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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秦나라의 첫(始) 皇帝 의 이야기 (진시황제)

bthong 2006. 11. 17. 22:14

불교의 시조인 석가모니가 고인도에서 탄생하지 300년이 중국 북방의 한단이라고 하는 오랜 소도시에서 사내애가 태어났다. 

신생아의 울음소리는 비록 다른 수많은 갓난애의 울음소리와 다를 없었지만 수십년 이후 그는 드디어 위세 당당한 역사적 인물로, 중국 역사에서 대통일을 이룩한 봉건제국의 창시자로, 중국의 황제로 되었다. 

 

그가 바로 세상에서 이름난 진시황제이다. 

그로부터 세월은 이미 1,000년이 흘렀다. 

그러나 중국에서 진시황이라고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 사람으로서 진시황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을 모른다는거나 이집트인 피라미드를 모른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정치가와 군사가들은 진시황의 정치적 득실, 원대한 지략, 뛰어난 재능에 관심이 있다면 일반 대중은 그의 파란 많은 경력에 보다 흥미를 가진다. 

그런데 진시황의 일생을 살펴보면 면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있는 전기적 색채를 띄고 있다.

 

진시황은 성이 (), 이름이 () 이며 BC 259년에 태어나 BC 210년에 별세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바로 중국역사에서 () , () , () , () , () , () , ()  7 제후국이 분열. 할거하며 패권을 다투고 전쟁이 끊임없던 전국 시대 말기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자초(子楚), 진소왕(秦昭王), 손자이며 전안국군(溱安國君) 아들이 었다 

당시 변화 물상한 할거전쟁의 와중에서 제후국간에는 상호 제약과 외교적 전략의 필요로부터 흔히 자기의 아들 또는 손자를 다른 나라에 인질로 보내어 상대의 신임을 꾀하곤 하였다. 

안국군에게는 자녀가 매우 많았다. 

그중 자초는 적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었으므로 진나라 궁중에서 별로 중요시 되지 못했다.  때문에 진나라와 조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자초는 조나라에 인질로 파견되었다

 

이때로부터 그는 이역 땅에서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하루를 일년맞잡이로 살았다.  무렵 조나라 한단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대상인 여부위(呂不韋) 정치적 두뇌와 전략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초의 특수한 가정배경과 처지를 간파한 그는 진귀한 물건은 쟁취할 필요가 있다.” 것을 깨닫고 자초를 한차례의 정치적 투기를 이용하려고 했다.”  것을 깨닫고 자초를 한차례의 정치적 투기를 이용하려고 했다. 

 

여부위는 또한 자기의 애첩중에서 용모가 이쁘고 노래와 춤도 잘하는 한단의 조회(趙姬) 자초에게 안해로 주었다.  얼마후 조희는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영정(瀛政) 이다. 

사기(史記) 기록에 따르면 조희는 자초의 안해가  되기전에 이미 여부위와 동거하여 태기가 있었으므로 영정의 생부가 구경 누구인가는 천고의 수수께끼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진시황을 여부위의 사생아라고 하면서 영정을 여정(呂政)”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는데 모두 이에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사생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가 후에 이룩한 위대한 역사적 기여와 결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깊이 따질 필요가 없다. 

  자초는 귀국한 진나라의 왕위를 계승하여 장양왕(壯襄王) 되었고 영정을 태자로 삼았다.  BC 246 장양왕이 병으로 별세하자 나어린 영정은 진나라 왕의 옥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 영정의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연합과 분열의 변화가 무상했던 정치정세하에서 나어린 그로서는 정사를 담당하기 어렸웠으므로 국가대사는 태후와 대사들에게 위탁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여 상방(相邦) 여부위와 태후의 총신인 노독이 한때 국정을 담당했다. 

 

시작했다.  하기야 혈기왕성하고 포부가 컸던 영정이 어찌 대권의 상실을 용납할 있겠는가!  그는 마침내 노독을 극살하고 태후를 연급하였으며 여부위의 상방직무를 파면했다. 

 

그리고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충고를 채납하였으면서 일부 문신과 무장들을 기용했다. 

그중 문신으로는 이사(李斯) , 왕관(王灌) 있었고 무장으로는 왕전(王剪) , 이료(裡僚) , 몽괄(蒙括) 등이 있었다. 

그는 선왕의 변법혁신을 시행하고 경정(耕戰) 권장하는 진보적인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진나라의 국력을 강화하여 각국의 수위를 차지하였으며 중국의 국력을 강화하여 각국의 수위를 차지하였으며 중국의 통일에 필요한 여건을 마련했다.

 

 BC 230년부터 BC 221 년에 이르기까지 진나라는 원교근정(遠交近政),분심이간(分心離間), 각개격파(各個擊破) 책략으로 10여년간의 가열 처절한 전쟁을 거쳐 . . . . . 6 제후국을 연이어 소멸하고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춘추전국 시대이래 수백년 동안의 분열할거. 전란불휴의 국면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사상 처음으로 다민족 중앙집권의 봉건제국을 창건했다. 

 

통일을 이룩한 영정은 대신들에게 제호(帝號), 국가 최고통치자의 칭호에 대해 의논하도록 명령했다.  대신들은 의논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영정은 자기의 덕성이 삼황(三皇) 보다 높고 공로가 오제(五帝) 보다 크므로 삼황과 오제를 겸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국가 최고 통치자를 황제(皇帝)”라고 부르기로 하고 자기를 시황제(始皇帝)” 라고 지칭했다.  이로부터 황제라는 칭호는 역대 봉건제왕들에 의해 2,000 동안이나 계속 사용되어 왔다. 

 

진시황제는 정권을 공고히 하고저 () , ()  이래의 분봉제(分封制) 폐지하고 군현제(君顯制) 시행했다. 

전국을 36 군으로 나누고 군산하에 , 현산하에 (), (), () 설치했다.  중앙에는 3. 9경을 설치하여 직접 황제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주요군. 정관리는 모두 황제가  임명, 파면하고 . 정대권을 자기 한몸에 집중시켰다. 

그는 법률을 정하고 법제를 중요시하여 모든 일을 법에 따라 처리하도록하면서 법법률을 국가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되게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시행한 3 통일이다.  중앙이 (), (), () 기준기를 하달하여 전국의 . . 형을 통일하고 승상(承相) 이사와 중차부령(中車府令) 조고 등에게 영을 내려 문자를 정리하여 진나라 소전으로 전국의 문자를 통일하도록 했으며 6개국의 낡은 화폐를 폐지하고 진나라의 반량전(半兩錢) 가장 기본적인 유통화폐로 삼아 전국의 화폐를 통일했다. 

세가지의 우대한 조처는 당시의 경제발전과 문화교류를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혜택이 춘추에 길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밖에 그는 영을 내려 치도(馳道) 직도(直道) 정비하고 전국 시대에 각국이 축조했던 장성을 한데 이어놓아 서쪽의 임조(臨兆) 에서 동쪽의 산해관(山海關) 이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리장성을 이루어 놓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진시황제를 천고의 1황제라고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실로 그의 일생은 부단한 기적 창출한 인생이라고 말할 있다.

BC 210 진시황은 순행도중 사구평대(오늘의 하북성 광종현 경내) 에서 병으로 별세, 향년 50세였다. 

그가 죽은 아들 호해교소(胡亥郊紹) 형부소(扶蘇) 모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가 바로 2세이다.  그러나 이때는 진왕조가 이미 전성기를 지나 막다른 골목에 처한 때였다.  얼마후 진왕조는 전국을 휩쓴 진승(蔯勝), 오광(吳廣) 농민봉기에 의해 물먹은 담처럼 일조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왕조는 창건되어 멸망에 이르기까지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법에 걸려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법망이 치밀하여 고관 귀족에서 평민 백성에 이르기까지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법에 걸려들기 마련이었다. 

() 나라 육교(陸蕎) 신어(新語) 에서 말한바와 같이 폭민을 조처하는데 지나친 극형을 썼다.”  둘째는 대규모적인 토목공사와 가렵주구 착취였다. 

통계에 의하면 진시황은 통일 10년간에 오령(五嶺) 수비에 50, 장성 축조에 50, 북방 흉노 방어에 30, 아방궁과 능묘 건조에 70, 이밖에 기타 잡역까지 합하면 당시 전국 인구의 거의 10% 차지하는 200여만의 인부를 징발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청장년 노동력이었다.  이는 사회 생산력 발전을 크게 파괴하였으며 국민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과 재난을 초래했다. 

 

이밖에 2 호해의 우매와 무능도 진왕조의 단명을 재촉한 주요인의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라는 전고에서도 2세의 아둔함을 엿볼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세의 정치가와 사학가들은 모두 진왕조의 흥망성쇠 경험과 교훈을 꾸준히 총화, 검토해왔다. 

반세기밖에  안되는  진시황의 생애는 후세 사람들에게 천년불휴의 논쟁을 남겨놓았다.  진시황에 대한 평가도 자고로 줄곧 비난과 칭찬이 반반으로 엇갈려 일치한 결론이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싶다.  봉건제왕의 공과시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 되는것만으로도 중국사에서 진시황이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를 충분히 증명할 있다.

그는 확실히 위대하고 걸출한 역사 인물이다.

 

  u 삼황(三皇)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덕성이 높은 명의 임금.

n  천황씨(天皇氏)   n 지황씨(地皇氏)   n인황씨(人皇氏).

 

u  오제(五帝)    

 

   n 소호(少昊), n 전욱(顓頊), n 제곡(帝嚳), n (), n ()

           이르는데,     소호 대신 황제(黃帝) 넣기도 한다.