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 지식

옆의 풀 자라지 못하게 독성물질… 식물의 생존경쟁, 동물 뺨치네

bthong 2014. 8. 18. 00:26

 

겉보기와는 영 딴판인 식물들의 예사롭지 않은 속내를 좀 보려 한다. 텃밭에 심은 남새가 띄엄띄엄 버성기면 약삭스러운 바랭이나 비름 따위가 잽싸게 비집고 들어오지만, 입추의 여지 없이 배게 난 얼갈이배추나 열무밭은 전혀 엄두도 못 낸다. 그리고 촘촘한 채소를 솎지 않고 그냥 두면 충실한 놈들이 부실한 것들을 잔인하게도 깡그리 짓뭉개버리고, 뜨문뜨문 몇만 득세하여 문실문실 자란다. 정녕 잘났다고 뻐기는 어리석고 가녀린 동물들의 살기 다툼 정도는 저리 가라다.

나무도 모아 심어야 곧게 자란다고 한다. 쭉쭉 치벋은 솔밭에 들어, 미생물을 억제한다는 상큼한 피톤치드를 흠씬 맡으며 삼림욕을 하다 보면 풀숲은 참 푸근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거목 밑에 잔솔 못 자란다고, 소나무밭에는 애송은 물론이고 딴것들도 범접(犯接)하지 못하니, 이는 솔뿌리나 썩은 솔잎이 분비한 갈로타닌(gallotannin)이나, 짙게 드리워진 그늘 탓이다. 그렇지만 어미 나무를 베어버리면 수많은 애솔이 와글와글 앞다퉈 고개를 내민다.

토끼풀 꽃이 만발한 모습. 잔디밭의 토끼풀은 잔디를 말려 죽이면서 자신의 삶터를 조금씩 넓혀간다.
토끼풀 꽃이 만발한 모습. 잔디밭의 토끼풀은 잔디를 말려 죽이면서 자신의 삶터를 조금씩 넓혀간다. / 조선일보DB
게다가 호두나무는 주글론(juglone)을, 유칼립투스는 유칼립톨(eucalyptol)이란 물질을 잎줄기·뿌리·낙엽에서 뿜어내 주변 풋나무를 못살게 한다. 또 잔디밭의 토끼풀이 휘발성 테르펜(terpene)을 내어 잔디를 거꾸러뜨리면서 끈질기게 삶터를 야금야금 넓혀간다. 여기에 든 예들은 식물계에서 잘 알려진 것일 뿐, 여느 식물도 나름대로 죽기 살기로 서로 박 터지게 싸운다. 턱없이 미욱한 식물이 뭘 안다고? 모르는 소리다. 귀신이요 요물들이다. 지구에 동물보다 훨씬 먼저 온, 알아줘야 하는 우리 형님이신걸.

이렇게 뿌리나 잎줄기에서 나름대로 독성 물질을 분비하여 이웃 식물의 발아·생장을 억제하는 생물 현상을 타감작용(他感作用)이라 하며, 다른 말로 알레로패시(allelopathy)라 한다. '他感'이란 딴 식물에 영향을 미침을 뜻하고, allelopathy의 'alle-'는 '서로(상호)', '-pathy'는 '해침'이란 의미다. 그리고 앞서 말한 갈로타닌이나 테르펜처럼 옆 식물을 죽이거나 해를 끼치는 물질을 타감물질(他感物質·allelochemicals)이라 한다.

노린재를 건드리거나 잡는 순간 역한 냄새를 뿜어내듯이 허브 식물이나 제라늄 따위를 그냥 두면 아무 향이 나지 않지만 슬쩍 스치기만 해도 낌새를 채고 별안간 강한 냄새(타감물질)를 풀풀 풍긴다. 또한 식물성화학물질(phytochemical)인 설익은 토마토나 감자의 솔라닌(solanine), 항균성인 마늘의 알리신(allicin), 매운 고추의 캡사이신(capsaicin) 같은 대사 산물을 세포의 액포(液胞) 안에 묵혀두어서 거센 해충이나 지독한 병균을 막고 쫓는 무기로 삼는다. 단연코 깔볼 식물이 아니다.

사람이나 여느 동식물 모두가 '먹이(food)와 공간(space)'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드센 약육강식과 검질긴 생존경쟁을 한다. 그런데 식물들이 단순히 양분·물·해를 놓고 다툴 때를 '자원 경쟁'이라 하는데, 실제로 타감물질로 보호·방어·생존을 도모하는 것보다 자원 경쟁이 심각한 경우가 훨씬 많다. 식물은 그렇게 온몸을 던져 섬뜩할 정도로 야멸스레 싸움질하니, 뿌리로는 물과 거름을 뺏고, 잎줄기로는 상대를 누르고 빛을 가린다.

어쨌거나 식물은 한번 터 잡으면 옴짝달싹 못하고, 일평생을 제자리에 붙박이로 버둥대며, 절박하고 모진 환경에도 악착같이 버텨내니 적이 놀랍다 하겠다. 찌는 더위에 칼 추위, 목마른 가뭄에 큰물도 마냥 견뎌내는 영특한 식물들에서 한 수 배운다.
권오길 | 강원대 명예교수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