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칸반도
2. 발칸반도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재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미 갈등의 소지를 품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발칸
반도는 동부 유럽과 중남부 유럽,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니 지정학적으로도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칸반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유럽의 화약고’란 단어다. 그만큼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는 장소란 뜻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도 이곳에서의 분쟁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도 끝없는 갈등과 분쟁의 터전이 되어 왔다.
왜 그랬을까?
발칸은 ‘산맥’이란 뜻의 터키어로서, 발칸반도는 유럽의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하류와 사바 강, 동쪽
으로는 흑해, 에게 해, 남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 위치한 국가로는 알바니아, 불가
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마케도니아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
운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마케도니아는 본래 유고슬라비아, 즉 ‘남슬라브
족의 땅’이란 명칭 아래 연방제 국가에 속해 있었으나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티토 대통령 사후 사회주의권 붕괴의 소용돌이 속
에서 여러 민족국가로 분리되었다.발칸반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유럽의 화약고’란 단어다. 그만큼 분쟁의 소지를 안
고 있는 장소란 뜻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도 이곳에서의 분쟁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도 끝없는 갈등
과 분쟁의 터전이 되어 왔다. 왜 그랬을까?
이쯤에서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란 인물을 잠깐 살펴보자.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가 사라지자마자 그동안
통일 국가로 잘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을까?
티토의 본명은 조십 브로즈였다. 티토란 젊은 시절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사용하던 여러 가명 가운데 하나로, 그가 가장 선
호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국경 근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어서부터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다. 가명을 쓰면서도 여러 번 붙잡혔다면 순발력이 떨어지는 인물 같은데 사실
그는 유머러스할 뿐 아니라 음악도 좋아해서 놀라운 피아노 솜씨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고슬라비아 해방을 위해 무력 투쟁에 가담했는데 그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훗날 유고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티토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는데도 그 무렵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사상을 세계인들은 티토이즘이라 불렀는데, 이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고 할 만하다.
티토는 후에 냉전 시대, 즉 미국과 소련 사이의 대립으로 유지되던 세계 질서 속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
을 추구하던 나라들의 모임인 비동맹회의를 인도 수상 네루,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와 함께 처음 소집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제3세계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전 지구 차원의 독자적인 세력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세계적 차원에서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이처럼 세계인을 통합할 만한 능력을 갖춘 그였기에 발칸의 화약고를 평화롭게 유지시킬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나자 유고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었고, 얼마 가지 못해 다민족국가 유고연방은 뿔뿔
이 흩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복잡한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는 유고연방, 즉 유고슬라비아 내에 존재
하는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공동체 내에서 진정으로 평등하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화정을 시행함으로써 모든 민족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었다.
한편 발칸반도는 그 이름대로 대부분 산악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도 왜 이곳이 유럽의 화약고란 별칭을 갖게 되었을까?
발칸 반도에 거주하는 민족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인을 포함하는 슬라브족과 루마니아인, 터키인, 알바니아인,
그리스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소수민족이 있다. 한편 종교적으로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해 그리스정교
도가 가장 많고, 개신교도, 가톨릭교도, 이슬람교도도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재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미 갈등의 소지를 품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세계 역사를
돌아보아도 민족간 분규와 종교간 분규가 가장 흔하지 않은가. 게다가 발칸반도는 동부 유럽과 중남부 유럽,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다양한 국가와 민족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이어져 왔다. 그런 까닭에 이 지역의 지배권은 수많은 민족에게 전해지면서 현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1912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두 차례 군사 충돌이 있었다. 그 무렵 강대국인 오스트리아
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체결된 발칸동맹 회원국(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들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제1
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전쟁에서 얻은 영토의 분할을 놓고 동맹국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자 1913년에는 세르비아와 그리스, 루
마니아의 세 나라가 불가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불가리아는 패하고 말았다.
물론 발칸 지역의 불화가 이로써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듬해, 즉 1914년 6월 남부 슬라브족 출신의 세르비아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 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공을 암살한 것이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고, 이는
발칸반도의 갈등을 넘어 막 출범한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에 대한 주도권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칸반도
는 평화의 길로 들어서는 듯했으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1990년 이후 해체되면서 세르비아계에 의해 인
종 청소란 이름 아래 25만 명의 인명이 살상된 보스니아 내전(1992~1995), 세르비아 군의 알바니아계 인종 학살로 인해 야기된
코소보 사태(1993~1999) 등으로 아직도 발칸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수립되었다고 보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발칸 전쟁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리비아를 얻기 위해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이 이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허약함이 드러났고, 이는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선전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는 발칸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제1차 발칸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바니아도 독립을 위해 발칸 동맹군 편에서 싸우게 된다.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이 아프리카에 있었던 까닭에, 두 달만에 오스만 제국은 대패하면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수도 이스탄불을 제외한 발칸 반도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으며, 알바니아도 독립국이 된다. 오스만 제국이 할양한 남은 영토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이 나누어 가지게 되는데, 영토 분배 과정에서 발칸 동맹 국가 간 불화가 생기게 되면서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난다.
제 1차 발칸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그리스는 크레타 섬을, 불가리아는 남루멜리아와 동트라키아,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남은 일부를 차지한다.그러나 1908년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신생 불가리아의 지나친 팽창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그리스,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와 함께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에 맞섰다. 1913년 불가리아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발발한 제2차 발칸 전쟁은 불가리아에 대항하여 알바니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의 모든 국가가 싸우는 양상이 되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이 영토 회복을 위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결국 불가리아는 항복을 하게 된다.
불가리아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어 제 1차 발칸 전쟁으로 얻었던 모든 영토를 할양해야 했으며, 세르비아와 그리스, 루마니아는 영토를 확장한다. 오스만 제국도 조약을 통해 잃었던 영토를 일부 회복하나 이 전쟁이 불씨가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리비아로 원정을 떠나는 이태리군,이태리-투르만 전쟁 시작
트리폴리의 이태리군
리비아의 이태리 공군
리비아 양민들을 학살한 이태리군
결국 이태리군은 전쟁에서 승리해 리비아를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 얻으나 리비아 오마르 무크타르가 이끌는 독립군 세력에 의해 내륙 깊숙히는 들어가지 못하고 해안가 지방만 점령한다,여기에서 우리에게 유명한 안소니 퀸 주연의 "사막의 라이언"이라는 영화의 실제 스토리로 양민들을 학살하고 1922년 무솔리니에 의해 루돌프 그라치아나 장군이 리비아 총독으로 임명되자 외부로 부터 독립군을 차단한다고 이집트-리비아간 철조망을 치고 베드윈족 12만5천명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어 그중 2/3가 죽엇다
리비아 독립운동의 영웅인 오마르 무크타르
영화 "사막의 라이언"에서 안소니 퀸이 열연한 실존 인물,20여년간 리비아 독립운동을 하다 1932년 부상 당한채 이태리군에게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 서"우리는 신에게서 부터 왔고 ,언젠가는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70세의 나이에 교수형 당함
이태리의 리비아 이주민 1차 2만명이 선박에 오르기전 사진.'
이태리 정부는 1930년대 까지 약 8만5천여명의 이태리인들을 리비아로 이주 시킨다
발칸 동맹 수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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