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으악새와 동심초)
전국의 산이 불붙고 있다. 가을이 부르는 소리를 못들은 체 하다가 결국 항복하고 주말에 산행을 나서보니 이곳 저곳에서 허연 솜털을 날리는 억새들이 하늘하늘 손을 흔들고 있다. 올해 가을은 비가 많지 않아 유난히 단풍이 곱다. 그런 만큼 산행에서 만나는 억새들도 정겹기 그지없다. 흥에 못이겨 누군가가 입으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
그러자 곧장 뒤따르는 질문; "으악새가 뭐예요? 무슨 새 길래 슬피 우는가요?"
여기에 일행 중에서 제법 유식한 분이 목소리를 높인다;"아니 아직 그것도 몰라? 으악새는 새가 아니야. 저기 저 억새풀을 사투리로 으악새라고 하는거야." 이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면 산야를 덮고 있는 '으악새'는 바람에 정말로 슬피 우는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상식이 되어버린 으악새가 억새라는 풀이 아니라 실제로는 새라는 주장이 최근 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말글연구회장인 정재도 선생은 사람들이 으악새를 억새풀로 알고있는 것은 1990년 이전에 나온 모든 국어사전에 으악새가 억새의 사투리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라면서 억새는 산이나 들에 나는 풀로서 소나 양의 먹이로 쓰이는데, 그런 억새가 슬피운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또 노래가사를 보면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라고 해서 분명히 여울이나 강물 등 물과 관계 있는 곳을 묘사하고 있으며, 2절에서도 "뜸북새 슬피우니"라고 해서 새가 나오니 이 으악새가 풀이라는 설명은 이상해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평안도 사투리에 '왁새'라는 새가 있는데, 국어사전에 보면 '왁새'의 표준어는 '왜가리'로서, 왜가리는 봄철에 우리나라에 와서 논이나 강가, 또는 호숫가에서 물고기나 개구리 등을 잡아먹으며 살다가 가을철이 되면 돌아가는 여름철새이기에 "짝사랑"이라는 노래말과 더 어울린다고 설명한다. 즉 으악새, 곧 왜가리가 이제 곧 떠나야 할 가을이 되어 슬피운다고 보는 것이 더 이치에 맞아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2년 이후에 나온 <우리말 큰사전>은 으악새를 억새의 사투리도 되고 왜가리의 사투리도 된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지고 뜻도 풍부해질 수 있으므로 새라고 할 수도 있고 풀이라고 해도 꼭 틀렸다고 하기는 뭐하므로 으악새를 억새라는 풀로 보아도 좋고 왜가리라는 새로 보아도 괜찮다고 하겠다.
그런 뜻의 혼란을 생각하니 동심초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이 노래는 김성태 선생이 작곡하신 것으로 우리들이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 온 명가곡이다. 근래에는 조수미, 신영옥을 비롯한 유명 소프라노들이 다투어 부르는 명곡인데 이 곡의 노래말은 한 때 신사임당이 지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의 여류시인의 한시를 김소월의 스승인 안서 김억(岸署 金億)이 번안한 것이다. 원래의 한시는 4수로 된 '춘망사(春望詞, 봄날의 바램)'라는 5언절구로서
花開不同賞, 꽃 피어도 함께 바라볼 수 없고
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
欲問相思處,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디에 있나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지는 때에 있다네
攬草結同心, 풀 뜯어 동심결로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 님에게 보내려 마음먹다가
春愁正斷絶, 그리워 타는 마음이 잦아질 때에
春鳥復哀鳴. 봄 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아름다운 기약 아직 아득한데
不結同心人, 한 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那堪花滿枝,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飜作兩相思.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玉箸垂朝鏡, 거울에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春風知不知. 봄바람아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라고 해서 제1수에서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써서 상사(相思)의 정을 표현했고 제2수는 마음과 마음이 합쳐지는 것을 바라는 아름다운 소원을, 제3수에서는 진정한 연인을 만나지 못해 비통해 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있다. 가곡 '동심초'의 가사는 바로 이 제3수를 우리나라의 말의 맛을 살려 다시 쓴 것이다.
그런데 동심초는 무엇일까?
노랫말을 보면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로 시작하고 있어 "아! 동심초 꽃잎이 바람에 지는구나"하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전에 보면 동심초라는 단어가 없다. 중국말 사전에도 동심초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동심초라는 꽃이나 식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동심초는 무엇이란 말인가?
동심초는 무슨 풀이름이 아니라 바로 연서(戀書), 곧 러브레터란다. 그런데 왜 '풀 초(草)'가 들어가는가? 종이는 풀로 만드는 것이며 러브레터 접는 방식이 바로 돗자리 짜는 풀의 매듭방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설명을 듣고 이 시를 다시 살펴보자. 괄호안에 풀어놓은 설명을 주목하면서 말이다.
攬結草同心 풀을 따서 한 마음으로 맺어 (사랑의 편지 써서는 곱게 접어)
將以遺知音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네 (내 맘 아실 이에게 보내려 하네)
春愁正斷絶 봄 시름은 그렇게 끊어 졌건만(편지 쓰는 동안에는 행복했건만)
春鳥復哀吟 봄 새가 다시 슬피 우네 (쓴 편지 부칠 길이 없어 슬퍼지네)
風花日將老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그리워 하다가 세월만 흘러가는데)
佳期猶渺渺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만나 볼 기약은 아득하기만 하네)
不結同心人 무어라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한 마음이건만 맺지 못할 사람인데)
空結同心草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부질없이 편지만 쓰면 무엇하나)
또한 여기에서 不結同心人도 김억의 번역처럼 마음과 마음을 맺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이건만 맺지 못할 사람' 이 바른 번역이라고 한다. 바로 윗 구절에 이미 "내 마음 아시는 분께 보내려 하네" 가 나오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空結同心草도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가 아니라 "헛되이 편지만 접었다가 폈다 하네"가 바른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전체의 바른 번역은
‘한 마음이지만 맺어지지 못할 사람이라 그걸 알면서도 헛되이 연애편지만 썼다가 찢었다가 하네 (혹은 접었다 폈다하네)’
가 된다는 설명이다. 즉 부치지도 못할 편지 써놓고는 하릴없이 접었다고 펴고 접었다고 펴고 하는 여인의 애타는 현실을 그린 것이 된다. '월명사'라는 ID를 가진 블로그에서 발견한 이 설명이 그럴 듯 하다. '동심초'노래를 들으면서 김안서의 번안으로 된 노래가사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를 따라 부르기는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에 비춘다면, 이 설명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同心結은 옛날 연애편지를 접는 방식 또는 그 편지이며, 그밖에도 사랑의 정표의 의미로 화초나 물건으로 만든 여러 가지 매듭, 혹은 장식물의 총칭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同心은 한마음이나 막연한 상징물이 아니라 바로 同心結로 마음을 담은 러브레터라는 설명인데 보다 구체적이고 멋있지 않은가? .
이 한시의 원작자 설도(薛濤 대략 770~832)는 중국 당대(唐代)의 유명한 기녀이며 문학인이다. 우리나라의 황진이에 비견할 수 있을까? 어렸을적 부터 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주 총명하고 말재주도 뛰어나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당시의 일류 문인들인 백거이(白居易), 원진(元 禾+眞),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등과 교류가 많았는데 이들 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으며,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는 감정이 절절이 묻어나는 명작이 많아 후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하는데 약 450편의 시를 썼지만 90수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 든 동심결, 동심초에 대한 설명이 러브레터라는 설명이 더 맞을 수 있는 것은, 중국에 설도전(薛濤箋)이라고 하는 편지지가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설도는 만년에 시성 두보(杜甫)의 초당으로서 유명한 성도(成都)의 서교(西郊)에 있는 완화계(일명 백화담) 근처 만리교 근방으로 은거하였는데 이 근처는 양질의 종이가 생산되는 곳이어서 설도는 심홍색 종이를 만들게 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촉의 명사들과 시를 증답(贈答)하였다고 하며 그것이 풍류인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이런 식의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또는 ‘완화전(浣花箋)’이라 하여 크게 유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심초의 바른 번역은 '사랑의 편지' 혹은 현대식으로 러브레터가 맞는 것 같다.
이런 점을 당시의 뛰어난 시인인 김안서가 모를 리는 없었겠지만 당시 시중에 도는 번역문만 참조해서 번안하다 보니 마치 꽃이름처럼 되어버렸고, 그러다 보니 동심초라는 꽃도 우리나라에는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떨까? 우리나라 소프라노들이 부르는 동심초는 '마음이 통하는 꽃'이란 듯처럼 보이는 그것 그대로도 좋지 않은가? 우리가 세상일을 모두 다 알고 살수는 없다. 적당히 알면서 즐기는 것도 인생이다. 으악새가 새면 어떻고 풀이면 어떤가? 동심초가 꽃이면 어떻고 사랑의 편지면 어떤가? 모두 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인데.
사진:류병관
산에 가면 '으악새'가 지천인 계절, '으악새'가 심금을 울리는 이 계절. 우리는 이 계절에 '동심초'를 보낼 사람이 없는가?
가장 가까이서 연인과 함께 지내는 모든 이들은 행복할 지언저.
한평생 연인을 그리며 가슴 절절이 써놓는 편지를 부치지도 못한 저 당나라의 설도라는 여자보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출처: 흙손님 블로그
흐르는 곡: 동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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