어셨지요.
그 집이 지금의 소사나무집 입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양쪽켠의 화단은 출입금지 때문에 줄을 쳤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수목원 식구들한테 혼도 나고 눈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스노우드�(설강화)
이 언덕은 봄을 제일 먼저 맞고 가을을 가장 늦게 보내는 구근들로 가득찬 땅이기 하고,
첫봄의 구근으로 부터 늦가을까지 많은 수목과 화초를 길러내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주 밟는다거나, 구두로 들어간다거나, 삼각대를 설치하고 사진을 찍으면
곧바로 혼이 납니다.
크로커스.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것은 3월의 크로커스와 스노우드�입니다.
해마다 조금식 틀리겠지만, 2월의 눈밭에서도 피기도 히지요.
수선화 '떼데아떼떼.
키작은 수선화 떼데아떼떼도 연이어 피고요,
4월이면 오른쪽 동산에 능수벚꽃이 흐드러지게 늘어지고,
무스카리와 온갖 수선들이 절정을 이루고,
소사나무집 앞 Coate 목련은 그 절정을 축하하듯이,
조선치마같은 자홍의 꽃들이 만발합니다.
따뜻한 중국이 고향인 당느릅나무는 제 고향인양
편안히 연녹색 겹장미같은 꽃과 잎새의 자태를 한껏 뽑냅니다.
계절의 여왕 5월 만큼이나 이 언덕의 5월은 년중
가장 눈부신 풍경을 연출합니다.
가래나무도 5월이 잎과 꽃으로 시선을 끄는 시간이지요.
앞장서 진하게 먼저 핀 목련은 이미 지고
잎과 함께 올라온 막내 목련의 여린 떨림에는 5월의 아득함이 실려 있습니다.
정말 운이 좋은 날이면 이 언덕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이 목련의 잎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국적이고 화려한 비버늄의 꽃과 잎의 투과도 함께 볼 수 있고요,
이 사랑스러운 연홍의 겹벚꽃도 놓칠 수 없는 언덕길 초입의 5월의 명품입니다.
이름이 Ojhosin 이던가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만병초도 잊지마시고요.
언덕 길이라는 것이 50m가 채 되지않지요.
고향집 뒷동산 오르듯이 느슨하게 오르다가
후박나무 밑에 단풍나무 한그루 있습니다.
5월이면 연노랑 다섯잎새와 새붉은 꽃을 피우지요.
후박나무 옆에서 슬쩍 올라탄 으름덩굴은 몇 년을 자랐는 지
훌쩍 커서 흡사 독특한 조명등을 구경하듯이 올려다 보아야 합니다.
언덕 입구의 등대꽃도 5월 중순이면 불을 밝히고,
홍가시 나무는 꽃이 아닌 잎으로 불을 피우지요.
5월이면 오동나무의 어린 잎 조차도 예사롭지 않은 색을 보여주고,
능수벚나무 밑의 로도덴드론은 붉은 색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이 느릅나무의 잎새는 5월의 화사한 햇살때문에 이렇게 빛바랜 연녹을 띄는 게 아니고
원래 색이 아주 밝은 연녹으로 날이 흐려도 숲의 콘트라스트를 더해주는
항상 표정이 밝은 친구입니다.
5월의 마지막 쯤이면 오동나무 새잎은 위로 올라가
역시 꽃 보다 더 화려한 잎의 축제를 벌이지요.
어쩌자고 이 붉은 병꽃나무는 빛을 머금고 있는 지---
단풍은 어느 새 꽃잎을 떨어트리고
연분홍빛 날개를 달고 먼 비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후박나무 꽃 피었습니다.
흔히들 꽃이 후박한 일본목련을 두고 후박나무 하는데
진짜 후박나무는 늦여름철 고마리같은 작은 꽃 입니다.
이 후박나무도 6월이면 차라리 꽃 보다 화려한 잎을 선보입니다.
6월이면 홍가시나무의 화려했던 잎은 초록으로 여려지고
숲속의 초록에 가장 어울리는 백색으로 꽃을 피웁니다.
만첩 빈도리의 여린 백색과 핑크의 한방울 번짐을 볼 수 있는 6월입니다.
7월이면 소사나무집 능소화가 피기 시작하여 9월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하겠지요.
멀리 울릉도에서 시집온 섬바디 입니다.
여름의 백색유등이라 할까요.
7월이면 대개 장마통이라 아가판수스의 활짝핀 기지개를 보기가 쉽진 않지만
이 역시 장마틈새의 맑은 날 언덕 초입 만병초 밑에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7월의 절정은 당느릅나무 맞은 편의 Schimia 일 것입니다.
상록활엽의 이 거대한 나무 전체가 온통 향기 가득한 꽃으로 덮여 있습니다.
8월이면 후박나무는 진녹의 열매를 맺고,
보랏빛 무릇과,
보랏빛 맥문동이 언덕에 어울려 보랏빛 8월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9월과 10월 사이에 꽃무릇으로
언덕을 붉게 물들이고 나면,
꽃 피는 계절을 다 보내는 것이지요.
남은 것은 물드는 단풍입니다.
이처럼
후박나무 언덕은,
그곳에 있는 수목과 화초의 생태와 사계절의 얼굴을 알지 못하면,
한달음에 올라 언덕의 바다풍경 한번 보고, 지나쳐 버릴
비밀의 정원이자,
일조량과 지형, 기후와 사계절의 식생,
빛과 수목, 공간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성과 서정적 감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정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리포에 들리시면 꼭
깊은 눈으로
느린 걸음으로 눈맞추시기 바랍니다.
꽃무릇은
깊어지는 가을을 축복하는
꽃인가 봅니다.
<꿈꾸는 정원사>
포지션 - I LOVE YOU
'전원주택 > 정원 및 정원수 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리향 (0) | 2008.10.14 |
---|---|
정원에 무궁화 한 그루 (0) | 2008.10.04 |
산방산 비원 (0) | 2008.09.20 |
옥상정원 (0) | 2008.09.06 |
정원소품 (0) | 2008.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